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작은 세모의 흔적] 3편 –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가 되겠지 [도서/문학]

대답이 돌아오는 세계
글 입력 2022.05.31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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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독립서점에서 구입한 책이다. 읽고 싶은 책이 있어 사러간 것은 아니었고, 서울에서 구경한 전시회 위층에서 독립출판물을 모아 팔고 있어 하나 고르게 되었다.

 

그날따라 오랜만에 ‘책 구매에 돈을 소비하는 행위’가 하고 싶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읽을거리가 필요하기도 했다. 평소라면 잘 고르지 않을 것 같은 감성의 제목이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필명이 몇 개가 첫 페이지에 적혀있어 속는 셈 치고 집어들었다.


여행지에서 만원짜리 랜덤박스가 주는 설렘과 작은 재미에 흔쾌히 돈을 지불하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골라 읽게 된 책이지만 결국 이곳에 소개하고 싶을 만큼 나에게는 꽤 괜찮은 책이 되었다.


책은 5명의 작가가 써낸 글 묶음, 홍승은 작가의 <우리 사라지지 말자>, 이 내 작가의 <대답이 돌아오는 세계>, 하 현 작가의 <불안을 쓰는 마음>, 구 달 작가의 <취향의 여행>, 황유미 작가의 <쓰면서 알게 된 나>로 이루어져있다.

 

책의 목차와 (소)제목은 내가 책을 고르는데 있어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여기는 요소인데, 이 제목들을 보고 흔쾌히 이 책에 가격을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특별할 것 없는 문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왠지 언젠가 내 마음이 소리내 발음하고 싶었던 문장인 것만 같았다.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가 되겠지.jpg

 

 

이미 읽은 책에서 발견한 세모의 흔적에서는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같은 느낌이 든다. 그때의 나는 오늘에게 어떤 문장을 건네었을까. 몇가지만 함께 나눠보려한다.

 

 

 [홍승은, 우리 사라지지 말자] 중에서



‘어떤 글이 나쁜 글일까?’ 생각하는 시간은 윤리적 글쓰기를 고민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앞으로 쓸 글이 무해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도록 읽을 때 불편한 글의 특징, 위험하다고 느끼는 표현과 관점, 태도를 꼼꼼하게 떠올린다. 어느 정도 내용이 정리되면 글을 쓸 때 수시로 찾아 읽는다. 가끔 이 기준은 자신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내가 쓰는 글에 자신감이 떨어질 때 ‘적어도 이런 글만 아니면 돼’라는 안심이 되어주니까.

 

글쓰기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는 말을 곱씹는다. 내가 대화하기 꺼려지는 상대의 행동을 떠올리면 어떤 글을 조심해야 할지 기준이 생긴다.

 

- 이런 글은 위험한 것 같아, 홍승은 p.14


 

누구에게도 불편하지 않은 글을 쓰기는 불가능하다. 대학 때 수업에서 들었던 내용이 기억난다. 예를 들어 어떤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공개된 곳에 입장을 드러내는 글은(방식은) 필연적으로 특정 관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무것도 드러내는 않는 것 또한 마이너스의 정치성을 띄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했다. 요컨대 ‘나는 정치적으로 엮이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거나 관련된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행위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입장을 말하고 있다는 당연한 이야기이다.


사설이 길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윤리적이고 더 나은 글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행위는 글쓰기의 본질이 생각하고 그것을 정제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기대가 되지 않을 리가 없다.

 

 

 [이 내, 대답이 돌아오는 세계] 중에서



어느 날 무심코 창문을 열고 몸을 조금 구부려 위쪽을 보았는데, 집들 사이로 손바닥만 한 하늘이 모자이크처럼 보였다. 창문을 열고 보니 빛도, 바람도, 온도도, 습도도 매일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내 상태만 매일 들쑥날쑥한 줄 알았는데 큰 오해였다. 창문을 열고, 마음을 열고, 변하는 것들을 가만히, 가만히 바라본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하루를 시작해야지

 

- 변하는 것들 사이로, 이 내



자연이 변화하고 오늘이 어제와 다르다는 것을 감각하는 일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정신없는 출근길, 피곤했던 걸음에도 잠이 깨고 새소리가 들려오는 순간과 퇴근하기 10분 전의 기분같은 사소한 순간들이 그리고 오늘 나의 몸이 말하는 소리에 귀기울이는 것들이 나의 삶을 지탱한다.

