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마음과 접촉해서 나오는 스토리는 생명력이 있어요” -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러 설은아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의 작가 설은아와 나눈 진정한 소통 한 조각
글 입력 2022.04.19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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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소통을 주제로 작업을 해왔지만, 그때 제 개인의 삶에서도 소통되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게 됐고 제 일의 영역에서도 자본의 논리와 상관없이 반대쪽 얘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지금보다 더 귀하게 여겨져야 하는 것들에 대한 소통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런 생각의 연장선으로 나온 주제가 '소외된 소통'이었고요. 우리가 하지 못한 말들은 어디로 가는 건지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 인터뷰 中

 

크리에이터로서 '소통'을 메인 주제로 삼아왔던 설은아 작가는 국내 웹아트 1세대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1999년 ‘플래시’라는 프로그램에 인터랙티브 기능을 도입한 독보적인 콘셉트의 웹사이트 ‘설은아닷컴’으로 유명해졌으며, 이후 ‘포스트비쥬얼’이라는 디지털 광고대행사를 만들어 다양한 기업, 브랜드의 웹 디자인 및 영화 사이트 작업을 진행하여 화려한 수상 이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를 이토록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한 동력은 ‘재미’였다. 그는 인터넷처럼 모두 연결돼 있는 소통 그 자체에 DNA적으로 반응한 사람이었으며, 디지털 패러다임에서의 진정한 소통의 방식을 끊임없이 탐구하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다. 진심으로 좋아했던 것들을 쫓아 부지런히 달려온 지난 과거를 회상하며 그는 “되게 재미있었어요.”라는 말을 틈틈이 덧붙였다. 그때마다 그의 눈빛은 반짝거리고 일렁였다.

 

최근엔 20년간 재직했던 일을 떠나, 그동안 꿈꿔왔던 작가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시도로 소외된 소통을 주제로 한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를 선보였다. 2018년 12월부터 시작된 이 전시는 2021년까지 3년간 ‘부재중 통화’라는 이름으로 약 10만 통의 목소리를 모았으며, 최근 해당 전시를 엮은 에세이집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이 출간되었다. 책에는 부재중 통화의 기록, 전시 기획 배경 및 과정, 전시장의 풍경이 담겨있으며 전시에 남겨진 그날의 온도의 여운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다.

 

책 출간 이후 수줍음과 떨림을 안고서 설은아 작가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껏 그의 인생을 훑는 대화는 많이 나누었지만 작가로서 인터뷰는 처음이라고.

 

 

 

PART 1: 좋아했던 순간을 쫓아 나다움을 발견하다



“진정한 소통 한 조각이 이 세상을 혹은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몽상가이자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러, 설은아입니다.”

 

그가 40이 되던 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팀장, 실장이라는 직책 말고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하나의 게임 세계라면 난 어떤 캐릭터의 사람일까’하며. 고민 끝에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러'라는 캐릭터를 탄생시켰고 그만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서 유의미한 파동을 만들고 있다.

 

 
“저는 가장 보편적인 것 안에 가장 귀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전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있는 얘기들이 가장 궁금해요. 지금 동시대에 펼쳐진 이야기들이 언제나 가장 생명력 있는 진짜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그런 것들이 다루어지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제가 각자의 삶 안에 이미 존재하는 귀한 스토리들을 담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 의미로 저를 이야기를 하는 스토리텔러가 아니라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러라고 소개하는 거예요.” - 인터뷰 中
 

 

20년간 포스트비쥬얼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셨어요. 직접 회사를 세우고 진행한 일들은 어떠셨나요?

 

초창기에는 정말 재밌어했던 것 같아요. 모든 열정을 다 바쳐서 했고 미친 듯이 일하던 시절이었어요. 젊어서 그런지 그때 제 캐릭터는 전사라고 생각했어요. ‘이 필드에서 나는 전사다, 나는 언제나 승리한다’라고 생각하면서요. 그리고 지금 봐도 그때 제가 좋아하는 작업들이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한 작업 중 가장 애정 하거나 기억에 남는 게 있을까요.

 

사람들이 모두 다 좋아하는 작업 중에도 있고, 제 가슴속에서 되게 상징적인 작업들, 특히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랑 연결되는 상징적인 작업들이 있어요.

