[Project 당신] 장미,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각자 생명을 바칠만한 붉은 장미를 찾아내야 한다
글 입력 2022.07.20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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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좋은 인터뷰어의 자질을 갖지 못했다고 인정하면서도 인터뷰 연재를 계속한 이유가 있습니까?

 

A. 사람들은 저마다 발각되기를 기다리는 가벼운 비밀을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사회를 대면하는 공적인 얼굴과 무덤까지 안고 갈 내밀한 의식 사이에 있는 미묘한 중간지대입니다. 결코 스스로 나서서 헤쳐 열어 보이지는 않지만, 적당한 때와 장소에 적당한 손길이 매듭에 닿으면 스르륵 열리는 보따리를 상상하면 비슷할 것 같습니다.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인물일수록 이 중간지대는 풍요롭게 우거져 있습니다. 인터뷰는 깊숙한 심리 상담도 엄정한 취조도 아닙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침범'하지 않은 채, 그를 이해하는 데에 요긴한 구역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입니다.

 

인터뷰집 <진심의 탐닉(김혜리가 만난 크리에이티브 리더 22인)> 中

 

 

김혜리 기자는 인터뷰를 '공적인 얼굴과 내밀한 의식의 경계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했다. 

 

그 경계를 드러내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닌데, 그를 위한 경계선에 진입하는 것 역시 아주 난해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드러내고 싶으면서도 숨기고 싶은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 모순 덩어리를 건져 올리는 것은, 실체 없는 안개를 낚는 것과 같다.

 

분명 내 앞을 가리는 뭔가가 있는데 냉큼 잡아서 치우려 하면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안개. 가만히 있으면 움직이는 것 같고, 움직이면 가만히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안개. 그리고 어둡진 않지만, 그렇다고 밝지도 않은 안개. 이런 안개를 보며 '인간은 안개와 닮아있구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모순적인 특징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잘 투영하기에.

 

안개같은 글을 만났다. 앞이 보이지 않는, 뿌연 느낌의 글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이 앞에 쉽게 찾지 못할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묵직하고 중후한 향을 강하게 풍기는 글이지만 동시에 마른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느낌도 주는 오묘한 글이었다. 낯설고 난해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러면서도 익숙한 듯 편안한 느낌도 들었다.

 

매력적인 외형을 지닌 독버섯처럼 내 이목을 끄는 그 글은 기어코 내 정신을 앗아갔고, 난 건드려서는 안 될 독버섯을 건드린 사람으로서, 서투른 호기심의 대가를 치뤄야 할 모험가로서 그 독의 정체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안개를 마주하길 원하는 사람으로서 안개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을 두고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모순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상덕님을 만나면 꼭 묻고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글을 쓰시냐고. 어떻게 쓰시기에 이런 글을 빚어낼 수 있냐고. 날 혼란에 빠뜨린 이 안개의 근원이 무엇이냐고. 날 여기로 이끈 이 매력적인 독의 정체는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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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00% 주관적 감정으로만 글을 씁니다


 

(동묘역 근처 카페)

 

KJH(이하 K). 영화 모임 이후 3주 만에 뵙네요. 최근 종로 스케치를 연달아 쓰셨죠. 그렇게 폭발적으로 글을 쓰시다니,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평소에 글은 어떻게 쓰세요?

 

SSD(이하 S). 저는 그렇게까지 계획적으로 글을 쓰는 스타일이 아니라 영감이 부르는대로 막 써요. 서론까지는 제가 어느 정도 구상을 하는데, 그 이후부터는 제 통제를 벗어나, 직전까지 쓴 것이 다음에 쓸 것을 결정해요. 한편 그래서 전 제 글을 보면 문단 간의 긴밀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스스로를 자평해요. 성큼성큼 그냥 공중을 뛰어다니는 느낌으로 글을 쓰는 것 같아요.

 

K. 돌다리가 있으면 두드려서 건너지 않고 두세 칸씩 건너뛰는 느낌이네요.

 

S. 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그렇게 글을 쓰기 때문에 더 많은 것들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까 서론까지는 제 계획대로 글을 쓴다고 했죠. 그런데 결론에 도달했을 때는 '어, 이 글 내 글이 아닌데'싶은 순간이 많아요. 물론 제가 썼죠. '내가 지닌 관념과 가치관이 즉흥적으로 내뱉은 답변들이 모여서 여기까지 도달했구나'싶지만 '이게 정말 나의 것인가?'라고 되물었을 때 그렇다, 라고 자신있게 대답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한번 생각 해보는 거죠. 제가 최근에 쓴 글이 조재혁 리사이틀이었으니까 누군가 나에게 조재혁에 대해 물었다 쳐요. 막 신나게 그와 관련된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제가 글에 썼던 결론과 유사한 성질의 것을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뱉을 수 있을까? 하면 아니라는 거죠. 

 

내가 뱉은 말이라는 건 어떠한 논리 강박을 거쳐서 짜여지는 게 아니잖아요. 말은 눈에 보이지 않고 나를 강하게 구속하거나 생각을 통제해내지는 못하니까. 그런 걸 보면 오직 글만이 가능한 것이 있구나 싶죠.

 

그리고 그렇게 쓴 에세이를 한 대여섯 번은 봐요.

 

K.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세요, 아니면 다른 느낌을 받으세요?

 

S. 새로운 느낌까지는 아니고 약간의 사랑, 콩깍지를 느껴요. 이전 글을 다시 보지 않게 되는 때는 다음 글이 태어났을 때인데,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우연히 옛날 글들을 보면 이제 콩깍지가 벗겨졌음을 온몸으로 느끼죠. 그땐 어김없이

 

음. 대단히 별로군.

 

K. 어떤 점에서요?

 

S. 앞서 얘기했던 문단 간의 논리적 연계성이나 흐름의 부자연스러움이요. 콩깍지가 씌여 있을 때는 안 보여요. 왜냐하면 쓴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글 같은 경우는 의식하지 않아도 문단 간의 연계를 몸이 기억하고 있거든요. 이런 건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기 마련이라 나중에 제 글을 다시 보면 그때서야 보이죠.

 

K. 나중에 콩깍지가 벗겨지는 건 저도 그래요. 아마 글쓰는 사람들은 다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그래도 이전 글들이 당시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다 쏟아낸 결과라고 생각하니 그나마 좀 위안이 되더군요.

