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가 캔버스에 담을 수 있는 것 [영화]

영화 <나의 뮤즈, 그림 도둑>이 그려내는 예술을 통한 소통과, 고통을 그리는 방식에 대한 고민
글 입력 2022.05.1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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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의 창시자이자 거장이라 여겨지는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는 대기 중의 빛을 포착하여 캔버스에 그대로 담아내고자 하루 종일 빛의 변화를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는 그림 뒤의 거창한 서사나 복잡한 의도를 배제한 채 눈앞에 있는 빛과 그 빛이 만들어낸 풍경을 그려냈다. 심지어 모네는 그의 모델이자 어려운 시간을 함께 버텨낸 동료였던 아내 ‘카미유’가 죽는 순간조차 빛에 대한 관찰과 포착을 멈추지 않는다.

 

모네는 자신의 친구이자 평론가 ‘클레망소’에게, 카미유가 죽는 순간에도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색채의 충격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채의 변화를 추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가 겪은 ‘색채의 충격’은 <카미유의 죽음(Camille Monet on Her Deathbed, 1879)>이라는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모네가 어떤 마음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 지 모두 짐작할 수는 없지만, 슬프고 절망적인 눈 앞의 죽음이, 그저 끊임 없이 변화하는 빛이 만들어 낸 하나의 장면으로 캔버스에 담겨 있는 모습을 보면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이 그림 안에서 어떠한 감정도 서사도 아닌 오직 ‘빛’만을 볼 수 있을까? 이 그림을 그린 모네 조차 그것이 가능했을 지 의문이 든다.

 

이렇게 캔버스 안에는 그리는 사람이 의도했던 것도, 의도하지 않은 것도 모두 담겨 버리고, 그것을 보는 사람에 의해 여러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렇기에 정말 캔버스 안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또 담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에 대한 고민은 예술의 생산자이든 소비자이든 이전에도 앞으로도 오랜 시간 이어 갈 고민이 될 것이다.

 

노르웨이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뮤즈, 그림 도둑>도 이러한 고민을 다시 꺼내 보게 한다. 베를린에서 노르웨이로 넘어 온 이후 자연주의 그림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바르보라 키실코보(이하 바르보라)’는 오슬로에서 그림을 도난 당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잡힌 그림 도둑 ‘카를베르틸 노를란(이하 베르틸)’은 마약을 한 상태로 범행을 저질러 범행 당시를 잘 기억하지 못하고, 바르보라는 그의 그림이 ‘아름다웠다’는 베르틸에게 자신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바르보라와 베르틸은 만남을 지속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꾸미기][크기변환]포스터.jpg

 

 

 

예술이 이루어내는 소통 : “내 약한 모습을 본 건 당신 뿐이에요”


 

바르보라와 베르틸은 각각 화가와 모델이 되면서,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바르보라는 화가로서 모델인 베르틸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어떻게 범죄자가 되었는지, 그의 이야기를 비난 없이 들어 준다. 바르보라 역시 전 남자친구의 폭력과 집착 때문에 베를린에서 노르웨이까지 도망쳐 온 자신의 이야기를 베르틸에게 털어 놓는다.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며 둘은 서로의 어둡고 약한 부분을 묵묵히 들여다 본다.

 

이렇게 바르보라가 꿰뚫어 본 베르틸의 모습은 바르보라에게 영감(靈感)으로 다가왔고, 이는 바르보라의 그림 속에 그대로 담긴다. 베르틸이 처음 자신을 그린 바르보라의 그림을 보았을 때 울음을 터뜨린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이 장면으로 예술을 통해 둘이 나누었던 소통의 깊이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는 베르틸이 처음으로 바르보라에게 건넨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꾸미기][크기변환]스틸컷_베르틸_바르보라.jpg


 

당신한테 많이 배우고 영감을 많이 받아요.

엉망으로 살면서 그동안 놓쳐 왔던 것들이죠. 당신은 모르겠지만요.

그림 모델이 된 게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내가 몰랐던 예술을 당신한테 배워요.

예술이라는 건 그냥 그림보다 훨씬 대단한 거에요.

모든 감정과 눈물들이 들어가니까요. 내 약한 모습을 본 건 당신뿐이에요.

진실하고 순수한 우정이죠.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바르보라.


 

둘은 예술을 통해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받아들여 주었으며, 서로에게 영감이 되어준다. 이를 보며 예술은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을 우리 눈 앞에 가져다 놓고, 서로가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도록 하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그러나 바르보라와 베르틸을 이어주었던 것 중 하나인 각자의 ‘자기파괴적인’ 면은 둘을 조금씩 어긋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베르틸은 바르보라와 교류하는 와중에도 마약을 끊지 않고 범죄에 가담했고, 바르보라는 인간의 어둡고 아픈 부분에 몰두하여 예술을 이어갔다.

