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제각기 다른 초록에 파묻혀 나를 들여다본 시간 [여행]

오대산 자연 명상 마을에 다녀오다.
글 입력 2022.05.2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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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하러 갈래?’

 

나는 망설임 없이 그러겠다고 답했다. 여러모로 지쳐있던 차에 쉬러 가자는 친구의 말은 무척 반가웠다. 2022년 새해를 시끌벅적 맞이했던 게 전생처럼 느껴질 만큼, 어느덧 한 해의 절반이 흘렀다. 미래에 대한 고민과 나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 시시각각 널뛰는 감정들에 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해야 할 것도 하지 말아야 할 것도 많은 모순된 곳(한마디로 ‘속세’)에서 벗어나 유리된 공간에서의 휴식이 간절했다.


친구가 예약해둔 ‘오대산 자연 명상 마을’에 가기 위해 기차에 올라탔다.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다니. 코레일이 기막힌 노선을 짰다며 ktx 칭찬을 버무리고, 서로의 트집을 잡으며 시답잖은 농담을 킬킬거릴 때쯤 창문 밖 풍경이 변해있었다. 높게 쌓아 올린 건물에서 낮아진 층계, 그리고 마침내 초록이 가득한 풍경이 되었을 때 우린 기차에서 내렸다.


잠옷만 덜렁 들어있는 백팩을 숙소에 내려놓고 (이렇게 간편하게 짐을 싼 것도 오랜만이었다) 숙소 체크인 시 건네받은 지도를 참고해 ‘붓다의 정원’으로 향했다. 산스크리트어 붓다는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를 깨달은 성인을 일컫는다. 난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원체 종교 자체에 흥미가 있는 인간이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더욱이 이곳은 불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나 종교나 사상의 강요가 전혀 없기 때문에 더욱 부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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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정원은 불교의 우주관을 시대정신으로 디자인한 이곳의 랜드마크로, 길이 꽃잎 모양으로 나 있는 작은 정원이었다. 낮게 깔린 꽃밭과 잡초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커다란 한 그루의 나무는 잘못 배송돼 억지로 심어둔 묘목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난 이 나무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참 뜬금없는 나무라고 생각했지만, 이 나무가 지금까지도 기억난다는 점에서 의미를 다 했다고 볼 수 있겠다.


붓다의 정원 옆에는 '깨달음의 정원'이 있다. 주목나무로 길을 이어 만든 미로 정원을 걸으며 신기한 경험을 했다. 분명 길을 따라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처음 출발지에 있었다. 안으로 가려고 해도 어느새 바깥으로 밀려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똑같은 곳을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깨달음의 정원은 인생을 액기스로 농축해 한 줄 요약한 장소 같았다.

 

#사물이_보이는것보다_만만하지 않음 #링반데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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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정원에서 다리를 건너 동림선원으로 향했다. 동림선원에선 아침과 저녁에 명상 및 요가 수업이 이루어진다. 한옥으로 지어진 이곳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숲과 나무, 하늘에 둘러싸인 동림선원은 고고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우린 수업 시간을 비껴간 덕에 텅 빈 동림선원에 들어가 명상 방석을 끌어다 앉았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으니, 폐부로 밀어두었던 내면의 것들이 올라와 머리를 잔뜩 어지럽혔다. 명상은 원래 생각을 비우는 것이라고 하던데. 나는 오히려 온갖 생각이 피어올랐다.

 

가만히 앉아있으니 되려 내밀한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됐고, 이는 곧 잡생각으로 번졌다. 올바른 명상을 위해선 의식의 근육을 기르고 생각을 비워내는 꾸준한 훈련이 필요한데, 난 그러한 훈련을 전혀 하지 않은 인간이었기에 당연한 도출 값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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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걷는 것이 생각을 비우는 데에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해 동림선원 옆 ‘번뇌가 사라지는 숲’으로 향했다. 번뇌가 사라지는 숲과 ‘비밀의 정원’은 붙어 있었다. 그 이유는 번뇌의 숲을 걸으면 번뇌가 사라지는 ‘비밀’이 있어 비밀의 정원이다,라고 홈페이지에선 안내하고 있다.

 

이 장소가 애초에 번뇌가 사라지기에 최적화된 장소로 판명났기 때문인지, 우선 이름을 그렇게 붙여놓으면 사람들이 그에 맞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 번뇌를 누르는 것인지 선후관계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거나 난 이곳에서 잡생각을 떨쳐내는 신기함을 맛봤다.