 

S. 굳이 제가 쓴 글은 몇 개인가, 한번 세어봤어요. 보니까 거의 (아트인사이트에) 100개 가까이 올렸더라고요. 너무 많으니까 하나하나 이건 별로였어, 이건 좀 괜찮았지, 이제 이런 건 안 하기로 했어요.

 

K. 판단 자체를 하지 않기로 하셨네요.

 

S. 네.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나는 그냥 쏟아내는 사람일 뿐이고 이건 그 결과야, 이런 식으로요.

 

개별적으로 판단하려 하진 않지만 2~3년 전에 쓴 글이랑 지금 글이랑 비교해 보면 그래도 퀄리티 차이가 꽤 크다고 생각해요. 생각의 깊이나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의 세련됨, 그리고 어떤 주장을 내비칠 때 치기 어린 마음에서 나오는 정제되지 못한 감각 등 그때 당시에 부족했던 게 많이 보여요. 

 

이게 내 주장이야,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것 같긴 한데 그건 네 생각이고, 이건 내 생각이야. 싫으면 어쩔 수 없어. 그건 내 능력 밖이니까.

 

같은 마인드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걸 느끼지만 그래도 틀에 박힌 소리는 안 하려고 해요. 조금 기다릴 줄도 알고요. 나는 이런 점이 내 강점이라 생각하고 글 쓰는 앞으로의 나날 동안에도 꾸준히 내 곁에 있으면 좋겠다, 싶어요. 

 

K. 그게 전 좋았어요. 상덕님의 글은 색이 뚜렷하거든요. 표현의 풍부함이나 감정의 깊이가 심오하다는 게 느껴졌어요. 그 부분이 저에겐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고요. 그래서 상덕님 글은 분량이 엄청 긴데도 부담 없이 봤던 것 같아요. 

 

아, 물론 어려운 부분도 있긴 있어요(웃음). 어려운 표현이나 생소한 단어들도 있는데 그 부분이 의미 없이 들어갈리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낯선 감정이 사라지더라고요. 되려 한 편의 문학 작품을 본다는 느낌이었고요.

 

S. 저는 진짜 100% 주관적 감정으로만 글을 쓰는 사람이에요. 자의적인 표현을 스스럼 없이 풀어내는데,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난해함에 있어서 '이런 감정들을 어떻게 이해시키지'라는 인식 이전에 있어야 될 것이 '이게 얼마나 어렵지'인데 제가 나름 신경을 쓴다고 해도 그걸 전부 다 인식하지는 못하거든요. 문장을 쓸 때마다, 주관적 표현이 나올 때마다 '이건 어렵다, 이건 어렵지 않다'를 전부 다 생각하지는 못하잖아요.

 

K. 그렇죠. 전 오히려 그렇게 걸러지는 과정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상덕님 글만의 정체성이 없어질 거라 생각해요.

 

S. 그것도 공감해요. 그러고도 싶지 않고.

 

일단 아까 얘기했듯 '내 글이 별로면 어쩔 수 없는 거야'라는 생각이 있기도 하고, 내 글에 대한 사랑 혹은 집념이 있어야 그 안에 커다란 에너지가 깃들이리라 생각하거든요. 완벽주의에 대한 집착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만 집중해야 해요.

 

나는 그래도 누군가한테 '얘는 글을 되게 못 쓰네'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나는 내가 글을 잘 쓴다 생각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난 나름의 노력을 할 거야.

 

라는 스타일의 사고 방식을 지향하기 때문에 주관적 표현이 많이 나온다 생각해요.

 

하지만 이것도 마찬가지로 콩깍지가 벗겨졌을 때 제대로 보이거든요? '야~ 이건 못 알아먹지, 이걸 어떻게 이해하겠냐'(웃음) 지나고 보면 그런 부분이 되게 많아요. 근데 소설도 그렇잖아요. 읽다가 뭐라는지 모르겠다면 그냥 대충 넘어가면 되듯이 그런 식으로 읽어주셨겠지. 아니, 애초에 읽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내 글을 누가 읽는구나, 라는 객관적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고 그 자체가 저에게 큰 울림을 줬어요.

 

저는 평소에 정말 많은 것을 느낀다고 생각 하거든요? 감정이나 생각들이 제 안에서 되게 많이 웅웅 거려요.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나는 이것을 정말 커다랗게 느껴'라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종의 비교 대상이 필요하잖아요.

 

비교 대상을 일상의 사건과 그에 대한 감정들로 놓고 보면 일상의 사건들에서 느껴지는 울림에 비해서 그 순간의 것은 막대하다고 여겨졌어요. 한편 글을 써내려가는 순간에 느껴지는 울림도 대단히 크다고 얘기할 수 있을 텐데, 글쓰기의 울림을 아득히 초월하는 감각을 누가 내 글을 읽는다는 걸 알았을 때 느꼈어요. 제 존재가 간만에 흔들흔들 거리는 느낌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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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남한테 제 생각을 관철시킬 생각이 없어요. 내 안의 나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형성되어 있거든요. 깐깐하고 고집이 세요. 이걸 이해시킬 수도 없거니와, 이해시킬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으려고 해요. 많이 개인주의적인데, 그건 이를테면,

 

그래. 난 너의 얘기에 최대한 고집을 부리지 않겠어. 그러니 네가 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한다면 너는 나에게 아주 모진 말을 듣게 될 거야.

 

K. 좋은 말로 줏대있다, 라고 표현을 한번 해보죠.

 

S. 전 이 고집들이 굉장히 단단하다고 느끼고 거기에 양보를 못하는데, 즉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이고 나 혼자 있을 때 혼자 생각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요. 근데 그걸 또 다르게 표현하자면 새롭다는 느낌을 많이 받지 않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

 

K. 기존에 가득차 있던 것들이 워낙 많으니까요.

 

S. 네. 그런데 그걸 아득히 초월하는 감각을 받으니까. 저는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어요.

 

지금 이 순간 나의 존재가 뒤흔들린다고 얘기해본들 나는 당당할 수 있다. 만약 누가 이런 나를 이해치 못해서 수상한 눈빛을 안고 있다면, 그건 첫 번째, 내가 너한테 제대로 이해시키지 못했거나, 아니면 두 번째, 너에게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후자라면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 해버릴 정도로 분명하고도 뚜렷한 흔들림을 느꼈어요. 그리고 이게 재훈씨가 제게 준 선물이고, 제가 재훈씨와 인터뷰하고 싶은 가장 주된 이유였어요.

 

K. 저야말로 감사한데요.

 

S. 고집이 세지만 자기 긍정이 많지는 않아서, 오히려 자기부정이 지나치게 강한 내가 나에게 주는 자기 긍정은 필요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고 스스로에게 씌워주는 면류관 같은 느낌이기 때문에 그렇게 막 밀도있거나 단단하지 않아요. 이렇게 만들어 낸 자기 긍정은 한계가 뚜렷해요. 일정 수준 이상의 자존을 느낄 수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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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그런 건 천장이 있는 것 같아요. 

