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돌이킬 수 있는 [도서/문학]

도전도, 실패도, 좌절도, 희망도 모두 온전히 나의 몫
글 입력 2022.06.16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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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작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챕터 1. 당신이 시작한 이야기


소설의 시작은 한 남자와 여자의 격한 싸움으로 시작된다. 첫 줄만 읽어도 이 싸움이 특이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초능력이 동반된 듯 칼이 앞으로 더 나아가지 않으며 돌가루가 공중에 멈추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격한 싸움 속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도망가 줘.”라고, 여자는 남자에게 “도망쳐.”라고 한다. 처음 보는 사람이 서로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챕터 2. 당신이 마주한 이야기


정체모를 운석에 의해 갑작스레 땅이 꺼지고 싱크홀에 갇힌 사람들은 최주상과 이경선의 활약으로 나선 계단을 만들어 수많은 시체를 밟고 올라온다. 사람들은 운석의 영향으로 파괴, 정지, 복원이라는 초능력을 가지게 되고, 이들을 죽이려는 세력 때문에 ‘비원’과 ‘경선산성’으로 나누어진다.


이 책의 주인공 ‘윤서리’는 경찰청에 입사하면서 비원을 도와주는 동시에 몰살시키려고 하는 ‘서형우’의 밑으로 들어간다. 현재 경선산성의 우두머리 ‘정여준’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고 싱크홀이 존재하는 구역으로 들어가면서 챕터 1의 장면이 완성되는 것이다. 윤서리는 잠입자라는 걸 들키지 않고 경선산성에 머무르게 된다. 여기까지의 윤서리는 그냥 평범하게 잠입한 킬러처럼 보인다.


그런데, 만약 윤서리가 싱크홀의 생존자였다면?


챕터 5. 경선산성


이야기의 전말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현재 비원의 우두머리인 최주상에게 싱크홀에서 잃어버린 딸을 대신하는, 딸처럼 여기는 아이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최주상은 비원에 숨어들어온 첩자를 찾고 싶었고, 소속이 불분명한 ‘신가영’을 윤서리라는 이름으로 경찰청에 들여보낸다.


챕터 6. 당신이 감내한 이야기


윤서리는 단순히 그냥 복원자가 아니라 시간을 돌릴 수 있는 시간 복원자이다. 윤서리, 그러니까 윤서리가 신가영일 때 처음 싱크홀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100명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을 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또 돌려서 600명이라는 생존자를 이끌어낸다. 똑같은 죽음을 또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며 얻어낸 최대의 숫자가 600이었던 거다. 수없이 반복되는 죽음을 무마하기 위해 그 캄캄하고 절규로 가득찬 싱크홀에 몇 번이고 다시 들어간 윤서리의 마음을 감히 이해해보기는 힘들었다.


 

왜 포기하지 않을까. 왜 언젠간 성공할 거라고 착각하는 거지?  어째서 착각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걸까. 계속 실패만 하면 깨끗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중략) 

어디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이제 어느 때로 돌아가면 될까. 난 내가 기억하는 모든 과거의 순간으로 돌아가 모든 가능성을 다 시도해본 것 같아. 내가 아직 되돌리지 않은 시간대가 어디쯤인지도 모르겠어. 남아있기는 한 걸까.

 


500여 명의 생명을 살린 윤서리도 못 돌리는 것이 있었다. 정여준의 죽음. 어떤 방식으로 경찰청에 들어가든, 서형우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든, 아예 경선산성에 들어가지 않든, 정여준의 죽음은 예견된 일이었고 그 때마다 윤서리는 시간을 돌린다.


챕터 7. 여기


그리고 여기 시간 정지자 정여준이 있다. 정여준의 죽음을 막기 위해 매번 시간을 돌린 윤서리가 있다면 정여준의 생이 끝나기 직전에 시간을 유예하는 정여준 자신이 있었다. 시간을 돌리는 동시에 시공간을 고정시켰기에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졌다. 수백, 수천의 윤서리와 정여준이 공간에 멈춘 채로 갇혀버린 것이다.


정여준은 멈춘 시간 속에 스스로만 멈추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것이 멈춘 수백, 수천 개의 세상에서도 수백, 수천 명의 정여준은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왜일까.


챕터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그리고 가시기 전에 이건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정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중략)

“자꾸 이 생각이 들어서 그러는데… 왜 이렇게 당신이, 익숙하고 그리운 거죠?”

 


새로운 시간선의 정여준은 윤서리를 모른다. 지금까지의 모든 시간을 기억하는 윤서리만이 정여준을 알고 있다. 그러나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윤서리가 시간을 돌린 만큼 정여준의 마음은 지름길을 달린다.


윤서리는 결국 정여준을 살릴 방법을 찾는다. 경찰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 경선산성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 비원의 우두머리가 되기를 선택한다. 비원이 습격을 멈추자 경선산성도 공격을 멈추고, 결국 일정하게 죽던 시간을 넘기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정여준을 보게 된다.


챕터 10.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챕터 7의 물음에 대한 답이 이야기의 끝에 나온다. 왜 수백, 수천명의 정여준은 공간에 홀로 갇힌 채로 다른 시간선의 윤서리와 정여준이 죽기만을 기다릴까.


 

“왜겠어요?”

정여준은 미소 지었다.

최주상이 그를 완전히 처음 보는 낯선 이로 느낄 만큼 찬란한 미소였다.

“왜겠어요.”

 

 

문목하의 ‘돌이킬 수 있는’은 SF를 그리 선호하지 않는 내가 손에 꼽게 재밌게 본 소설이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이야기가 좋고 그 희망은 완전히 딱 닫힌 결말일 필요도 없다. 실낱같더라도 되돌릴 수 있다, 죽지 않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은 사람을 몇 번이고 다시 도전하게 만든다. 정여준은 그런 ‘사람’의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최소한 윤서리가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윤서리와 정여준에게는 초능력이 있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초능력이 없다. 도전도, 실패도, 좌절도, 희망도 모두 온전히 나의 몫인 삶을 잘 누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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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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