번뇌가 사라지는 숲의 입구는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했다. 크고 작은 나무가 만들어내는 초록 잎, 산란하는 햇빛에 물들여진 잎과 미처 빛이 닿지 못해 광합성 무한 대기 중인 잎까지 저마다의 다른 초록이 날 감쌌다. 번뇌가 사라지는 숲을 걸으며 천천히 비움의 미학을 새겨넣을 때쯤, 물소리가 들렸다.

 

홀리듯 물가로 내려가 커다란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떠내려가는 물을 한참 바라보았다. 시냇물을 경계로 왼편엔 도로가, 오른편엔 걸어온 숲이 있었다. 21세기 지독히 일상적인 세상과 동화 속 세계, 그사이 경계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은 마음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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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지기 전, 숲을 빠져나왔다. 꽤 많은 시간을 걸었기에 배고파졌고, 우린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에선 저녁과 다음 날 아침밥을 모두 제공해준다. 다만 채식 뷔페이기 때문에 고기는 기대할 수 없다. 평소에 샐러드를 즐겨 먹기 때문에 채소 식단에 크게 개의치 않았고,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음식이 맛있었다! 생각보다 다채로운 반찬에 놀라워하며 야무지게 식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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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바깥엔 ‘해탈이’란 이름을 가진 고양이가 그루밍하고 있었다. 사람을 워낙 잘 따르고 애교가 많은 고양이라 해탈이 앞에 다리를 접고 앉아 한참을 예뻐해 주었다. 밥을 먹고 ‘또’ 걷기 위해 아리야 숲으로 향하는 우리의 뒤를 졸졸 쫓아온 해탈이는 내 다리에 꼬리를 치대고 몇 번 볼을 비비다 홀연히 사라졌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난 황홀함을 느끼곤 잔뜩 격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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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야 숲은 일품 송이 솟아있는 숲이다. 높게 솟아오른 소나무와 빼곡히 들어찬 초록의 향연에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번뇌가 사라지는 숲에 비해 훨씬 작은 규모의 숲이기에 우리의 발길은 금세 멎었지만, 꽤 오랜 시간 아리야 숲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깨끗해지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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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야 숲을 지나쳐 숙소로 향할 때쯤, 친구가 동림선원 다리 옆 작은 돌계단을 발견했다. 오솔길로 이어졌는데, 사고처럼 발견한 이 길은 내가 명상마을에서 가장 아끼는 장소가 되었다. 점심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운동장을 회전초밥처럼 돌던 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마냥 우린 이 오솔길을 몇 번이나 걸었다. 철창과 표지판에 가로막힌 막다른 길이 나오면 뒤를 돌아 똑같은 길을 다시금 돌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간 군상에 대한 토론이기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고민과 위로가 뒤섞인 일상이기도 했던 대화는 끝을 모르고 팽창했다. 친구와 나. 둘밖에 없는 완벽히 분리된 공간에서 흙을 밟고 나무를 눈에 담으며 옆에서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걸었던 이 길을 머리와 마음에 새겼다. 난 이 길을 잊을 수가 없다. 후에 집에 와 찾아보니 이 길은 ‘지혜의 정원’이었다. 상상에 상상에 상상을 더해서 마침내 공상으로 치달은 우리의 대화를 떠올려보면, 정원의 이름은 꼭 들어맞았다.

 

핸드폰엔 이만 보를 걸었음을 안내하는 알림이 떴다. 걸음 수에 반비례해 속 시끄럽던 생각은 안으로, 안으로 접혀 들어갔다. 우린 숙소에 들어가 각자 가져온 시집을 읽다가 캄캄해진 하늘을 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도시에선 볼 수 없었던 북두칠성과 환하게 빛나는 별 무리를 목도했다. 고개를 잔뜩 꺾어 먹물을 부은 듯 새카만 하늘과 점 찍은 듯 빛나는 별을 올려다보며 산책했다.

 

아리야 숲 근처에 도착했을 땐 적막하고 어두운 숲이 무서워 쳐다보지도 못한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낮에는 그토록 아름다웠던 공간이 밤엔 공포가 되다니. 그토록 듣기 좋았던 나무 사이에 깃드는 조용한 바람 소리조차 소름 끼쳤으니 말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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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우린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곧장 월정사로 향했다.