 

S. 스스로 자연히 느끼는 게 이만하다 치고(손으로 조그맣게 원을 그린다) 만들어 먹는 게 이만하다 치면(이전 원보다 더 큰 원을 그린다) 저는 이것보다 더 큰 위상을 가지는 게, '내가 원하는 것을 기대치도 않았는데 남이 줄 때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건 진짜 환희 그 자체이기 때문에.

 

K. 제가 상덕님께 본의 아니게 큰 영감을 준 셈이네요.

 

S. 되게 커요. 이런 순간이 정말 감사한 까닭은 아까 느꼈다던 환희도 있지만 어린 아이의 모먼트를 간만에 느꼈다는 점도 있어요.

 

K. 와,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S. 그런거죠. '와 이거 어떻게 해야 되냐?'싶은 정도였어요. 원래 같으면 '되게 행복하네', '그래 이건 응당 그럴만한 행복이야, 난 그럴 자격이 있어' 혹은 '이건 네가 그렇게 흔들릴 만한 정도가 아니야'와 같은 식으로 무색하게 느낀다면 그 순간은 '이거... 뭐 어떻게 해야 하냐' 같이 어쩔 줄 모르는 상태가 되는 신선한 경험인거죠.

 


 

재창조를 위한 해체



K. 아까 자기 긍정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잖아요. 듣고 생각이 난 게, 자기 부정은 자기 긍정보다 훨씬 더 큰 에너지를 갖고 있지만, 자기 부정에서 기인한 힘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것보다 자기 긍정에 영향을 받아 조금씩이라도 무언가를 건설하는 게 더 좋은 것 같아요.

 

S. 정말 잘 짚어주셨어요. 

 

저는 자기 파괴가 정말 심한 사람이었어요. 자기 강박도 되게 셌고요, 우울증도 있었어요. 

 

K. 그건 굉장히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것인가요.

 

S. 네. 요즘 그래서 <무애>라는 에세이를 통해 제대로 풀어내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해서 근 한 달 간 썼던 다른 글들에서 조금씩 표현했던 건데, 장장 10년 간의 독이 이제 끝난 것 같아요. 10년 더 됐죠? 10대 중반부터 있었으니까. 그래서 글을 썼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와 뒤돌아 보면 제가 믿는 운명론적 관점에 의해 이 모든 것은 필연이었던 것 같아요.

 

또 제가 애정하는 한 줄의 경구가 가리키고 있듯이,

 

모든 고통이 그 사람을 해체하고 파괴하되 그것이 재창조를 위한 하나의 선결 과제가 되어 준다면, 그것은 오히려 무심한 신이 행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높이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는 그것을 몸소 증명했고, 내가 예상하고 바라고 주찰했던 지금에 도달했다.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K. 재창조의 과정이란 말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S. 사실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제일 주요했던 게 해체였잖아요.

 

제 대학원생 친구들 말을 인용해서 잠깐 이야기 해볼게요.

 

세상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발명되었어요. 우리는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계속 새로운 것을 감지해야 하는데, 이미 나올만 한 것은 다 나왔고 더이상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내기는 어려운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에 대해 내놓은 답이 해체래요. 

 

마치 서울 지리처럼요. 서울엔 빈 땅이 없잖아요. 여기에 새로운 것을 짓고 싶으면 건물 층수를 올리거나 리모델링을 해야 하는데, 보니까 기존에 지은 낡은 건물로 꽉 차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낡은 건물을 리모델링하거나 증축하려고 했는데, 그대로 올리면 무너질 것 같은거죠. 그래서 해체를 결정하게 되었는데, 해체 후 재건축 과정에서 시공사가 부도가 난 거예요. 

 

이런 과정을 포스트 모더니즘이다, 라고 친구가 이야기 했어요. 결과적으로 보면 그냥 해체만 한 거죠. 새로운 것을 만들 엄두가 안 나니까 해체만 한 거예요. 잘 모르고 하는 섣부른 이야기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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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 해체는 반드시 재창조를 전제로 했을 때만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누가 피 땀 흘려 만들어 낸 창조물을 아무런 의식 없이 손쉽게 부수는 행위는 정말 의미 없는 짓에 불과한 거잖아요.

 

다시 '해체는 재창조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라는 문장으로 돌아와서,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는 까닭은 제가 지난한 자기 해체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에요. 그때 너무 고돼고 공허해지기만 해서 결국 든 생각이,

 

아- 다시 세워야겠다. 

 

K. 그래서 글을 쓰게 되셨군요.

 

S. 맞아요. 제가 관념적인 글쓰기를 하게 된 이유는 스스로가 내 안의 관념 세계에 대해서 너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제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왔고, 그것이 나의 일상을 살아가는 표면 의식까지 침범할 정도로 범람을 했기 때문이고요.

 

그 과정에서 저는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려 했어요. 왜냐하면 우선 도해하고 해체해야되니까.

 

K. 해체하고 분석을 한 다음, 그게 왜 여기까지 올라왔는가, 알아야 하니까요.

 

S. 길을 잃어버리면 진짜 답도 없을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나의 내면을 바라보는데, 인간은 자신이 이해치 못하는 것들로 고통을 받는단 말이죠?

 

K. 이해할 수 없다, 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해를 하려하죠.

 

S. 예. 그런 부조리한 상태에 머무는 것을 그리 반기는 타입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것을 들여다보고 그 과정 속에서 가설과 증명을 되게 많이 했고요, 그러다 이건 마음에 든다, 라고 했던 것들을 글로 썼어요.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저를 다시 되돌아보니, 그렇게 지리멸렬한 과정을 거쳐서 쓰게 된 글이 결국에는 나의 힘이라 생각하게 되었네요.

 

아마 그런 이유들로 인해 저는 제 내면 세계를 침해받는 것에 되게 날선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아요.

 

야, 내가 알아서 부순다잖아. 내가 이 투박해진 손으로 다시금 하나하나 모래성을 쌓고 있는데, 발길질 좀 하지 말아라. 너 없이도 난 잘 해체하는 사람이었고 여태 그래 왔다. 너까지 그러지 말아라.

 

하는 마음에서 과민 반응으로 나온 것 같아요.

 

아무튼 되게 지난한 시간을 거쳤어요. 지금은 잘 극복했고요. 저는 이게 오직 글로서 행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K. 글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S. 예전에 '정상 범주의 감각 속에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정상 범주 안의 사람들이 과연 알까'라고 얘기 한 적이 있어요.

