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연대의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 나를 지워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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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20년, 수면 위로 드러났던 텔레그램 n번방 박사방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이는 텔레그램이라는 메신저에서 조주빈과 갓갓, 와치맨 등이 n번방, 박사방을 통해 불법 성 착취물을 유포한 사건이다.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분노가 치밀 정도로 참혹하고 끔찍했다. 피해자 중에는 미성년자도 있었다. 가해자들은 트위터에서 일탈 계를 운영하는 이들의 신상을 털어 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하는 등, 어떻게든 범죄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고도로 악랄한 수법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피해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 안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해당 방들에서는 각종 음담패설과 도 넘는 수위의 발언들이 오갔다. 피해자들은 공포에 떨 때, 범죄자들은 온갖 음담패설을 주고받으며 잔인하게 벌어지는 상황을 보며 웃고 즐긴 셈이다. 해당 사건을 접했을 때 치가 떨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를 지워줘』는 해당 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청소년 소설이다. 소설은 디지털 장의사로 일하던 주인공 모리가 성 착취 영상을 재유포 한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홈페이지를 폐쇄하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곧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온 같은 반 친구 리온이 '딥페이크로 만든 자신의 성착취 영상을 지워달라'라는 부탁을 해오자 모리는 다시금 일을 재개한다. 이때 모리는 8반 남학생 단톡방을 파 온갖 성 착취 영상을 공유하던 '진욱'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을 한다. 그렇게 진욱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고,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이 사회의 잔인한 현실이 드러난다.
학교,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은
『나를 지워줘』의 주인공 모리는 미성년자이며, 피해자나 가해자로 엮인 이들은 모리의 친구들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들이 밟고 서 있는 이 ‘학교’라는 공간이 사회의 축소판인 것처럼 보였다. 으레 관용어구처럼 흔한 비유로 쓰이는 말이지만, 이보다 더 적확한 게 없을 것 같다. 아버지가 검사인 가해자 진욱은 절대 권력을 쥐고 있기에 악랄한 범죄 행각을 벌여도 빠져 나갈구멍이 있다. 그러나 피해자인 리온의 엄마는 리온이 입양가족이라는 이유로 도리어 손가락질받거나, 더욱 크게 상처받을 수도 있음을 염려해 조용히 입을 다물기를 택한다.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차별과 권력 구도가 가감 없이 재현된 것이다.
모리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진욱의 실체를 밝히려 한다. 그러나 상대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아버지를 두고 있다. 모리는 “네가 도리어 죄를 뒤집어쓰고 정학당할 확률이 높다”라는 일침에 한계를 느끼며 쓰디쓴 침묵을 삼킨다. 이러한 점에서 볼 수 있듯 사회에서는 너무도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사안들이 숱하게 존재한다. 법은 피해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지만 사실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될 때가 잦은 것만 보아도 그렇다. 모리는 이에 저항하고 바꾸려 몸부림치다가도, 너무도 높은 벽 앞에서 다시금 위기에 봉착하기를 반복한다.
여기서 책의 표지에 있는 ‘줘’ 부분이 흐릿하게 표시돼 있다는, 편집적인 부분을 언급하고 싶다. 이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 마지막 힘을 끌어내어 꺼낸 외침 같다. 또 "나를 지워"라고 당연한 권리를 완강하게 외치다가도, 하릴없이 ‘줘’라는 부탁의 어미를 덧붙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이 불공평한 세계에서, 종내엔 자기 바람대로 해결되기를 바라며 타협한 셈이다. 혹은 나를 지워 달라 부탁을 했지만 일이 쉽사리 처리되지 못해, 피해자는 그 안에 갇혔다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려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책의 표지 역시 위와 같이 막막하고 답답한 현실을 철저히 재현해낸 것처럼 다가왔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호한 구분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작가는 소설 속 이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으며, 모두가 조금씩 책임을 안고 있다는 보여주기도 한다.