 

근처엔 월정사 성보 박물관과 의궤 박물관이 있었으나, 휴관일이라 아쉽게도 내부 관람은 어려웠다. 박물관에서 더 위로 올라가면 월정사 생태공원이 있다. 생태공원이 어딘지 찾아볼 필요도 없이 우린 이곳이 생태공원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울타리도 쳐지지 않은, 정말 마음만 먹는다면 다가가 손으로 만질 수도 있는 무방비 상태의 들판 언덕에서 열댓 마리의 토끼가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작은 철창 속에 갇혀 있지 않음에 안심했으나 한 편으론 사람들이 토끼를 함부로 만지거나 괴롭히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말 그대로 ‘동물원’이 아닌 ‘생태공원’임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자유로워 보이는 모습에 이곳에 오는 방문객들에 대한 신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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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로 가는 길엔 전나무 숲길이 있었다. 하염없이 걷는 우리의 여정은 다시금 시작되었다. 평일 아침이라 그런지 주변에 단 한 사람도 없어 무척 자유로웠다. 잔잔한 노래를 틀고, 마스크를 내리고 맑게 투과해오는 공기를 느끼며 산림욕을 즐겼다.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엔 색상을 표현하는 단어가 무척 많다는데, 그 말을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곳이 꼭 이곳 같았다. 쑥색, 시푸르뎅뎅, 새파란, 초록, 수박색, 잔디색, 군청색, 감실감실, 목청…. 눈을 돌려 어디를 봐도 제각기 다른, 하지만 어쨌거나 ‘초록’인 숲을 보며 마음이 온화해지는 것을 느꼈다. 초록색이 왜 안정을 주는 색이라고 불리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내려오는 길엔 ‘오대산 나이트클럽’ 간판을 발견했다. 유행이 지난 촌스러운 간판을 보며 웃음이 났다.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이곳에 떡 하니 자리 잡은 것과 속세와 번뇌를 집어던지기 위해 오는 목적성 다분한 장소에 꿋꿋하게 나이트클럽을 세운 것은 꼭 하나의 현대예술 같았다. 나부터도 이 나이트클럽을 보고 도대체 어떤 곳인가 궁금해졌으니 말이다. 말 그대로 클럽으로 운영되는 곳인지, 현재도 영업 중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극도의 니치 마케팅을 보는 것 같아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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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틀간 약 오만 보를 걸었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아침과 저녁에 열리는 프로그램을 듣는 대신 걷기를 선택했으니 걷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 이곳에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는 것보다 팔다리가 엇갈려 흔들릴 때 비로소 생각을 비워내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고, 내 특성에 맞게 온종일 걷는 편을 택했다.

 

내가 고민하는 것 중 대부분은 그토록 (머리가 빠개지도록) 고민한다고 한들 달라질 만한 것이 없다.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한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과 관련된 일이라 백 수십번 고뇌한다고 한들 손 쓸 수 없거나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면 내가 해서 해내면 될 일이었다. 망설일 시간에 ‘하면 될’ 일이었다. 쉽고 간편했다. 그러나 잡생각을 분리수거 하듯 턱턱 버리고 깨끗하게 잊어버릴 순 노릇이었다. 지저분한 이유와 구질구질한 망설임이 따라붙었다.

 

확신과 의지를 불태울 계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난 이곳, 이 유리된 공간에서 유리된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 확신을 얻었다.

 

숲을 걸으며 친구와 이런 얘기를 했었다. 어쨌거나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곳은 고요하고 초록빛이 가득한 이곳이 아니라 매캐한 연기에 목이 따끔거리는 도시 한복판이라고. 난 어쨌거나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있는 도시에서 살아야만 하는 상황이고 (우린 ‘사랑 그라운드’라고 칭했다),  사랑 그라운드- 에서 잘 살기 위해선 이젠 정말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하고싶다,고. 미뤄두었던 일과 애써 외면하던 모든 것을 비로소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다.


속세를 벗어나고자 온 명상 마을에서 오히려 속세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짐하다니, 참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난 열반에 오른 수도승이 되고자 온 것이 아니었고, 쫓기듯 쉬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다 내려둔 휴식을 원했으며, 그러자 나를 가장 괴롭히는 ‘나태한 나’에 대해, ‘미래의 나’에 대해 차분히 마주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그 자체로 유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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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각기 다른 초록으로 물든 숲에 파묻혀 있던 이틀을 보내고, 난 다시 사랑 그라운드로 복귀했다.

 

느림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을 거란 홍보문구처럼, 이곳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난 또다시 순식간에 하루가 지나는 도시,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대산에서 보낸 느린 시간 동안 내가 했던 다짐과 확신, 生에 대한 의지는 정신없는 사랑 그라운드에서 날 지탱해줄 포션이 될 것이다.

 

 

[권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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