 

누구나가 느끼는 것과 유사한 결, 그리고 유사한 세기로만 느끼고 또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는 그 연대 속에서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K. 마치 평화 속에 사는 사람들은, 누군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왔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는 것처럼.

 

S. 그렇죠.

 

정상 범주의 경계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정상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고, 누가 이런 것을 설명해달라고 하면 되게 지루하고 지난한 얘기들을 해줄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럼에도 그건 개인적인 일화에 불과할 뿐이지 증명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설명하기가 막연하다는 거죠.

 

어찌 되었건 나는 짜증을 많이 부리고 많이 슬퍼하며 혹은 지나치게 센티멘털해지는 경향을 보일 때도 있다. 그런 것들이 버무려져서 고독이랑 몸을 뒤섞으면 이상한 센티멘털 로맨티시즘을 자아내기까지 한다는 것을 나는 스스로 관찰할 수 있다. 이 많은 것들이 쉽게 이해받기 어려운 것들이라는 것 역시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은 내가 그것을 최소한 인식은 하고 있다는 거죠.

 

K. 그리고 그걸 글로 풀어내려 하시고요.

 

S.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비정상 범주의 감각 속을 살았던 과거에는 글쓰기가 되게 쉬웠어요. 그 상태서는 계속해서 풀어낼 것들이 마음에 솟고 응어지리어 웅웅거리거든요. 몇 년 전, 취업 준비할 때 마음 잡히지가 않아서, 그러니까 다른 관념들에 얽메어 있어서 토익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만 지니곤 세 달 동안 토익 공부를 못했던 때가 있었거든요. 그때는 진짜 내면세계가 너무 지리멸렬하고 고되서 하루 16시간씩 글을 썼던 것 같아요. 쉬지 않고 솟아나는 것들을 나는 그대로 옮기는 것에 불과했고요.

 

물론 그것들은 독자를 상정한 글이 아니었기 때문에 완전 자의적인 기표와 기의로만 게워내서 썼어요. 아직도 미공개 글인데, 그걸 지금 다시 보면 와... 이렇게 어두운...

 

K. 뒤틀린 악? 광기? 무언가에 찌들어 있는? 

 

S. 악하진 않은 것 같고... 독이라고 부르곤 해요.(웃음)

 

K. 어우, 굉장히 위험하네요.

 

S. 불길하고 찐득찐득하죠. 시컴하고. 뭔가 타르 같다고 생각했어요.

 

K. 그래서 남들에게 보여주기 그렇고. 

 

S. 예, 어렵죠. 근데 그때는 한편 그런 생각도 했어요. 제가 언젠가 바뀔 것이리라고 굳게 믿었어요. 그럼 미래의 저는 이 순간을 가지고 또 글을 쓸 수 있을 테고요.

 

지금은 일단 그걸 쓸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 것 같긴 한데 아직은 쓰고 싶지 않아요. 다른 쓰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K. 좋은데요? 글의 원천이 많다고 하시니까요. 

 

S. 이쯤되면 제가 직장을 때려치우고 글을 쓰는 건 어떨까 싶지만, 그래도 든든한 캐시카우를 형성할 만큼 안정적인 상황은 아니어서요. 약간 매니악한 팬층은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당장의 벌이는 어렵겠지만, 10년 15년 쓰면 책으로 생활을 할 수 있겠지, 그게 내 노후 대책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무관심하고 다정한 눈빛의 신


 

K. 팬층, 분명히 생길 거예요. 글 자체가 품고 있는 아우라가 워낙 세기 때문에 저는 분명히 생길 거라 확신해요.

 

S. 누군가는 내 글이 가지는 아이덴티티를 동경할 수 있겠다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거기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 이유는,

 

나 또한 그대들이 가지는 매끄러움이나 보편성을 동경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서로 동경하는 우리를 심상 속에 그려보면 그걸 바라보는 나는 이 작은 세계 속에서 참으로 무심한듯 다정한 신이 되어 먼 하늘에서 굽어본다, 딱 그런 구도에서 너와 나를 그리어 바라보면 나는 아무런 동요 없이 무심하고도 다정하게만 바라 볼 수 있겠다. 일상에서는 할 수 없었던 것, 어느 신이 내게 그러했듯...

 

그런 생각에 도달하고 심상을 빠져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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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방금 말씀하신 '무관심하고 다정한 눈빛'이라는 표현 너무 좋은데요. 거기다 상덕님 글에는 신과 관련된 개념도 종종 등장하고요. 

 

S. 제가 제대로 쓰고 싶은 것 중 하나인데, 언젠가는 신 개념에 대한 논고를 쓰고 싶어요. 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신을 믿는다, 할 때의 형체를 가진 신이 아니라 신이라는 개념 자체를 믿어요. 그런데 아직 문장으로 표현될만큼 여물지 못했기도 하고 지금 소비하고 싶지도 않아요. 

 

이건 내가 너무 귀히 여기는 개념이어서 여물 때까지 아껴놔야겠다, 하는 생각이에요. 이 개념으로 하나의 세계관을 만든다면 핵심 컨셉트가 될 수 있을 텐데 아직은 그걸 다룰 만큼 생각이 영글지가 않았어요.

 

K. 그걸 적확히 표현할 구체적인 무언가를 생각 못하셨군요.

 

S. 네. 피상적인 낱말들은 떠다니는데, 그걸 하나로 묶을 만큼 실체화는 덜 됐어요. 

 

글을 쓸 때면, 뭔가 머리 뒷 쪽 구석에 실루엣으로 흔들리고 지나다니는 것들, 그런 희미한 그림자를 우연히 자각하곤 그걸 들여다보려고 가만히 쪼아봐요. 쪼아보면서 빠르게 움직이는 형체를 눈으로 쫓다가 어느 순간 스냅샷이 포착되면 '아, 여기엔 이런 문장이 어울릴 것 같아'라는 식으로 그걸 현상하는 하나의 시도를 하고요, 그 다음에 그렇게 만든 문장을 지지부진하게 이어가면 문단이 될 테고, 결국 문단이 된 다음에 그걸 돌아봐요.

 

이데아의 그림자에 이렇게 스케치를 해보았는데, 어울린다고 여기느냐, 이 정도면 퍽 어울린다고 여겨도 좋다. 혹 아니, 마땅찮다 여긴다.

 

관념적 글쓰기는 대충 이런 식으로 그려지니까 신과 관련해서는 그 과정이 잘 안 되고 있다는 거죠. 마땅찮다고 여기는 상태를 '갈증'이라 표현해요. 그리고 글 쓸 때엔 대부분 시간을 갈증을 느끼며 버텨요. 이 갈증이 글을 자꾸만 너저분하고 길게 만드는 것 같아요.


