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슬람 사원 앞에서

이슬람교에 대하여
글 입력 2022.05.03 14:2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이건 그러니까 어제 있었던 일이다. 월요일 출근길 버스에 앉아 밀린 에세이를 쓰고자 생각의 호흡을 고르고 있자 하니, 어제 하루가 너무 많은 사건으로 가득 차 있었음이 상기된다. 시간에 밀리어 가듯, 달이 서편으로 흘러 잠들어 있는 태양을 다시 지상으로 밀어 올리듯, 일상의 탁류에 휩쓸려 살아내는 평범한 직딩의 하루는 생각보다 많은 걸 지워버리곤 한다. 바로 어제, 하루 반나절이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그것이 벌써 월요일의 피로함에 치여 기억 구석탱이로 밀려난 것을 자각하는 일은 고로 퍽 유익하다.


주일에 쉬어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노는 것과 쉬는 것은 결코 같은 결의 행위일 수 없다. 한 주의 피로를 다음 주로 이월하는 작용이, 노는 일 안에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달아나려는 봄의 꼬리를 잡고자 모든 비어버린 시간을 좇기었다. 서재에서 짧은 오침을 하고 홍대에 갈 채비를 했다. 5월의 첫날, 어제는 바람이 무진장 불어주어 어디로든 높은 곳에 가닿고 싶었으나, 홍대에서 날 기다리는 어느 측은한 미술관과 그 외 에세이로 태어나고자 하는 몇 가지 이야기들이 발목을 잡는 통에 순순히 집 밖으로 나가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려던 참이었다.


마침 한강 변 조깅을 마치고 온 여동생이 외출 채비를 마친 나의 행색에 의문을 표한다. "미술관. (니도) 갈래?" 수상스키를 타기엔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이젠 다른 무얼 해볼거나 고민하던 동생이 곧잘 달라붙는다. 그리고 그녀의 채비를 기다리는 만큼 내 하루의 계획은 조금씩 비틀리기 시작했다. 아마 여기서부터 기연은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크기변환]KakaoTalk_20220501_173036516_14.jpg



날이 너무 적당하다는 까닭으로,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머리칼을 완전히 망가트려 놓았다는 이유로, 마침 내 마음도 어느 정도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날씨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는 집 뒤편 높은 곳에 있는 카페를 들리잔다. 집에서 오르막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나오는 우사단길에는 건물이 가로막지 않는 한에서 이 일대를 가장 훤칠히 보여준다. 전시회와 에세이 2개를 쓰기에도 하루는 빠듯했지만, 앞서 덧붙인 그런 핑계들로, 그러니까 머리칼이 마구 헝클어졌다는 따위의 이유로 내 하루의 계획은 비틀리기 시작했다.


사진틀 속에서도 바래지 않는 푸르름이다. 우사단길, 내 사는 동네는 이렇게 허름하고 덥수룩하고 웅크린 채 있다. 가장 평범한 동네 같았으나, 한편 이 안에는 누군가의 꿈들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테이블이 단 두 개밖에 없는 카페에서 도넛과 커피를 시키고, 고양이를 지켜보았다. 도넛이 세계와 사람과 고양이까지 구해내리라는, 이 작은 카페의 신념에 대해 생각해보며 방명록을 적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연작 에세이인 가제, '오늘의 커피'에서 계속해야지.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에세이 허락을 받아내 두었다. 쓰다가 막히면 가서 인터뷰를 진행할 계획이다.


생각지 못한 에세이 거리를 구하곤 다시 길을 나섰다. 여기서 이태원이 나오는 방향으로 쭈욱 걷다가 보면, 이슬람 사원이 하나 나온다. 동네의 가장 높은 곳, 이 일대 전체를 밝히는 등대 같은 이곳은 이따금 앞을 지나가게 되면 대단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내 안에 자아내곤 한다. 입구의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대단히 이국적인 정취와 함께 멋모를 배타적 향기를 풍기어 좀체 접근이 어려운 곳이다. 동생은 그 앞을 몇 번이나 기웃거리던 나를 잘 알아, 손을 잡곤 뚜벅뚜벅 그곳을 향한다. 마음의 준비가 다 되지 않은 나를 대신해 경비실 유리에 대고 바디랭귀지를 해 보이더니, 꽤나 쿨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다.