 

 

“베르틸은 살면서 참 많은 사고를 겪었어요.

자기파괴적인 상황에도 많이 처했었고요.

그런 방식으로 관심을 갈구하는 것 같았어요. 자기를 봐 달라고요."

-

"그런데 알고 보니 (바르보라는) 무서운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나를 잘 꿰뚫어 보죠.

근데 나도 자기를 볼 수 있다는 걸 깜빡 잊은 것 같더라고요.

한동안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 적은 있을까요?

바르보라는 어릴 때부터 죽음에 매력을 느꼈어요."

-

"바르보라에게 더 많은 얘기를 해줬어야 해요. (...)

바르보라는 어두운 면에 관해서만 물어봐요. 거기서 영감을 얻는 거겠죠"

 

 

결국 베르틸은 다시 교도소에 수감되고, 바르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시달리며 한동안 연락이 끊긴다. 바르보라가 어두운 면만 물어 봤다는 베르틸의 말을 통해 누군가를 ‘제대로’ 봐준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누군가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어두운 면과 상처만을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러한 면을 보는 것은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일이고, 상대방이 자신의 이러한 면을 똑바로 마주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상처의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상대방의 어둠과 상처에만 집중하고 심지어 이를 계속 영감으로 삼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내면의 어둠과 상처를 공유하는 가깝고 소중한 관계일수록, 자신이 ‘구원자’ 역할에 과하게 몰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떠한 이성적인 판단 없이 상대방의 아픔에 과하게 동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이는 소중한 사람을 의심하거나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조심과 경계가 결여된 관계라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한 것도, 서로의 상처와 잘못에 대해 성숙하게 대처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바르보라와 함께 노르웨이로 도망쳐 온 이후 바르보라를 지원하는 남자친구 ‘외위스테인’도, 위험에 대한 인지 없이 타인과의 관계를 이어가며 위험과 상처에 이끌리는 바르보라를 걱정한다. 그리고 바르보라 안에 채 자라지 못한 ‘아이’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네 안에는 아직 아이가 있는데 넌 고속 도로 한가운데에

그냥 애를 데려다 놓고 거기서 놀게 내버려 두고 있어.

연인으로서 곁에서 보기 무서운 일이라고.

너의 어떤 면에 대해서는 제대로 돌봐주지도 않고 신경도 안 쓰잖아.

네 안에 있는 아이를 데려와서 돌보지를 않는 거야.

그게 제일 두려운 부분이야."

 

 

이는 베르틸 역시 마찬가지다. 베르틸은 당시 여자친구와 마약 중독 치료를 위한 재활원을 향하는 길에서도 마약거래를 시도한다. 이에 충격 받은 여자친구가 따지자, 여자친구가 자신을 통제하려 한다며 바르보라의 작업실로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이후에도 마약을 끊지 않고 결국 약에 취한 채로 차를 훔치고 도로를 질주해 자신에게도, 자신을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입힌다.

 

한쪽 면만을 보고는 무언가를 제대로 그려낼 수 없는 것처럼, 둘에게는 서로의 어둠과 상처에 몰입하기 전에, 자신과 상대방 안의 미처 자라지 못한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제대로 마주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르보라와 베르틸이 각자 스스로를 제대로 들여다 보는 시간을 거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서로에 대해 농담 섞인 비판과 조언을 해줄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결국 자신과 상대방의 모든 모습을 제대로 마주하고 바라볼 때 상대방도, 자신도 온전히 캔버스 안에 담아내고, 담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바르보라와 베르틸이 예술을 통해 이루어낸 소통의 가치가 무의미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둘이 예술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쌓아 온 관계는, 둘 모두에게 어느 부분에서는 유일하게 이해 받고 의지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를 선물해 주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간과한 것은, 진정한 소통을 돕는 예술의 힘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통의 방식과 내용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임에도 이를 간과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은, 바르보라와 베르틸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어렵다. 하지만 이는 예술에서도, 삶에서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소통의 조건이자 관계의 바탕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통’이 예술이 될 때 : “다 같은 고통이 아니야. 미학적 요소가 있어야 해”


 

이러한 고민과 성찰의 맥락에서, 영화 <나의 뮤즈, 그림 도둑> 속 바르보라가 그리는 ‘상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바르보라는 점점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의 내면에 있는 어둠과 아픔에 집착하고 몰두하며 이를 영감 삼아 작품을 그려 간다.

