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일상이 새로움이 되는 전시 2곳

개념미술, 전시를 통해 배워보기
글 입력 2022.05.01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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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감상이 대중적인 취미가 되고, 그만큼 많은 전시가 열리고 있는 지금 아직도 현대미술은 난해하고 어려운 것이라는 인식이 남아있다. 전시장을 산책하듯 거닐며 작품 앞에 걸음을 멈추고 앞으로 한 발짝, 뒤로 한 발짝 서보며 어떻게든 이해해보고자 작품을 한참 노려본 적이 있다면, '개념미술'이라는 용어가 대체 무엇인지 감이 안 잡힌다면 이 글을 읽어보길 바란다.

 

 

 

개념미술에 다가가기: 물 한 컵과 참나무


 

우리가 일반적으로 전시회에서 취하는 행동은 '눈으로 꼼꼼히 훑어보기'이다. 회화를 감상하면서 형태, 색감, 터치 등 무엇을 어떻게 그렸는지를 중점적으로 보는 것이 기존의 흔한 방법이다. 그러나 개념미술은 말 그대로 개념이 중심이 되고, 개념이 작품 자체가 되는 예술이다. 그래서 보다 '왜?'라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작품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작품 밖을 넘나들며 생각해야 하기에, 그것도 주어진 내용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생각을 끌어내고 발전시켜야 하기에 수동적인 자세로는 개념미술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예술이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꽤나 잘 알려진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샘 Fountain>을 생각해보자. 뒤샹의 샘은 그저 공장에서 만들어낸 소변기에 불과하다. 심지어 작가 자신의 이름도 아닌 R. MUTT라는 서명을 써놓고 전시장에 가져다 놓았을 뿐이다.

 

사실 우리가 이걸 보고 드는 생각은 딱 이럴 것이다. '이게 왜 예술작품인데?'

우리는 바로 정확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직접 만들지 않은 것도 그 작가의 작품이 될 수 있는가, 용도가 있는 물건도 작품이 될 수 있는가, <샘>이 의도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물음들을 통해 답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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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크레이그-마틴(MichaelCraig-Martin)의 <참나무 An Oak tree> 역시 눈으로 꼼꼼히 살펴본다 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 유리 선반 위에 물 한 컵이 놓여 있는 게 끝인 이 작품은 전시장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그래서 오히려 흥미롭고 의문스럽다. 그리고 곧바로 '참나무'라는 제목에 눈길이 가게 된다.

 

인터뷰에서 작가는 자신이 유리잔에 물을 넣을 때 이것이 참나무가 되었고, 더는 유리잔도 물도 없다며 참나무만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진짜로 참나무가 있고, 물 한 컵의 형태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물 한 컵만이 참나무일 뿐, 똑같이 생긴 다른 물 한 컵이 있다고 해서 그것도 참나무라는 말은 아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면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소변기가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데, 물컵이 참나무가 되지 못할까?'라는 이상하지만 열린 마음을 갖고 작품을 바라보길 바란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고정되고 항상 통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면 상식이나 수학, 과학이라 불리지, 예술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감상하며 스스로 주고받았던 질문과 생각의 흐름은 이러했다.

 

1) 물 한 컵이 작품이 된 이유는 작가가 작품이라고 했기 때문이고, 전시장(작품이 놓이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 작품이라고 전시되면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고 따른다.

 
2) 물 한 컵이 참나무가 된 이유는 작가가 참나무라고 했기 때문이고, 참나무라는 제목이 붙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엔 받아들이기가 까다롭다.
 
3) 하지만 참나무를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었다 해서 그게 실제 참나무 자체와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미지를 보고 당연히 참나무라고 생각한다. 비슷하다거나 닮았다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둥근 기둥의 형태와 질량도, 만지거나 냄새를 맡을 때의 감각도 없을뿐더러 실제 참나무처럼 사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4)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참나무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한 그루의 참나무가 물(수분)을 저장하고 있듯이, 컵에 물이 담겨있다. 이건 그림이나 사진은 절대 갖지 못하는 공통점이다. 어쩌면 나도 이걸 참나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이 작품을 참나무가 아니라고 생각해도 상관없다. 작가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구나 하고 수용하는 태도에 비판적 사고를 가져보는 것도 좋은 감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의 이유를 찾아 작품을 해석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도 '저자의 죽음'(또는 독자의 탄생)이라는 표현을 통해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떠나 수용자, 감상자와 관계를 맺고 읽혀진다는 이야기를 했다. 즉,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래 의미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나 자신도 작품의 의미를 더하는 데에 참여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일상이 새로움이 될 때


 

뒤샹의 샘과 같이 이미 존재한 사물이 작품이 되는 경우를 보통 레디메이드(readymade), 오브제 트루베(objet trouvé)라고 한다. 이와는 조금 달리,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적인 사물이나 대상을 다른 크기로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다. 걸리버가 여행했던 거인국이나 소인국에 온 것처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온 물약을 마신 것처럼 내가 알고 있던 것이 전혀 다른 크기로 나타날 때, 새로운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자주 간과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규모(scale)이다. 작품의 크기는 감상자의 경험에 굉장한 영향을 끼치며, 도판이나 사진을 통해서가 아니라 작품을 직접 봐야 하는 이유가 된다. 로버트 테리엔(Robert Therrien)의 <무제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 초록색) No title (folding table and chairs, green)>을 사진으로 보는 것과 몸으로 체감하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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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Therrien, No title (folding table and chairs, green, 2008 