 

일단 사람들이 가장 좋아해 줬던 건, 광고상을 받기도 한 ‘4인용 식탁’이라는 영화 사이트 작업이었어요. 그 작업할 때 너무 신났거든요. 매일 늦게 집에 갔지만 그다음 날에 빨리 회사에 가고 싶었어요. 빨리 그 작업을 너무 하고 싶어서. 사실 제가 영화 사이트 작업들은 너무 좋아했어요. 왜냐하면 영화는 어떤 스토리텔링이 있잖아요. 이미 만들어진 훌륭한 스토리(영화)에 인터랙티브를 가지고서 재구성하는 것이고요. 가장 제가 흥미로워했고 제 끝까지 보여줄 수 있었던 작업이었던 것 같아서 영화 사이트 작업들은 다 좋아했고요.

 

이후에 상업적인 작업들 중에서 몇 가지를 고르라면, 예전에 박지성과 나이키에서 했던 작업이 있어요. 당시 박지성이 유럽에서 부상당하고 고전했을 때 한국에서 박지성을 조명하고 싶었는데, 그때 했던 3d 애니메이션과 디지털 캠페인 작업이 있거든요. 불가능했던 상황이었지만 정말 최고의 퀄리티를 내기 위해 모든 스텝들이 뭉쳐서 한 과정이 생각나고, 그 작업은 지금 봐도 이걸 우리가 과연 할 수 있었던 작업인가 싶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었어요.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작업 중에는 영화 <주홍글씨> 사이트를 만드는 작업이 있는데요. <주홍글씨>의 주제가 '어긋난 사랑의 상처'예요. 제가 맨 마지막에 사람들이 참여하는 인터랙티브 게시판 부분을 작업했거든요. 처음에 게시판을 들어가면 화면에 이렇게 떠요.

 

"우리는 사랑을 합니다. 때로는 설레이게, 때로는 폭풍처럼, 때로는 치명적으로… 당신은 이런 사랑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어요. 그리고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면, "당신도 어긋난 어떤 사랑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경험이 있습니까 또는 누군가에게 가슴 아픈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둘 중에 선택하라고 해요. 선택해 보세요.

 

어렵네요. 이거 밸런스 게임 같은데요. 음 저는 상처받은 쪽이요.

 

상처를 준 적과 받은 적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누르면, "지금 당신이 상처를 받은 사람을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의 이름과 그 사람에게 현재 하고 싶은 말 한 마디를 적어보세요."라고 나와요. 이름은 이니셜로 써도 상관없어요. 문득 딱 떠오르는 말, 또는 지금 전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어려운데요’를 몇 번이고 되뇌다) 난 잘 살아.

 

좋아요. 그 사람의 이름을 abc 이렇게 적고 "나는 잘 살아"라고 <오케이>를 딱 눌렀어요. 그러면 화면이 쫙 펼쳐지는데요. 예를 들면 그 사람 이름이 조그맣게 쓰여 있고 "난 잘 살아"라는 말이 가장 가운데 뜨고요, 똑같은 걸 선택했던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상처를 받은 다른 사람들. 그 사람들이 썼던 말들이 한 화면에 같이 쫙 떠요. "난 잘 살아" 말고도 "이 미친놈, 잘 살아라" "결혼했냐" 등등.

 

그렇게 '이게 뭐지'하면서 한 10초 20초 정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옆에 땡 하고 메시지가 나와요. "지금 abc 님 그분이 당신에게 말을 남겼습니다." 그럼 <확인하러 가기> 버튼이 떠요. 딱 누르잖아요, 그럼 아까 2개 선택지<상처 준 적/ 상처받은 적>에서 <상처 준 적> 버튼을 선택한 사람들의 보이스가 쫙 떠요. 그 수만 개의 보이스들이. "미안해" "잘 살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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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주홍글씨> 사이트, 당신처럼 상처받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설은아

 

 

제가 그 게시판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수많은 사람들의 보이스가 올라오는 걸 보면서 제가 만들었지만 저조차도 계속해서 보게 되더라고요. 보통 다른 사이트를 만들었을 때는 "사이트가 너무 좋습니다." 이런 얘기를 듣다가 이 작업을 하고서는 개인 메일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어제 누구랑 헤어졌는데 이걸 오늘 2시간 동안 봤습니다."

