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대장내시경 유경험자가 되는 법

불가항력의 과정을 거쳐
글 입력 2022.05.0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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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검진의 시기를 놓쳤다. 코로나를 신경 쓰다가 놓치고 회사 일에 밀리고 시간이 많아졌더니 오미크론의 확산. 이 시국이라 다음 해 6월까지 가능하다고 해서 근처 병원에서 상담 받고 검진을 예약했다. 기본적인 검사와 몇 가지 비급여 검진을 받았고 44만 7천 8백원을 긁고 나왔다. 진료 볼 때 결제한 대장내시경 장청소용 알약 2만 5천원 별도.

 

건강검진의 꽃은 역시 대장 내시경이 아닐까. 아직 받기엔 이른 나이라지만 괜히 괜찮을까 어쩔까 신경 쓸 바에야 눈 딱 감고 검사 받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대장 내시경을 하는 김에 세트로 묶어서 위 내시경도 함께 해치우기. 위 내시경 금식은 대장내시경 식단과 장 청소에 밀려 어쩌다보니 신경 쓰지 않게 된, 스쳐지나가는 검사가 되었다.

 

 

 

대장내시경 D-3


 

식단을 신경 써야 하는 시작점이다. 그런데 이날 이모가 사온 참외와 로제딸기에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올해 처음 만난 참외에서 나는 단 냄새와 로제딸기라는 새로운 품종의 유혹에 이성을 잃고 맛있게 먹고 말았다. 심지어 먹는 동안 아무런 생각이 없었고 저녁 먹을 때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3일 전은 괜찮다고 해서 안심하는 한편 반성의 의미로 다음 날은 식단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니 먹을 거라곤 김밥 밖에 없어서 잘 말린 김밥을 역으로 풀어가며 김 다 떼어 먹으면서 했다.

 

병원에서 준 대장내시경 검사안내서에 따르면 검진 3~5일 전부터 씨 있는 과일인 수박, 참외, 포도, 키위 등을 피하고 미역, 김, 깨, 나물, 김치, 현미밥 등을 먹지 말라고 했다. 하루에 두 개나 해치웠다.

 

 

 

대장내시경 D-2


  

먹어도 되는 음식은 흰밥, 계란, 흰생선, 두부 등 하얗고 부드러운 음식이었다. 그래서 아침은 엄마표 계란 토스트였다, 점심은 양심을 챙겨서 흰 밥과 연두부, 두부조림, 그리고 섬유질이 적은 밑반찬 류. 대장내시경이 처음이라 식빵과 연두부 세트와 바나나를 주문했는데 대장내시경 받을 때까지 바나나가 익지 않아서 내 식단에서 바나나는 등장조차 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저녁으로 돼지 수육이 준비되어서 치열하게 고민했는데 지방기 없이 푹 삶은 살코기는 괜찮을 것 같아서 얇게 썰어 몇 점 먹었다. 찾아보니 고기도 피하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랬다.

 

3일 전에는 씨 있는 과일을 먹고 2일 전에는 돼지고기를 먹은 나, 과연 대장내시경을 할 수 있을까요?

 

 

 

대장내시경 D-1


  

하필이면 검사가 화요일이라서 월요일에 주린 배를 움켜쥐고 회사에 가야했...겠지만 나는 아침에 식빵을 먹었다. 전 날 저녁 수육을 곁들이기는 했지만 가벼운 식사를 했기 때문에 월요일 오전 회의 시간을 버티기 위해서는 뭐라도 입에 넣어야 했고, 연두부보다는 식빵 한 쪽이 더 포만감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가방에 햇반과 연두부를 챙겼다. 당이 떨어질 걸 대비해서 사탕도 챙겨갔고 갈증과 허기를 달랠 이온음료도 한 병 챙겨갔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 카스테라가 팔면 살 생각이었는데 월요일 출근길은 많이 막혀서 겨우 출근했다.

 

생각 외로 오전에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식빵을 먹어서 공복이 아니었고 사탕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원래 11시부터 배가 고파오기 때문에 허기가 지더라도 유난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점심은 즉석밥에 따뜻미지근한 물을 부어서 연두부와 섞어 먹었는데 굉장히 맛이 없어서 연두부 오리엔탈 소스를 까서 깨를 골라내고 섞어 먹었다. 과식하면 안 된다지만 이른 저녁 소량의 흰죽 먹기 전까지 버티기 위해선 200그람 즉석밥 하나에 연두부 몇 십 그람정도는 먹어도 되지 않나 자기합리화를 하게 되었다. 점심 이후의 허기는 자두맛 사탕과 사무실 자리에 구비해두는 자일리톨 사탕 그리고 토레타로 버텼는데 입이 달아서 힘들었다. 입을 상쾌하게 만들 강력한 민트사탕이나 입이 매워지는 호올스를 챙겼어야했다.

 

이른 저녁을 먹으라고 해서 정시퇴근하고 칼같이 버스를 잡아타고 집에 오는 길에 포카리스웨트를 하나 사들고 귀가해서 흰죽을 먹었다. 정말 조금만 먹을까 고민하다가 배가 너무 고파서 적당히 먹었다. 간장으로 간을 하고 꼭꼭 씹어 먹었다. 간장은 신의 조미료가 아닐까.