 

 

나는 비현실적인 현실을 마주하는 기분에 들뜨면서도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꼈다. 보통 1미터도 되지 않는 높이로 제작되는 평범한 가구가 우리 키를 훌쩍 넘어 3미터 이상의 거대한 무언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여전히 테이블과 의자이고, 접이식이라 접을 수도 있는데, 우리가 원래 사용하던 방식대로 쓸 수가 없어졌다. 설령 테이블 위에 뭔가 올려져 있다고 하더라도 볼 수 없으며, 키가 작은 사람은 의자 위조차도 쳐다볼 수가 없다. 본래의 용도는 불가능으로 바뀌고 미지의 영역이 새롭게 생겨난 것이다.

 

또한 우리의 위치가 달라졌음을 느끼게 된다. 테이블 밑을 걸어 다니고 다리 사이를 지나며 움직이는 우리의 위치와 경로는 일반적이지 않다. 사물의 경험이 건축물의 경험처럼 변한다. 이런 기묘한 감각에 몸을 맡기며 동시에 잊고 있던 작은 익숙함을 알아차리기도 하는데, 그건 바로 작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로버트 테리엔 작품의 상당수가 유년기의 추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왔다. 감상보다 지각과 체험에 가까운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에 공감하거나 또 다른 이해를 끌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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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Therrien, No title (folding table and chairs, green), 2008

 

 

 

'Untitled',열린 의미의 세계


 

예술작품은 그 자체로 제시되어 우리에게 다가올 뿐이지, 친절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런 예술작품들을 이해할 때 우리가 가장 첫 번째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힌트는 제목이다. 제목은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지시해주기도 하고, 작가가 의도하거나 느낀 바를 나타내주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툭하면 '무제(無題)', 'Untitled'라는 불친절한 제목을 달고 나와서는 우리를 난감하게 만든다. 작가 자신만의 언어로 작품을 제작해놓고 힌트도 없이 작품을 읽어내라니,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 'Untitled'라는 제목은 정해진 답이 없으니 자유롭게 풀어보라는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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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Craig-Martin, Untitled (prozac), 2014

Michael Craig-Martin, Untitled (soulbowl), 2011

Michael Craig-Martin, Untitled (liarspliers), 2011

 

 

이 글에서 소개한 두 작가, 마이클 크레이그-마틴과 로버트 테리엔의 작품 대부분도 제목이 없는 대신 그 뒤 괄호 안에 소제목이 쓰여있다. 일례로 <Untitled (prozac)>은 작가가 생각한 대상인 'prozac(항우울제 이름)'을 괄호 안에 넣어 감상자가 작가의 의도에 구속되지 않게끔 한 것이다. 표현적으로도 단순한 선과 면으로 구성된 형태와 임의적으로 칠해진 색으로 인해 각자 다르게 볼 수 있음이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테이프로 작업하는 방식도 작가의 손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흔적들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같은 의미에서 대상을 확대하여 부분적으로 잘린 모습만 재현하는 방법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부분을 감상자에게 맡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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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Therrien, No title (large red hangman), 1996

Robert Therrien, No title (Dutch door), 2003

Robert Therrien, No title (stork beak print), 1996

 

 

<No title (large red hangman)>의 경우에도 작가는 교수형대 또는 같은 이름의 단어 맞추기 게임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으나, 나에게는 마치 벽과 천장 사이를 받치는 지지대나 보(樑)를 연상시켰다.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것은 더 이상 원래의 기능을 할 수 없는 하나의 부조가 되어 벽에 붙어있다. <No title (Dutch door)>도 마찬가지이다. <No title (stork beak print)>는 부리에 포대기를 물고 아이를 가져다준다는 황새의 설화적인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지만, 길고 가느다란 형태가 젓가락을 그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더욱 초현실적으로 작품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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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Craig-Martin, 전시전경

 

 

지금까지 소개한 내용은 개념미술의 극히 일부분만을 다루고 있다. 미술사적으로 개념미술의 출발점과 과정이 연구되어왔지만, 모든 매체로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념이 핵심이 된다는 전제하에 무한한 가능성과 다양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나 앞으로나 너무나 많은 개념미술 작품이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이 입문을 위한 길잡이 역할이 조금이나마 되어준다면 글을 쓰는 나로서는 충분히 감사하겠다고 생각한다. 두 작가의 전시에 다녀와 보기를 꼭 추천하며, 하단의 전시 정보와 함께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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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현대미술의 거장 :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展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22. 04. 08 - 08. 28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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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테리엔 : at that time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2022. 04. 12 - 05. 05 (월요일 휴관)

 

 

[황인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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