K. 눈에 보이지 않고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는 신을 구체적이고 피상적인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기란...

 

S. 다정한 무관심이라는 것도 결국 천지불인(天地不仁)의 개념과 비슷한 것이고 그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존재, 인간 이외의 모든 것들이 인간과 같은 사고방식과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메마른 사실을 가리켜요. 저는 그 사실을 인간이 귀의하려는 존재인 신에게도 적용하려고 하는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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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는 유명 종교들 있잖아요. 그런 종교들을 보면 신은 모두 다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돼요. 왜 사람들은 인형(人形)으로 신을 묘사 했을까. 예수의 실존이야 딱히 이견이 없는 것이라지만, 기독교를 떠나서 어떤 신계에도 인외형의 신은 좀체 그려지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그걸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이다, 라고 딱딱하게 표현해서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할 여지를 일축시키고 싶지 않아요. 대신 저는 신이 실제로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 신을 믿고자 하는 본능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 하고 싶어요. 저는 그걸 개인적인 단어로 종교성이라고 표현하는데, 각자의 종교성이 먼저 있고 그런 종교성을 바탕으로 우리들은 신을 연상하게 되는 거라고 가정하는 거죠.

 

전 그렇게 만들어진 인형의 신이 수 천만 명끼리 동족상잔하는 우리를 바라볼 때의 눈을 한번 그려봤어요. 연극 <라스트 세션'이 기억에서 떠오르네요. 인자한 것 같지만 오히려 소름끼치는 눈이 그려지더라고요. 저것이 바로 다정한 무관심이겠구나, 싶었죠. '인간의' 비극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는, 기도를 듣지 않는 신은, 사실 저런 눈빛으로 우리를 굽어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면서요.

 

저 눈빛에 대해서 세간 사람들의 관점을 부여한다면, 너무 무책임 한 것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아니, 오히려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그에게 나는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K. 느끼지 않는다?

 

S. 그는 정말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일 수도 있고, 한편 그렇다면 우린 무엇을 근거로 그가 우리를 사랑하리라고 얘기하는 것일까. 그건 그의 사랑을 우리가 느끼는 게 아니라, 그가 우리를 사랑하리라고 섣불리 예측하기 때문이고 그 사랑을 내가 바라기 때문이다.

 

저번에 <이슬람 사원 앞에서>에서 썼지만, 이슬람교도 결국에는 기독교 세계관과 똑같은 신을 믿고 있잖아요.

 

이런 하나님은 과거 우리를 쓸어버리려 했던 존재다, 그런 사람이 우리를 창조했다고 하더라. 그는 정말 우리를 사랑할까? 아니. 우리를 사랑한 건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지. 근데 예수는 어떻지? 아무런 힘이 없지. 그는 그저 대속자였으니까.

 

그렇다면 예수는 우리가 섣불리 감사를 느끼려는 신과의 매개인 것이고 그렇다면 진정한 절대자로서의 신은 어떻지? 신은 다정한 것처럼 보이는 사실은 텅 비어 있는 눈을 하고서 우리를 그냥 지켜만 보고 있다. 지켜만 본다는 것은 사실 인간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해석하는 존재이니까. 우리와 다른 그 존재에게 인간의 가치 판단 준거를 투사할 수 없다. 

 

그럼 그 존재의 의의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거지? 왜냐하면 인간이 생각하고 떠올릴 수 있는 존재의 의의라는 것은 인간과의 관계성 속에서 유추되는 것이니까. 그러니 인간 상위 존재인 그에 대해 우리는 지극히 인간적 관점인 존재 가치와 의의를 부여할 수 없다. 결국 그 자와 이승에 있는 나의 연관성은 아직 떠올릴 수 없다. 그래, 그게 내가 생각하는 신이다. 그럼 그 자는 내 안에서 적어도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여기서 운명론을 끌어와요.

 

그 존재는 그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 존재가 그토록 무관심한 눈빛을 하는 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지(全知)는 태초부터 종말까지, 우주의 한쪽 편 끝으로부터 다른 쪽 끝까지,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진 온 우주의 역사를 이미 온전히 알고 있는 그에게 '지금 이 순간'은 무엇이 될 것이며, 너와 나의 사정은 그 얼만한 무게감을 가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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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아, 그래서 관조를 하는 것이다?

 

S. 예. 한편 모든 걸 잘 알고 있는 존재의 관점을 그려보고 나는 그를 떠올림으로써 영원회귀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겠다, 싶어요. 영원회귀 관점을 나에게 부여할 때마다 저는 그려본 전지적 신존재의 관점에서 나의 과거와 지금과 미래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영원회귀를 이해해요.

 

K. 멀리서 가까이 오는 방식으로 관점을 발견을 하신 거네요.

 

S. 관점을 그려내려고 하거든요. 하나의 관점을 발견하면, 그 관점을 가지고 일상 세계에 접목을 시킬 수 있어요. 이 쓸모없는 사고 실험이 최소한의 개인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거죠. 어쨌든 그냥 그게 재밌어서 하는 거예요.

 

방금까지 말씀드린 신과 관련된 것들도 정리가 안 된 상태의 생각들이고, 그래서 글로 쓰기도 아직 일러요.

 

K. 이걸 하나로 모아서 글로 쓴다는 게 진짜 어려울것 같긴 하네요. 이걸 일목요연하게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어떤 알맞은 단어를 써야 하고 이것이 설득되기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하고, 이런 걸 고민하면 머리가 터질것 같아요.

 

S. 저는 근데 공부를 안 하거든요. 이런 걸 흐드러지게 쓰려면 공부를 해야 돼요. 천주교 신학이랑 도가 사상, 이슬람교 신학을 공부해서 상호 비교 전개하면서 글을 써나가면 괜찮은 글이 될 것 같은데 저는 공부하지 않아요. 취준 때랑 마찬가지 이유인 것 같아요. 다른 걸 해보기엔 아직 쓰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그래서 재훈씨가 쓰신 마지막 인터뷰를 봤거든요. 그 분은 1년 동안 준비하셔서 글을 쓴다고 하던데.

 

K. 아, 중민님이요?

 

S. 네.

 

와~~?! 이렇게 쓰신다고?!?(웃음) 나는 절대 그럴 수 없지.

 

K. 정말 대단하시죠.

 

S. 너무 멋있던데요.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K. 아까 상덕님께서 '각자의 마음에는 신을 믿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신 자리에 다른 것을 넣어보고 싶어요. 우리는 뭔가를 맹목적으로 믿고 싶어하고, 결국 그런 마음이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되거든요.