 

저는 이걸 하고 알게 된 거예요. 사람들은 그냥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서 남긴 말이 아니에요. 근데 위로가 되는 거예요. 진짜 나랑 비슷한 감성을 느낀 사람들, 그리고 그 반대 사람들. '우리'라는 울림.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말이지만 그곳 게시판에서만큼은 우리 모두 연결돼 있는 거죠. 그 프로젝트가 되게 제 기억에 오래 남아 있어요. 그리고 그 안에 내가 가장 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어떤 로직이 숨어 있다 생각했죠. 이게 내가 가장 원했던 소통 방식이다라고요. 그게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와도 연결되는 부분이고요.

 

어쩌면 마음속에 남아있던 프로젝트가 지금의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의 시초이자 연장선이었네요.

 

근데 그때는 이렇게 지금의 독립적인 프로젝트를 기획할 거라는 생각은 없었고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순간이 뭐였을까 생각하다 계속 이 프로젝트가 떠오르더라고요. 저를 가장 울렸던 프로젝트였고,'나다움'이라는 게 거기 있구나라고 생각했었어요.

 

 

 

PART 2: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에 담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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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석파정 서울미술관, 2019 ⓒ설은아

 

 

"차마 말하지 못해 

부재중 통화가 되어버린 이야기, 

당신에게도 있나요?

이제 누군가는 들어주었으면 하는

당신의 '하지 못한 말'을 남겨주세요.

당신의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그 어떤 말도 괜찮습니다."

 

- 공중전화 부스 안 젹혀있는 내용

 

 

전시장에 설치된 공중전화 부스. 이곳에선 요금을 넣을 필요도, 전화번호를 누를 필요도 없다. 그저 수화기를 들고 하고 싶은 말을 남기면 된다. 이제껏 차마 하지 못한 말들, 그러나 누군가는 들어주었으면 하는 이야기. 남겨진 이야기들은 공중전화 부스 밖 아날로그 전화기에 전달되어, 우연히 수화기를 든 누군가에게 랜덤하게 전달된다.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로 독립 작가로의 활동을 시작하셨어요.

 

제가 설은아 닷컴 이후 포스트비쥬얼에서 창조 활동을 충분히 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개인 작업을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어요.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게 한 마흔 정도였던 것 같아요. 정말 어느 순간. 그러고 나서 "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을까"라고 생각했을 때 되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면 하나가 있었어요.

 

어떤 장면인가요?

 

<화양연화>라는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왕조이가 앙코르와트에 가서 혼자 아무도 없는 돌구멍에 말을 쏟아내요. 목젖이 막 울리는데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 않아. 근데 뭔가를 막 쏟아내. 비밀을 속삭이는 장면을 가까이서 보여주다가 원경으로 보여주는데, 원경에서는 어린 동자승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요. 그리고 한참 동안 그걸 남긴 왕조이가 진흙을 퍼서 구멍을 막고선 가요. 당시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고서 가끔 그 장면이 생각나는 거예요. 인간의 이런 행위는 뭘까.

 

그 질문에 대한 결론은요?

 

모르겠어요. 저는 그 영화 안에 담긴 감성이 너무 좋더라고요. 인간의 저런 행위는 뭘까 하면서도, 되게 아름답다고 느껴지기도 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가 그 마지막 장면 때문에 전설이 됐다고 생각하거든요.

 

왜 마지막 장면이 아름답다고 느꼈을까요?

 

간직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그러다 결국은 그 마음을 자유롭게 털어놓은 거고요. 혼자만의 의식으로. 시간이 지나보니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곳, 이런 구멍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저는 그런 행위가 진정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허용이자 사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책에서도 말씀하시잖아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자유롭게 허용되는 공간. 어떤 비난이나 충고 없이 우리의 얘기를 들어주는 곳. 그런 공간이 세상에 하나쯤 있으면 어떨까요?”라고요.