[크기변환]KakaoTalk_20220501_173135669.jpg



이슬람 사원의 정경이다. 사원의 바로 앞을 이루는 광장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크지 않았다. 적당한 크기의 광장 가장자리로 벤치 몇 개와 나무들이 흔들리고 있을 따름이었고, 역시 내려다보는 경치는 장관이었다. 언제나 지나치는 귀로의 마지막 구간, 한남대교를 건너고 있으면, 우측으로는 한강과 멀리 롯데타워, 정면에는 남산타워, 그리고 좌측에는 반포대교와 나의 동네와 환히 빛나는 이슬람 사원이 보인다. 아름다운 구도, 전반적으로 오래된 건물들이 주를 이루는 나의 동네는 주황색 가로등으로 군데군데 장식된 채 어둠에 안겨 있었고, 그 머리 위를 홀로 빛나는 이슬람 사원이 굽어보고 있다. 지도가 없어도 저 등대만 따라 걷다 보면 우리 집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이국인들의 낯선 언어가 바람을 타고 일대를 휘휘 감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으니, 즐거운 이질감이 피부에 돋아난다. 우리는 쭈뼛대며, 괜히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을 하고서 주변을 둘러보다간 계단 앞에 섰다.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예배당 출입문의 위에는 '신자 외에는 출입을 삼가달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역시 저기까지 가는 건 무리겠지, 하며 우리끼리 조심거리고 있던 참에, 흰색 예복에 골무같이 착 달라붙는 모자를 쓴 남성이 기척 없이 곁에 와 있었다. 우리 얘기를 다 들었나 싶어서 흠칫한다. 남성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대단히 차분한 음색과 템포의 어조로 이슬람교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인사를 건넨다.


그 차분함에는 신앙인의 경건함이 새어나오는 듯했다. 독실한 신앙심이라기보다는, 차분하고도 꾸준한 신앙심의 기척이다. 그 아우라에 홀린 탓인지, 그 사람의 하는 말에 어느샌가 경청하게 된다. 산만한 내 동생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 생각엔 더욱 확신이 실린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편안함을 자아냈지만, 뱉은 첫마디는 어딘가 씁쓸하다. 이슬람교에 대한 각자 마음속의 선입견을 잠시 내려놓으시고, 오늘은 같이 이야기를 나누어 보십시다, 한다. 가진 바 시간이 촉박했지만, 이런 기연을 뿌리치고 에세이를 쓰러 갈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에 시계를 소매로 덮었다.


이렇게 바람이 수상한 날, 떠밀려오듯 인도된 곳에서 낯선 양식의 건물과 그보다 낯선 언어와 분위기 속에 자리해, 경건한 신앙심을 풍기는 어느 사내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이야기해 보일 수 있겠지만, 이슬람교에 대해 교인에게 직접 문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좀체 찾지 않을 굉장한 기연이다. 아직 아무런 질문이 공략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에는 끊임이 없다. 그만큼 신앙과 사상은 유연한 이음새로 짜여있다.



[크기변환]KakaoTalk_20220501_173040968_05.jpg



오늘은 각자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십시다. 그를 30분 남짓 들어본 것만으로도 나의 이슬람교에 대한 생각은 단단한 착각으로 이루어진 선입견의 결정이었다는 것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굉장히 독자적이고, 배타적이며, 유일신에 대한 맹목적 신앙심으로 이루어진 종교일 줄 알았던 기존의 생각은 그의 말에 따르면 아주 틀린 생각이다.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신을 모태로 하고 있고, 다만 그 하나님의 말씀을 하사받은 전도자, 사도의 다름만이 거기에 있었다.


종교에는 신앙의 대상인 신과 대리자인 사도, 그리고 말씀이 있다. 여기까지는 어느 종교건 꼭 같을 것이다. 이에 나는 질문했다. 이슬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그는 '라 일라하 일랄라', 하나님 외에는 경배받을 존재가 없는 것이라는 믿음이라 답했다. 아직 이해가 부족하여 다시 물었다. 기독교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서로 사랑함'이었다면, 이슬람의 말씀이 신앙인들에게 권하는 바는 무엇이냐고. 그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며, 이 모든 지상의 것들을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라 하였다.


두 종교는 생각 이상으로 닮아 있구나. 그래서 한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두 종교가 같은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꼭 같고, 다만 말씀을 전달한 사도와 배경역사와 환경만이 다른 것이었다면, 이슬람의 종교적 세계관에도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냐고. 그는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듯, 우리 또한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였다. 하나님 말씀은 어느 사도에게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차이는 종교적 근원이 아닌, 그를 믿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만들어낸 역사에 있을 따름이었다.

 

또 하나 커다란 다름이 있다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가 전파하사 다시 예수의 12 사도들이 뭇사람들에게 널리 포교하는 방식을 따랐다면, 이슬람은 최후의 사도인 무하마드가 무아에 빠져 신의 말씀을 세상에 그대로 전달하였고, 이를 필사한 것인 쿠란에 어떠한 이해와 해석도 가미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도 유일한 경전으로 삼아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앎이 짧은 나로서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대승은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식을 동원했다고 한다. 불교의 핵심은 최초의 깨달은 자인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뭇 인간들에게 알리어, 고통인 사바세계로부터 열반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해볼 수 있을까.


소승이 진정한 깨달음을 위해 각자 가르침과 수행을 좇았다면, 대승은 널리 이로움을 위해 사람들에게로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대승은 더욱 많은 중생들을 가르침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여러가지 흥미로운 이야기와 설화들을 다른 종교에서 차용했다고 배운 기억이 있다. 잘은 모르지만, 이슬람과 기독교에 대해 여기까지 들은 것만으로 나는 둘의 다름이 앞서 언급한 바로 그 차이와 유사하지는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슬람은 신 아래 모든 인간들 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고로 성직자가 없고, 교황이 없으며, 그들의 해석만이 더욱 올바른 것이라는 식의 이해도 없다고 한다. 누구나 단체 예배를 집도할 수 있고, 보통의 예배는 엎드린 채 쿠란을 암송하는, 지극히 개인의 예배라고 한다. 나는 물었다. 그렇다면 예배는 정확히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그는 쿠란을 암송하는 것이고, 신에게 감사하는 것이 전부이다고 답했다.