 

S. 맞아요. 정말 비슷하게 생각해요. 사실 제 안에는 맹목적인 믿음이 많아요. 무관심한 눈빛의 신 개념도 아무런 근거나 자료 없이 멋대로 생각한거잖아요? 사실 이미 저기에 오류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저는 어떤 이유 때문에 믿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을 믿고 싶어서 이유를 찾곤 해요. 한편 논리가 부족해서 불안해하기도 해요. 그래서 제가 선택한 건 비유와 비약이었어요.

 

드디어 비유 이야기 할 차례가 왔군요. 저는 이제 비유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어요. 비유를 되게 많이 쓰는데, 비유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개연성 따위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개연성을 너무 고려치 않아서 자의적인 비유로 남거나, 너무 천착하느라 아무런 새로움도 배태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비유를 낳거나,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 속에서 저는 전자를 택하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그 과정은 하나의 모험이고, 이미 하나의 실패이면서도, 분명히 하나의 새로움이 되어 줄 것이라고 저는 믿거든요.

 

차라리 몰락을 할지언정 모험하는 쪽을 택하겠다.

 

어떤 주장을 하기 위해선 그보다 많은 자료수집이 필요하지만, 쓰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입장에서는 그게 참 어려워요. 변명이지만... 점점 주장하고 싶은 것의 사이즈가 커질수록 논리 강박 때문에 아무것도 못 쓰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반짝이는 영감들은 사라졌어요. 그때쯤 저는 비약을 굳이 절제하지 않기로 했어요. 적어도 비유에 있어서는 비약을 기꺼이 하고요, 사실 글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문단이랑 문단 사이에 돌다리를 놔야 하는데, 점프를 엄청해서라도 일단 갈 수 있는데까지 가보는 거죠. 증명과 보론은 미래의 내게 떠밀어두고, 지금 이 순간의 영감이 나를 어느 낯선 곳까지 데려갈 수 있을지만 생각하기로 했어요.


이끌려 도착한 낯선 곳의 즐거움을 난 내 글에서 느낀다. 

 

여담인데, 제가 아트인사이트 초창기에 썼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 글이 있는데, 거기에 그런 이런 내용이 나와요.

 

글을 쓰고 싶으냐. 그럼 그것을 죽을 만큼 사랑해야 해.

 

그러니까 진짜 오랫동안 써야 하고 일부러 써서는 안 되는데, 그런데도 오래 써야 한다면 그건 사랑하는 방법 밖에 없다는 거죠. 

 

사랑에도 여러 위상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글쓰는 마음은 첫사랑이어서는 안 되고 진득하니 오래 가는 그런 사랑이어야 해요. 그런데 이 마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증명할 수 없어요. 애초에 삶과 사랑은 오래도록 증명하는 과정 한 가운데에 놓여있는 것이라고 봐요. 영원히요.

 

K.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는 거죠? 도달할 수도 없고.

 

S. 이건 결과론적 얘기고 증명할 수 없는 얘기지만, 어쨌든 글을 써서 먹고 살려면 오래도록 사랑해야하는 것이다. 그건 미리 알아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결론을 알지 못하는 채로도 오래 행하는 것, 그것이 참 사랑함 아닐까?

 

K. 그것 밖에 방법이 없기 때문이고.

 

S. 그나마 이 앞에서 우리가 해보일 수 있는 검증 방식은 글을 쓰지 않았을 때의 상태를 바라보는 거예요. 글을 쓰지 않았을 때 정말 죽겠다, 생각이 드는 지 확인해보는 거죠. 어떤 죽음의 본능을 느낀다면 그건 한정적으로나마 내 글에 대한 사랑을 반증하는 셈이 되겠죠.

 

어쨌든 저는 영원히 글을 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요.

 

K. 이전에는 그렇지 못했다면 지금은 확신이 생겼다는 건가요?

 

S. 이전엔 반신반의 한 건데, 이제는 확신이 생긴 거죠. 

 

그걸 증명하라고 누군가 얘기한다면 그에게 해줄 이야기란 없다. 내가 다만 그렇게 느낄 뿐인데. 내가 이 느낌을 믿는 까닭인 즉, 내가 원래 나를 잘 안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내가 나를 불신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싶지는 않다. 애초에 납득이 불가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내 마음가짐의 객관적 증명을 나한테 요구 한다면 나는 너에게 그저 웃어보일 것이다.(웃음)

 

어쨌든 내가 그렇게 느끼고 확신한다는 건 일단 나의 세계에서는 굉장히 대단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긍정적 감정만을 나는 글에 쓸 것이다. 누구에게 이해시킬 자신이 없으니, 의미만을 남길 것이다.

 

그런 것 같아요. 원래는 '이런 똥글을 누가 읽지?'였다면 이제는,

 

지금의 나는 4년 전의 나보다 잘 쓰는군. 이제부터 10년은 더 쓸 자신이 있다. 그러면 10년 뒤는 지금보다 3배 더 훌륭할테고, 그렇다면 난 더 이상 순간순간인 지금의 글에 발목 잡히지 않겠다.

 

언젠가 책을 내야지, 할 때, 과거였다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200페이지 이상의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다. 왜? 지금까지 아트인사이트에 근 100개의 글을 썼으니. 그 중 리뷰로 썼던 절반의 글을 빼고서 나머지 글들을 A4용지로 치환하면 850장 가까이 썼다고 할 수 있다. 10년 글을 더 쓰면 3천 장을 쓸 테고 그럼 내가 썼던 글을 테마별로 묶어서 책을 낼 수 있겠지. 아니, 내야지.

 

그러니까 처음부터 창작을 계획대로 하지 않기로 했어요. 다 써놓은 거 일단 긁어 모아서 그때의 관점으로 조금 보완을 한 다음 책을 연타로 낼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글이 더 탄력받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글이 많이 나와요.

 

K. <종로 스케치>도 그 일환으로 계속 나왔습니다. 

 

S. 그쵸. 분명히 그 일환이기도 하고요. 근데 종로 스케치는 쓰다 보니까 사랑하게 된 케이스예요.

 

종로 스케치 1번 세운상가는 사랑이 감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썼던 글인데, 2편 쓰고, 3편 쓰고, 4편에서 갑자기 뻥 터져서 4-2, 4-3까지 나왔어요. 그러니까 저는 종로를 짐짓 사랑하는 척, 혹은 못내 관심 가지기만 했던 종로를 글 쓰다가 그 씀으로 인해 찐사랑을 해버렸어요.

 

그럼 그 전에는 사랑한 게 아니구나. 왜? 난 지금 더 사랑하니까.