 

 

 [하 현, 불안을 쓰는 마음] 중에서

 


에세이를 쓰는 일이 문득 무용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세계는 너무 크고 나는 너무 작다는 걸 실감할 때, 세상을 흔들어 놓은 위대한 이야기에 기가 죽어 내가 가진 이야기의 가치를 의심하게 될 때, 그럴 때면 영화<벌새>를 다시 본다.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가 가장 보편적인 기억을 건드리는 마법, 주인공 은희는 내게 아주 작은 이야기의 확장 가능성을 약속해준다. 세계는 너무 크고 나는 너무 작지만, 그래서 세계는 할 수 없고 나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믿음을 준다. 이미 은희의 시절도, 영지 선생님의 시절도 자 지나버린 내가 <벌새>를 볼 때면 다시 열다섯 중학생이 된다.

 

- 구체적인 사랑의 말, 하 현



내가 에세이를 소개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데에는 이 책이 역할을 했다. 단순히 괜찮아 괜찮아 만을 반복하는 일회성의 위로만 담긴 글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가 담긴 글을 발견할 수 있는 장르가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만들어주는 글들이 이 책에는 꽤 있다. 대단한걸 배웠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사람과 내가 만났다는 기분이 든달까.

 

 

[구 달, 취향의 여행] 중에서

 


워낙 부끄러움을 타는 성격이라 모임에서 자기소개를 시키면 이름을 대충 웅얼거리고 앉아 버리곤 한다. 서너 마디 말로 나를 타인에게 소개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서너 개의 정보로 나를 설명하려다 보면 왠지 내가 납작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글쓰기에서는 조금 다르다. 더 입체적인 방법을 택할 수 있다. 내 일상에서 한 장면을 떼어내어 글로 옮기는 것이다. 그 장면을 공유한 이들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상상할 수 있도록.

 

- 구달식 점심, 구 달


 

이전에 어느 글에서 ‘별거 아닌 취향의 순간들이 나를 설명하게 두고싶다’는 문장을 쓴 기억이 있다. 내 직업이나 학력이 아니라, 나를 포장하는 갖가지 말이 아니라 내 삶의 단면을 통해 나를 소개할 수 있다니 꽤 탐이 나는 방식이다. 내 삶의 어떤 순간이 가장 나다울까.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일상의 순간들을 조금 더 고민해야겠다. 언젠가 준비가 되면 그런 방식으로 나를 소개해봐야지.

 

 

[황유미, 쓰면서 알게 된 나] 중에서

 


가끔 스콘이 먹고 싶어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다. 사람 많은 시간대를 피해 서촌에 있는 ‘스코프’까지 가려면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집밥을 연달아 먹다 보면 빵이 꼭 먹고 싶어지는데, 그럴 때 가장 먼저 스콘이 생각난다.

 

스코프의 스콘은 크기가 커서 한 개만 먹어도 든든하다. 부드러운 버터 향을 맡으면 온탕에 몸을 담근 것처럼 나른해져 누군가 말을 걸면 말꼬리까지 길게 늘어뜨릴 것 같다.

 

스콘을 먹을 때 속도 조절이 관건이라 행동이 느려진다. 흥분해서 너무 빠른 속도로 먹으면 스콘 하나를 다 먹어 치우기도 전에 목구멍이 막혀 포크를 내려놓을 수도 있다. 입안에서 천천히, 충분히 녹인 뒤에 목구멍으로 넘겨야 스콘 두어 개를 질리지 않고 충분히 맛볼 수 있다. 버터의 풍미가 입안 가득 채워지면 몸의 모든 모서리가 둥그렇게 변하는 느낌이다. 이때만큼은 잠시 결정을 미뤄둔다. 조급했던 마음의 템포도 느려진다.

 

- 마음이 스콘해지고, 황유미



마음이 스콘해진다니. 이렇게 말랑따듯한 말이 있을까. 따뜻한 스콘 위에 올려놓은 버터 조각이 녹아리내는 상상을 하게 된다. 황유미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이 분의 글에 대해서도 실은 잘 모르지만 이 글 한편으로 친밀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왠지 황유미 작가의 글이 좋아졌다. 더 많은 글을 찾아 읽으면 혹시 실망하게 될수도 있을까? 내 취향이나 의견과는 맞지 않다는 이유로. 하지만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도 지금은 마음이 스콘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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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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