주인공 모리는 현재 지금은 디지털 장의사로서 활동하고 있지만, 과거 어느 때에는 야동을 즐겼던 적도 있다. 물론 야동 역시 성을 착취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불법 촬영물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는 끊었지만 말이다. 현준 역시 리온이 자살 기도를 하고 난 뒤 리온의 안위를 걱정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한때 수많은 사람을 아프게 한 지독한 악플러였다. 나아가 재이는 전 남자친구인 진욱에게 신체 일부를 찍은 영상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는 점에서 피해자이지만, 그의 협박에 못 이겨 리온을 불법 촬영하는 죄를 대물림했다는 점에서 가해자이기도 했다. 그러니 누구도 완전히 가해자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인물들이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과거와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 안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 역시 일종의 변화이고, 필요한 발전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극 중 인물들은 과거의 가해 행적이나 방관 죄가 있다는 점에서 가해자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물론 진욱과 비슷한 수위의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며, 죄의 경중은 다를지라도 말이다. 하여 모리는 가해자들이 자신에게 곤란한 질문을 할 때마다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면서 자기변명을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상황을 직면하며, 자신 역시 그 가해 사실에 대한 짐을 나눠 가진다. 그가 디지털 장의사 활동에 박차를 가한 것은 물론 어릴 적 잃어버린 쌍둥이 여동생을 찾겠다는 의지에서 기인한 거였으나, 자신 역시 조금은 해당 사회 문제의 책임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2차 가해에 관해
한편 소설에서는 현실에서 잦게 일어나는 2차 가해에 대한 내용도 등장한다. 리온이 딥페이크 영상의 피해자가 된 것을 두고, 본인이 처신을 똑바로 하지 않아서 그랬다거나, 관종이라서 그랬다는 등의 발언을 통해 말이다. 그런가 하면 ‘피해자는 어때야지’라며 피해자를 특정 틀에 가두는 시선도 있었다. 물론 모리도 2차 가해자의 위치에서 자유롭지는 못 하다. 모리는 처음에 리온이 연예인이면 그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탑재한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가해자가 가해하지 않았다면 피해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점에서 위와 같은 2차 가해 발언들은 앞뒤가 맞지 않는 비논리적인 발언임이 분명하다. 그 이전에 ‘네가 그래서 그런 거지’라는 식의 손쉬운 발언은 피해자에 대한 혐오가 내재돼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과는 무관하게 피해자에게 책임을 지우고 조롱하는 2차 가해는 손쉬운 방식으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이는 피해자를 한 번 더 상처 입고 피해 사실을 들쑤신다는 점에서 악질적이고 잔인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소설 내에서 모리의 친구 수석은 '진욱이 왜 그렇게 악질적인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두고, 진욱의 가정사를 운운한다. 그러자 모리는 분노하며, 그런 말을 일절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그렇게 했을 때 진욱이 리온에게 한 악질적인 범죄 행각이 자칫 가볍게 여겨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2차 가해를 포함한, 가해자에게서 범죄를 저지른 이유를 찾는 일 등은 전부 가해자를 옹호하거나 범죄 사실을 다소 가볍게 비치게 하고, 모종의 동정을 끌어내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현실에 맞서는 모리의 대처 방식을 통해 이는 지양되어야 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피해자인 리온에게 말을 한다. 당신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책임도 없다고. 그저 진욱으로 집약되는 모든 가해자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라고.
마치며
불법으로 유포된 성 착취물을 온전히 지우기도 어렵지만, 만에 하나 지운다고 할지라도 지옥 같던 기억이나 피해 사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책 속에서 리온이 그러했던 것처럼, 극심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그 안에 갇힌 것처럼 내내 고통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드라마 <소년심판>에서 집단 성폭행을 당한 한 아이의 사례를 생각해본다. 피해자는 법정에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라는 판사의 말에, “제 일상을 돌려주세요.”라고 했다. 가해자들이 전부 참여해 두려웠을지도 모르는 법정에서 힘겹게, 그러나 판사의 조언에 마음을 다잡으며 당당하게 내뱉은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 심판에서 해당 아이는 일상을 잃었다.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우리 엄마가 너랑 놀지 말래”라는 말을 듣거나, 본인이 피해를 보았음에도 불구 주변으로부터 손가락질받는 등 비정상적이고 잘못된 상황에 놓였으니 말이다.
이 책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해당 책에서 가해자는 떵떵거리며 산다. 종내에 진욱은 모리의 활약으로 붙잡혔음에도, 아버지가 검사라는 이유로 집행유예 처분을 받는 데 그쳤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사건의 피해자는 온갖 루머에 시달리다가 2차 가해가 남발하는 환경에서 사람들의 품평과 입방아에 오르는 것들을 오롯이 감내해야만 했다. 일상이나 웃음을 잃는 건 잔인하게도 피해자의 몫이었다. 더욱이 재이는 본인이 진욱을 쉽게 믿고 영상 촬영을 허락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등, 모든 문제의 책임을 자신에게서 찾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책을 끝까지 다 본 뒤에야 왜 작가가 '소설이 현실 같은데, 현실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고 한 지 알 것만 같았다. 암담한 건 이 소설에서는 리온만을 조명하고 있으나, 사실 피해자의 수는 상당하다는 것이다. 처음 리온에게서 의뢰받을 당시 모리는 주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은 없어 ‘충격적이었다’라고 당시 심경을 밝혔다. 그러나 사실 수면 위로 드러난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혼자서 앓고 있을 피해자들이 더 많이 존재할지 모른다. 하여 이는 누군가의 문제로 국한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분노하고 목소리를 내야 할 사안이다. 어쩌면 당연했을지 모르는, 그 '일상'을 찾기 위해 말이다. 우리에게는 사건의 심각성을 앓고 연대하는 목소리들이 더 많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추예솔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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