[크기변환]KakaoTalk_20220501_173040968_03.jpg



이슬람은 모든 우상과 상징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연스레 예배당 안으로 초대된 우리는, 그 안에 마련된 예상외의 황량함에 놀란다.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어떤 건축물이나 상징물도 없이, 공간과 매트와 쿠란만이 있었다. 때 탄 에메랄드 빛의 공간에는 나지막이 쿠란을 읊는 교인들만이 돋보인다. 신의 형상을 띈 아무런 장식품도 없다는 것은, 그들의 예배가 얼마나 개인적인가를 보여준다. 교회의 구성, 예배를 집도하는 이의 교단과 그를 바라보도록 고정된 의자의 형태가 아니다. 신을 생각하게 하는 우상도 없다. 신은 이미 여기 존재하고, 그것을 알고 받아들이고 믿는가의 차이만이 사람들 사이에는 있다고 하였다. 어쩌면 참으로 원리주의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신앙이 아닌가.


그의 말은 나지막한 울림을 줬다. 성물도, 성소도 없다. 신의 말이 구전되는 동안, 그 말은 더 이상 신의 것이 아니게 되듯이, 성소도, 성물도, 우상도 마찬가지이다. 성스러운 것은 하나님 자체일 뿐, 그를 본떠 만든 인간의 것들에 성스러움이 깃들 수는 없다는 논리이다. 상징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예배당에 나름의 양식이 있다고들 생각하지만, 이것은 어느 터키인이 가져다 붙여준 타일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에게 초승달의 상징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신을 나타내는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냐고 그는 되물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것이고, 가변하는 것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것, 개인의 취향일 수밖에 없다는 말에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이슬람 교인에게 천국은 어떤 곳이냐고 물었다. 천국은 평생 수행하고, 숭배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순간들이 모여서 갈 수 있는 곳이라고 답했다. 단순 신을 믿는다는 것만으로 천국행 티켓을 가진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예배당에 오기 위해서는 몸의 구석구석을 닦아야 하지만, 그것이 예배당에 올 때만 깨끗이 단장하고, 집에 있을 때는 그러지 않아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신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바로 그런 마음가짐으로 몸을 청결히 하고, 신을 경배하고, 가르침을 따르는 삶, 신앙과 삶이 합치되는 모습이 우리가 따르고자 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크기변환]KakaoTalk_20220501_173135669_01.jpg

 


일전 이슬람교에 대해 가졌던 많은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아직 그를 알겠노라 말할 수 없지만, 인터넷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슬람교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여기까지는 24년간 이슬람교를 믿으며 살아온, 어느 오래된 교인의 말이다. 그에게는 그가 하는 말을 뒷받침해주는 듯한 우직한 아우라가 있다. 그 교인이 말하였듯, 신앙의 본질은 서로 간 크게 다르지 않되, 그를 믿는 사람들 탓에 인식되는 모습이 달라진다 하였다. 이슬람교의 본질과 이슬람 교인들이 믿음과 신앙을 행하고 그를 통해 영위하는 삶의 모습은 또한 다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일전 선입견을 품고 있을 때와 지금의 바라보는 방식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만이 분명하다.


여러 기연을 통해, 바람이 떠밀어 올라온 이 동네의 꼭대기에는 언제나 동경하던 멋진 이슬람 사원이 하나 있다. 이제는 시간이 촉박해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온다. 홍대의 미술관에 들렀다가 저녁 약속이 있는 종로4가 세운상가까지 오기에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해 마지못하면서도 즐거운 발걸음을 놀린다. 이슬람 사원 앞에서, 나는 무언가 많은 것들을 들었고 많은 것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 아무것에도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인간의 것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그것이 다시 섣부르게, 나는 이슬람교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고, 이렇게 이해했고, 고로 이렇게 주장한다는 일련을 일으킬 것 같아서 말이다.


내일, 이제 에세이 취합 마감날 퇴근하고 돌아온 밤, 찬찬히 동네 마실 삼아 이슬람 사원의 광장을 찾아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오늘 내게 건네준 말을 떠올리며, 그래 그들이 예배실에서 신을 떠올리듯, 아직 신을 가져보지 못한 나는 그를 대신해, 어느 우아한 교인이 건내준 말들을 떠올리며 생각에 빠져들어도 좋겠다. 그러는 동안 여름이 익어갈 것이고, 나는 그 어떠한 의미와 상징도 사실 갖고 있지 않았던 이 사원 앞에서, 긴 사색에 빠져들고 싶다.



다음 이야기 - 종로 스케치 1


 

[크기변환]KakaoTalk_20220501_173040968_09.jpg

 

 

[서상덕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