 

K. 처음엔 사랑이 아니었다가 나중에서야 사랑으로 느껴지게 된 글이 종로 스케치네요.

 

S. 네. 그래서 지금 5번을 못 쓰고 있어요. 4번에서 원기옥을 너무 일찍 터트려서.

 

K. (웃음)필살기를 쓰셨네요?

 

S. 본의 아니었지만요. 그러니까 (5편의 글감인)광장 시장은 갔어요. 갔는데 이걸 쓰면 전작의 그늘에 가리겠는데?(웃음) 싶어서.

 

K. 4편 임팩트가 너무 강했네요.

 

S. 그래서 일단 한동안 쉬기로 했어요. 다시 참된 모험심이 차오를 때까지.

 

 

 

장미,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K. 지금까지 글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제게도 그렇고 상덕님에게도 그렇고 글은 '나'라는 인간을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축인 것 같아요. 어쩌면 우리가 글을 만나게 된 것은 운명론적 관점에 의해 필연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S. 그런 셈이죠. 우리에게 글이 가지는 의미와 위상, 꿈을 좇는 모습들에 대해서 누군가는 사명이라 칭하고 누군가는 소명이라 칭하고 보편적인 말로는 운명이라고도 얘기해보일 수 있겠지만, 저는 그냥 릴케식으로 표현하고 싶어요. 

 

각자 생명을 바칠 만한 붉은 장미를 찾아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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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 사람들은 이런 것을 보통 '꿈'이라고 표현하잖아요? 꿈이 있어야 돼, 꿈을 꿔야 해, 라면서요. 하지만 그냥 단순히 꿈을 찾아야 돼, 라는 손 쉬운 말로는 우리가 가진 어떤 엄중함, 무거운 진지함을 담아낼 수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도 우리는 각자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글을 사랑한다.

 

그리고 보다 자세하게, 보다 적확하게 얘기하자면,

 

나는 내가 지금까지 써왔던 모든 글들이 나의 말과 사상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여기에 나는 내 삶과 내 청춘을 바쳐왔고 누군가 엄두도 못 낼 만큼의 시간과 정력과 열정을 쏟았기에 나는 내 사랑을 스스로에게 증명했다. 그리고 여태 그래 온 시간보다 훨씬 더 장대히 펼쳐진 미래로, 나의 사랑은 이어져 있다.

 

고로 나의 붉은 장미는 발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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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끝나고 몇 주 뒤.

 

 

[카카오톡]

 

(7월 7일)

 

K : S님! 드디어 인터뷰 원고를 어느 정도 완성했어요..! 읽어보시고 수정하고 싶은 부분 있으시면 다시 보내주세요. 그대로 반영하도록 할게요!

 

S : 오오! 살 떨리는데, 기대되네요...

 

K : 그리고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더 있는데, 릴케 시 중에 '각자 생명을 바칠만한 붉은 장미를 찾아내야만 한다'라는 경구를 뒷받침 해줄만한 시가 있다면 혹시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S : 확인해보고 연락드릴게요.

 

(8일)

 

S : 릴케 기도시집을 한번 뒤져봤는데, 장미의 비유는 못 찾았습니다.

 

K : 아... 아쉽네요...

 

S : 어울릴만한 걸 한번 써볼게요. 수정본에 첨부해서 회신드리겠습니다.


 

장미, 정열을 비유하는 심장의 붉은 색.

오랠 꿈의 시원이자 종착

네게 닿을 수 있는가.

너를 꺾어, 마침내 손아귀에 담아볼 수 있는가.

그건 영원히 알 수 없는 것

그렇기에 가혹한 것

 

하지만 꽃봉오리가 낙엽이 되면,

토지 위에 버려진 어느 현실처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다.

 

열렬함을 바칠 너는 가혹하기만 해야하는 것,

눈길도 힌트도 주지 말고 도도하게만 있으라

나는 홀린 듯, 기꺼이 알 수 없는 미래로 이끌릴 것이다

보이지 않는 층계를 잡아 아득히 따라 오르리이다

 

몰락의 두려운 환영마저도 집어삼키는 영혼의 갈증에

이 경배를 바치리다

그제서야 너는

머나먼 행성으로 이어진 길을 실낱같이 드리운다.

 

모든 인간의 태양은 지고, 이내

억년의 시간을 메운 공허를 보라.

낮에는 삶을, 고로 밤에는 꿈을 꾸는 것이다.

 

그 자리,

황도를 따라 인간을 유혹하는 열두 운명들이

밤의 눈을 뜬다.

그리고 어느 금발 소년의 사랑처럼,

저기 멀리 찾지 못할 나의 별에는 기다리는 장미가 있을 테다.

 

양자리를 지키는 반인반수의 신이 목동이 된 땅,

나의 정원엔 장미가 피어나고 있을 것이다.

본 적 없는 너를 그리메,

나는 꿈을 꾸어 지상을 오른다.

 

그러나 드높이는만큼 좌절시킬 순수는 모순,

환희케 하고 그만큼 절망케 하는 사랑,

기꺼이 그 앞에 복종하고 처분대로 내 육신을 던질 것이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밤의 심연 위로 나를 띄우리다.

경배하리다.

검은 강 쪽배에 둥실 떠,

서편으로 침몰하는 네게 전부 맡기리다.

 

경배받으라

 

그것은 날아 오르는만큼 지상에서 멀어지는 것

구름과 별의 높이까지 닿은 아득한 낙차

이제 지루한 대지를 굽어보라.

허무는 무한히 뻗은 수평처럼 들끓고 있었다.

 

그리고 저기서 나의 젊음은 올려다보고 있다.

별을 찾는 어리석은 모습,

너의 무구한 눈동자 속의 나는

하늘을 뒤덮은 무수한 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이내 떨어지며 꼬리를 짓는 별에는

동경하는 소원을 빌어라.

그리고 영원히 다시 따라오르는 것이다.

그렇게 너와 나는 추억으로 간직되는 영원 속을 맴돌며

살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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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덕님이 보내주신 수정본을 천천히 확인하던 나는 첨부된 시 이후에도 한 페이지가 더 있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스크롤을 내렸다. 그리고 거기엔 놀랍게도 하나의 글이 더 있었다. 평범한 글이 아니라 받는 이가 명확한 편지 하나가.

 

 

To. 인터뷰어 KJH에게

 

인터뷰를 마친지 어언 1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나는 이 글 안을 헤매고 있네요. 여기엔 나의 파편과 곡해가 뒤섞여있음을 느낍니다. 물론, 그 곡해는 재훈씨가 지은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지어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덧대어도 완전할 수 없음을 미리 알아서, 그래서 망설이는 것이겠습니다.