 

 

 

준비물: 크리콜론정, 240mL 용량의 전용컵, 2L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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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나서 장을 비우기 위해 알약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받아온 약은 크리콜론정 32알. 15분 간격으로 물 240mL와 함께 4알씩 총 20알을 먹으라고 했다. 물 1L 추가 복용은 변을 팽창시키고 약효를 내면서 탈수을 예방하고 장점막을 보호해주기 위한 용도라고 한다.

 

저녁식사로 적지 않은 양을 먹었으니 주의 문구가 아주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약 4알과 함께 240mL의 전용컵을 비우고 15분을 기다리는 동안 물과 이온음료 반 병을 마셨다. 물을 끊임없이 마시다보니 저녁을 가볍게 먹지 않은 걸 후회했다. 배가 조금이라도 비어있어야 물을 조금이라도 더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나중에 가서는 그 적당량의 흰죽으로 채운 열량으로 다음 날까지 버틸 수 있었단 생각이 들었다.

 

물을 정말 열심히 마셔야 했는데 약 때문인지 물 때문인지 속이 메스꺼워서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았다. 탈수 예방이고 뭐고 너무 힘들어서 잠깐 지쳐 잠에 들기도 했다. 초반에는 물에 이온음료를 타서 수월하게 마셨는데 시간이 지나니 이온음료의 미끄러운 맛, 미지근한 물의 부드러운 맛 모두 속에서 받지 않았다. 절대 약 먹고 구토하지 말라고 해서 물을 정말 한 모금씩 조금 겨우 마셔가며 버텼다. 양치를 끝내고 찬물을 들이켰을 때 비로소 몸이 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물 마시는데 고생을 너무 많이 한 탓에 장을 비우는 일은 고되게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불가항력이라 내 소관이 아닌 듯 했다. 저녁을 먹어서 그나마 버틸 수 있는 힘이 남아있어서 견뎌낸 것도 같았다.

 

 

 

대장내시경 D-DAY


  

새벽에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정신 차리고 약을 먹기 시작했다. 약 먹고 물 마시고 전날 먹은 약의 효과로 화장실 갔다 오면 시간이 훅 지나는 데다 아침에는 다행스럽게도 4알씩 3번, 총 12알만 복용하면 되어서 부담이 덜했다. 약효가 돌기까지 시간이 걸리니까 약을 먹고 냅다 자기 시작했다. 어차피 불가항력이 나를 일으킬테니 잠으로라도 체력을 비축해두기로 했다. 그리고 병원 가기 직전까지 불가항력에 내 몸을 맡겼다. 병원에 가서도 화장실 드나드는 거 아닌가 했는데 다행히 그러지 않았다.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병원에 예약시간 5분 전에야 겨우 도착했으니 그럴 만했을지도.

 

 

 

검사의 시작, 수면마취의 시간


  

위와 대장내시경 모두 처음이라고 했더니 간호사 선생님이 꼼꼼하게 주의 사항을 일러주셨다. 내시경을 앞두고 긴장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내시경하다가 위나 대장에 천공이 생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이야기와 수면마취를 해서 깨고 나면 기억하지 못하지만 의식은 있어서 몸을 뒤집으라고 하면 환자가 알아서 움직인다는 이야기. 그리고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인지 내장내시경할 때 너무 긴장해서 본인이 속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 기억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는 생각 없이 양말을 신고 있었는데 필요한 경우 벗길 수도 있다고 하셨다.

 

시술대에 앉아서 맛있는 기포제거제를 먹고 입 안에 인공적인 과일향이 나는 듯한 마취제를 뿌렸다. 입안이 마취가 되니 내 혀가 제 위치에 잘 있는지 감각이 없어서 조금 무섭기도 했는데 그 무서움은 찰나고 위 내시경을 하기 위해 입에 기구를 물어야 하는데 이때 드는 거북함이 너무 심해서 구역질을 했다. 그러나 그동안 마취제가 들어가고 나는 몇 번의 구역질을 하다가 의사 선생님의 가운이 흐릿하게 보이면서 페이드 아웃,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나있었다.

   

*

 

검사 결과는 무척 좋았다. 장과 위 모두 염증이나 용종 없이 깨끗했다. 식단을 잘 지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용케 장이 잘 비워져서 안심했다. 40이 되기 전까지 내시경을 또 받을 필요는 없다고 해서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 마음이 얼마나 가벼웠냐면 위 내시경할 때 구역질 하느라 목이 아팠는데 그걸 다른 검사 하나 더 하고 집에 돌아와서야 눈치를 챘을 정도.

 

온갖 비급여 진료로 카드 값이 천장을 뚫을 뻔했지만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몇 십 만원으로 건강을 검증받고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다니 건강검진 생각보다 기특한 녀석이었다.

 

30대의 내시경은 이것으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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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박민지
    • 정말 글자체가 너무 보기좋게 잘 쓰셔서...ㅎㅎ
      1일뒤 종합검진(35세) 첫검진이라 떨려서 검색해보다 글보게 되었네요..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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