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미련한 자들을 위한 휴식처 - 연극 '돌아온다'

글 입력 2022.05.16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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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인데, 온전히 아름다운 것들의 자취는 거의 남지 않는다. 부드러운 살코기가 목구멍을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것처럼 우리는 좋거나 멋진 것들을 손쉽게 무의식의 저변으로 던져버린다. 야속하게도 그것들은 아주 결정적이거나 사소한 어떤 순간에만 살짝 떠오른다.

 

그렇다면 왜 어떤 것들은 사무치게 아름다운가? 그러니까 우리가 바닥을 긁으면서 그리워하는 그것들이 왜 그랬냐 말이다. 역시 내 생각인데, 그것들은 마냥 아름답지 않다(부디 무언가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사람들이 이 문장에 공감할 수 있길 바란다). 우리는 액자의 틀로 현실과 그림을 구분 짓고, 그림자를 통해 빛을 확인한다.

 

빛과 그림자처럼 그리움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하나는 내가 그리워할 만큼 아름다운 대상의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부재를 실감하게 하는 아픔이다. 따끔거리는 부재의 아픔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더 사랑하게 된다.

 

무언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래서 상실감, 즉 그리움은 손쉽게 마련이나 집착이 된다. 그림자 속에서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이 깃들어있다. 우리는 밝은 빛에서 꺼내지 못했던 온갖 상상력을 발휘하며, 능숙한 마술사처럼 애정을 거대한 무언가로 만든다. 그리움은 그런 방식으로 한 사람의 삶을 망치처럼 휘두른다.

 

오늘 리뷰할 연극 '돌아온다'도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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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가게 '돌아온다'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무대의 삼 분의 일은 가게의 입구 쪽 마당으로, 삼 분의 이는 가게 내부로 꾸며져 있다. 전반적으로 허름해 보이지만, 가게 안은 소박한 매력이 있다. 연극이 주로 진행되는 가게 안쪽에는 너덧 개의 식탁과 의자들이 있고, 왼쪽에는 주방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

 

관객의 시선에서 살짝 왼쪽 위에 위치한 벽면에는 '여기서 막걸리를 마시면 그리운 사람이 돌아온다'라고 쓰여 있는 서예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가게의 이름이 '돌아온다'가 된 것도 이 글귀 때문이고, 가게의 오른쪽에 사람을 찾는 전단지가 있는 이유도 이 글귀 때문이다. 벽면을 장식한 소품들처럼, 매일같이 가게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각자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연극은 다섯 명의 등장인물의 사연을 풀어내는 식으로 전개된다. 등장인물은 잃어버렸거나, 부재가 느껴지는 것들로 인한 상실감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가게의 막걸리를 마신다. 가게의 사장은 -얼마나 의도가 있었는가를 떠나- 아버지를 버렸다는 죄책감으로, 선생은 아들의 제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청년은 집 떠난 외국인 아내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게에 머무른다. 할머니는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스님은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는 마음으로 이곳에 머무른다.

 

하물며 이 가게 자체에도 기구한 사연이 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조선의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이 불구가 되고 나서 아내가 일하러 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믿지 않고 죽어 귀신이 되고 나서도 그를 기다린다. 가게의 이름이 정착하지 않은 어느 날, 주변 절에서 수행하던 주지 스님이 부부 귀신을 알아채고 서예작품을 걸어 놓은 것이다.

 

이 귀신들의 처지는 다섯 명의 처지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죽어서도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 귀신처럼, 이들도 지박령처럼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나간다.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고 지상에 머무르는 귀신처럼, 이들도 나아가지 못하고 슬픔을 술로 달래며 마냥 기다린다.

 

가게의 문패에 걸린 글귀는 기다림에 끝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리움은 모든 간절한 목소리에 답을 하지 않는다. 스님과 할머니는 서로가 애타게 찾는 사람을 찾지만, 모든 사람이 기적 같은 끝을 맛본 것은 아니다. 사장은 이미 아버지를 잃어버렸고, 선생은 군에서 자살한 유골함을 돌려받는다. 청년의 아내는 이혼서류를 들고 나타난다. 기다림의 결과로 얻은 배신감은, 얕은 희망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마지막 숨을 거두어간다.

 

선생은 아들의 장례식에서 돌아와 가게에 걸려있던 서예 작품을 찢어버리고, 청년은 자살시도를 한다. 사장은 단골들을 통해 기다림의 비참한 말로를 보는 중에, 아들과 손자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선생이 서예 작품을 찢어버린 상황에서 '돌아온다'의 기다림도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단골들은 돌아온다. 선생은 찢어버린 작품을 풀로 붙여 돌아오고, 청년은 목에 밧줄을 들고 돌아온다. 선생도 아들을 잃어버리고, 청년도 아내를 잃어버렸지만 계속해서 가게로 돌아온다.

 

시간이 지나고서도 그들은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선생은 이제 가게를 인수하고, 청년은 술을 줄이면서도 종종 들린다. 그들은 그리움의 대상을 잃어버린 후에도 기다린다. 기다릴 대상이 없는데도 말이다. 슬프게도, 이 연극에서는 처음부터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가게의 사장부터 그래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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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보면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올랐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한다는 점과 기약없는 기다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던 것 같다.

 

디디와 고고는 기다리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고도가 존재하지 않음을 느끼지만 기다림을 멈추지도,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로 절망하지도 못한다. 고도가 올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과 상상력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고도가 누구고 무엇이 건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누구'나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때로 쉽게 멈출 수 없는데다가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고도가 대단히 추상적인 개념이건, 실존하는 인물이건을 구분짓는 것 조차 상관없다. 그것을 그리워하는 것 자체가 삶의 여로가 되고, 그 바보같은 짓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뭐가 되었건 우리는 괴짜들이 오가는 길가에서 오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려오지 않았는가. 그 덕에 그 옆에서 잡담을 나눌 타인의 존재를 더 실감하면서 말이다.

 

이 작품이 비극을 다룸에도 뜨뜻한 감동을 남기는 것도 이 이야기가 너무나 인간답기 때문이다. 타인을 그리워하고, 그리움을 떠나보지 못해 작은 가게에 외로운 사람끼리 모인다. 어떤 뚜렷한 답이나 해결을 찾을 수 없지만 이 비상식적이고 미련한 공간에서는 그래도 된다는 기분이 든다. 이 각팍한 세상에 그런 미련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하나는 존재해도 좋지 않을까.

 

그래서 직장을 관두고 가게를 이어나가는 선생이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거울을 보고 엉엉 우는 사장의 모습에서 이상한 연대감이 느껴진다. 그들처럼 상실에 펑펑 울지는 못했어도, 그리움과 아픔 속에서도 행복한 장면을 상상하고마는 미련함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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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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