 

 

[꾸미기][크기변환]베르틸 그림 일부.jpg

 

 

베르틸이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후에도 바르보라는 그의 손에 난 상처가 ‘성흔’ 같다면서 이를 캔버스 안에서 정밀하게 묘사한다. 이런 바르보라의 모습을 보며 외위스테인은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그냥 주제가 궁금해서 그래. 네 친구가...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쳤는데

상처에 집착하잖아. 그걸 이용해서 작품을 만드는게 좀 불편하지는 않아?"

 

"응, 어쨌든 살았잖아. 만약 베르틸이 죽었다면 내 감정도 완전히 달랐을 거야.

이런 그림도 아마 안 그렸겠지. 내 그림 모델이 돼 줄지 베르틸한테

물어볼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러면 달랐겠지만 베르틸은 살아 남았잖아.

그러니 이걸 모티프로 해서 그림을 그리는 데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어."

 

"(...) 알았어, 내가 만약 지나가다가 고통받는 사람을 봤다고 쳐 보자.

그런데 너무 아름답다면서 이걸로 작업을 하겠다고 한다면

내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에 모순이 있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모르겠다."

 

"다 같은 고통이 아니야. 규칙이 하나 있어. 미학적 요소가 있어야 해"

 

 

바르보라가 이야기하는 ‘미학적 요소가 있는 고통’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고통을 그리는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대부분 고통 그 자체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자신의 고통을 제대로 마주하고 회복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는 모습, 억압과 혐오로 가려지고 지워진 고통을 드러내며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모습, 다른 존재의 고통을 발견하고 이를 어루만져 주는 모습에 우리는 공감하고 감동을 받으며, 이를 표현한 예술을 ‘아름답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고통을 예술로써 드러내는 것에는 그것이 어떤 회복과 치유의 목적이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 그저 그 아픔과 상처가 주는 자극을 소비하기 위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자신과 타인의 상처와 아픔을 그려낸 바르보라는 그의 캔버스 안에 무엇을 담으려고 했던 걸까? 그리고 그러한 바르보라의 의도는 고스란히 그의 캔버스 안에 담길 수 있을까?

 

물론 표현의 자유는 예술을 지탱하는 아주 중요한 가치이다. 상처와 아픔으로 점철된 것을 그리는 것이라도 예술가의 발화를 막는 것은 이러한 가치에 부합하지 않으며,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상처와 아픔을 그려내는 것은 때때로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를 상기시키고 고통을 줄 수 있다. 또 상처와 아픔 뒤의 맥락을 무시한 채 자극적인 소재로서만 고통을 소비할 때, 그 고통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 주거나 이와 관련된 가치 판단(도덕 판단)의 기능을 마비시킬 수도 있다. 


실제로 바르보라는 영화 내내 베르틸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을 늘 유예하고, 베르틸이 겪었던 고통에 집중하며, ‘상황이 조금만 달랐다면 (베르틸이) 노르웨이 수상이 됐을 지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애처로워 보이거나 과장해서 말하긴 싫지만 법정에서 베르틸을 만나는 순간

뭔가 사랑에 빠지게 됐어. 그 사람한테서 도저히 도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난 그냥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의 영혼을 봤어.”

 

 

바르보라가 분명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베르틸의 모습을 본 것은 맞지만, 베르틸이 마약을 하고 그림을 훔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베르틸은 심지어 이전에 조직폭력배로 활동하며 마약을 강매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파괴되었을 피해자들의 삶과 그들이 겪었을 고통은 상상할 수 조차 없다. 그럼에도 바르보라가 그린 베르틸의 모습에는 ‘범죄자’ 혹은 ‘가해자’의 모습은 담기지 않는다.

 


[꾸미기][크기변환]베르틸.jpg

 

 

이러한 맥락을 배제한 채 베르틸의 고통에만 몰입하는 것은, 베르틸로 인해 상처받고 아픔을 겪었던 사람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는 것일 수 있다. 물론 베르틸이 범죄자라는 이유로 베르틸이 겪었던 고통을 왜곡하거나 악의적으로 편집해 그려내는 것도 ‘베르틸’을 제대로 담아내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대상에 대한 온전한 이해나 충분한 고민 없이 ‘고통’을 그리는 예술은 누군가에겐 끔찍한 폭력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이 그저 아무것도 아닌 폭력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늘 신중하게 지켜봐야 할 것이다.

 

결국 이렇게 자신이든 타인이든 혹은 또 다른 생명이든 누군가의 고통을 ‘예술’로 그리는 데에는 영감이 되는 상처와 아픔을 어떻게 다루는지, 또 이를 다룬 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비하는 지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어쩌면 표현의 자유와, 표현에서 윤리성을 고려하는 것은 상충되는 것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관계일지 모른다. 우리가 지속적인 고민과 성찰로 섬세하게 자신과 또 다른 존재의 고통을 그려낼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김효중 태그 .jpg

 

 

[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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