 

인터뷰해주어 고맙습니다.

 

중간에 잠깐 언급되었지만, 글 받은 한 주는 내내 뒤숭숭했습니다. 어린아이의 마음 위로 떠안겨진 선물은 마냥 즐거움만은 아님을 알겠으나, 그것이 결코 슬픔이나 부정 따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잘 알겠습니다. 가난한 옛날, 어머니가 억지 마련한 크리스마스 저녁이 기억 속을 부활합니다. 그 때, 기쁨과 망설임이 혼재되는 순간엔, 개중 더욱 치명적인 것에 왈칵 덮인 채로 내면이 혼탁해진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 밤이 어린 내게 얼마나 큰 선물이었겠습니까. 기쁨도 완전히 아니, 슬픔은 결코 아니, 그러나 이 혼란함이란 무엇으로 선물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지금 내가 해보이듯, 영원히 부활하는 추억이 되어 내면의 풍성함을 돕는 것에 있었노라 말해보아도 크게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지금을 선물이라 칭해보는 것도 다 자연스러운 일일 텝니다.

 

어쩌면 나는, 나를 궁금해하는 이의 눈빛을 찾아 요즈음을 떠돌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은 새로 났습니다. 편견 없이 나를 궁금해하고, 채 다듬어지지 못한 나의 왕성함은 너젓이 비껴내버릴 수 있는 사람. 고요하거나 거대한 사람을 찾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K씨는 어떤 사람일까, 잠깐 궁금해보다가 이내, 나는 그것에 함부로 언어를 갖다대지 않기로 합니다.

 

다음에 인터뷰 기회가 된다면, 내가 인터뷰어가 되어 K씨를 찾아가야지. 그럼 K씨의 입을 통해서 그 힌트가 드러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제서야 한 사람은 파편과 곡해로나마 보다 온전히, 전해질 수 있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독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는 것이었다지만, 다만 잠깐 잊혀지고 미뤄지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지만, 그것은 이 마음의 내재되어 있는 하나의 본질이었기에, 그러메 고독함을 마치 숙명인양 받아들이고 그 행위함에 친숙해지거나 혹 길들여져가는 것도 다 자연스러운 일이었겠습니다만, 최근 글짓는 나의 마음이 멈추어 고독 속을 온유히 방황했더랬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글짓는 행위는 고독을 달래거나 그 독에 항거하는 나의 방식이었기에. 그런 중에 종이와 펜을 들고 날 찾아, 온 시간을 비우고서 온전히 들어주심에 감사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독은 흩어집니다.

 

다음에 찾아 뵐게요.

 

그때 K씨가 어느 색깔의 시간 속을 지내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쪼록 그 순간이 환희였으면 좋겠습니다.

 

 

아, 이런 환희의 순간이 있을 줄이야..!

지금 이 느낌이 상덕님이 얘기하신 존재가 뒤흔들리는 느낌이려나?

죽어있지 않고 살아있다는 느낌이 이런 것 아닐까?

 

시를 직접 써주신 것도 감사한데, 상덕님은 인터뷰어인 나에게 편지까지 하나 남겨주셨다. 감격스런 마음을 오래 유지하고 싶어, 편지를 바로 읽지 않고 모든 작업이 다 끝난 후에 읽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난 이 글을 쓰면서 상덕님이 남겨주신 편지를 비로소 다 읽었다. 

 

선물... 이토록 감사한 단어가 있을까? 그저 내 존재가 어딘가에 쓸모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는 것이 이토록 가슴 뛰는 일일 줄이야. 내가 무언가를 채우는 존재가 될 수 있다니. 내가 무언가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니!

 

텅 빈 심연 속을 오래도록 살아왔다. 그 시간동안 내가 지우고자 한 것은 오직 내 육체였고, 내 정체성이었으며, 나에 관한 모든 것이었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은, 이런 나라도 어딘가에는 쓸모있겠지, 나 같은 인간도 무언가에 도움이 될 수 있겠지, 와 같은 개별적 존재의 타당성이었다. 난 오랜 시간동안 나의 쓸모를 찾아 헤매어왔고, 날 반드시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한 줄기 희망을 끈질기게 부여잡고 있었다.

 

지금의 내가 생각하기로 그것은 예술, 그 중에서도 한 사람의 인생을 담는 인터뷰라는 예술이다. 인터뷰를 함으로써 나는 심장의 요동침을 느낀다. 한 사람의 세계가 얼마나 큰지 드러내는 일이 어찌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난 그 과정 속에서 최대한 나를 숨기려 했다. 나로 인해 인터뷰이의 세계가 변화하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면 했다. 나란 존재가 누군가의 인생에 오점으로 남지 않았으면 해서.

 

그런데 상덕님은 그런 나와 함께 한 순간을 선물이라 칭해주셨다. 고맙다고, 자신의 세계에 패러다임 시프트를 일으켜줘서 고맙다고 얘기해주셨다. 말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데, 편지까지 직접 써주시며 감사를 표하셨다. 내가 상덕님의 세계에 큰 지각변동을 일으켰다면, 상덕님의 그 말과 표현은 내 세계에 큰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내가 누군가의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정말 큰 일이다. 그것을 자각한 것 자체만으로 나에겐 큰 힘이 된다.

 

나 그래도 잘못 살아온 건 아니구나.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잘못된 길은 아니었나보다. 오래도록 나를 찾고 싶어서 방황했는데 그래도 잘 찾아왔나보다. 나에게 감사하다 이야기 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정말.

 

아무래도 지금의 이 감각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이 순간은 나에게 정말 큰 환희기 때문에.

 

제 인터뷰이가 되어주어 고맙습니다. 저와 함께 할 시간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상덕님이 표현해주신 것처럼 저에게도 지금 이 순간은 정말 큰 선물입니다.

 

어쩌면 저도 저만의 붉은 장미를 찾아낸 것 같습니다. 생명을 바칠만한, 그런 붉은 장미 말입니다. 이번 글에 넣지는 않았지만, 저희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요. 10년 뒤에 다시 인터뷰를 하게 될 때, 그때는 서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태였으면 좋겠다고. 상덕님은 대가의 자리에, 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인터뷰어의 자리에. 그렇게 만나는 순간을 머리 한 켠에 그려봅니다.

 

오지 않을 미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비현실적 이상의 세계인 유토피아의 세계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가진 붉은 장미는 저희를 그곳으로 이끌어 줄 테니까요. 그때가 되면 허심탄회하게 웃으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좋겠습니다.

 

그때가 정말로 선물이었지, 그때의 선물이 지금의 자리를 만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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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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