 

크리에이터로서 '소통'이 언제나 저의 메인 주제였어요. 인터넷, 우리 모두 연결돼 있는 소통 그 자체에 이미 DNA 적으로 반응한 사람이었고요. 계속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러로서 광고 활동도 많이 했고 되게 재밌었어요. 왜냐하면 광고는 지금 살아있는 가장 날 것의 욕망을 다루는 일이거든요. 그리고 거기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수많은 브랜드를 통해 살아 있는 날것의 욕망들을 만나고, 그 욕망들을 어떤 관점으로 세팅(설정)해서 매력적으로 소통할 것인가, 이걸 계속 다루는 일이었죠. 다시 말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일이었고요. 그래서 전 이 일 자체가 정말 재밌었어요. 되게 좋아했고요. 그러니까 오래 했겠죠.

 

근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광고는 돈과 연결된 자본주의 산업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어찌 됐건 각광받는 소통만을 다뤄요. 그 관점만을 원해요. 밝은 것, 좋은 것. 그것을 소재로 굉장히 다양한 소통 방식을 시도해 봤어요. 항상 내 안에 좋은 면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것을 해봤지만 사람이 그렇게만 살 수는 없거든요.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저도 항상 부정적인 부분을 인정하지 못했고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그런 감정이 너무 커져서 저를 완전히 확 덮친 날이 있었죠.

 

그래서 인생이 바닥을 치게 되었을 때, 나의 반대면을 허용할 수밖에 없고 그저 바라보게 되는 시간을 갖게 됐어요. 지금껏 나에게 하지 못한 말, 내가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들여다보았죠. 사실은 진짜 이해받고 허용 받고 사랑받고 싶었던 애들은 나의 반대면이었던 것 같아요. 그것까지 내가 사랑해 주고 허용할 수 있을 때 그때 내가 진짜로 더 사랑받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래서 소통을 주제로 제가 광고에서 다루지 못했던 반대편 이야기들이 주인공이 되는 장을, 그것들이 정말 아무 비판 없이 ‘괜찮아 모든 게 괜찮아’하고 허용되는 장을 만들고 싶었어요.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라는 이름의 전시를 통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자유롭게 허용되는 공간을 만드셨어요. 실제로 그곳에 정말 많은 분들이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남겨주셨고요. 해당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작가님은 꾸준히 수많은 목소리들을 들으실 텐데 어떤 마음이셨을지 궁금해요.

 

전 이 작업을 하면서 너무 감사한데요. 언제나 이 작업의 주인공은 목소리를 남기고 공유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뜸을 들이며 조심스럽게) 사실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힘든 느낌이라기보다는요, 그냥 너무 애틋했어요. 그냥 다들 이렇게 살고 있구나, 나뿐만이 아니구나. 머리로는 알죠. 다들 힘든 일이 있겠지 하고요. 하지만 확인해 볼 수 있는 길은 없었거든요. 근데 각각의 이야기들이 어떤 물리적인 목소리나 형태로 드러났잖아요. 처음으로 보이지 않던 진실들을 마주하는 경험을 해 본 거고요. 전 좀 되게 애틋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책에도 썼지만, 목소리를 들을 때 평상시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어요. 아마 전시장에 가서 수화기를 들어보면 누군지 모르는 누군가가 너무나 진심을 쏟아내고 있는데 나는 거기서 그냥 들어주는 사람이 돼요. 하지만 실제로 정말 많은 목소리가 들어와서 모두 다 듣는 건 저에게도 너무 힘든 일이라 띄엄띄엄 에너지가 좋을 때 듣고, 그다음에 텍스트화해서 텍스트로도 보면서 마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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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석파정 서울미술관, 2019 ⓒ설은아

 

 

해당 전시에서 작가님의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이야기 플랫폼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플랫폼의 구조를 잘 짜고 만드는 사람, 가장 적절한 온도와 방법으로 세계관을 잘 짜는 사람이 저인 것 같아요. 그게 제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자 역할인 것 같고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릇에 담길 수 있도록 하는 게, 제가 앞으로도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에요. 살아있지만 곧 사라져버릴 수많은 스토리들, 사람들 내면에 있는 소중한 이야기들이 흩어져 버리지 않게 계속 데이터화해서 모으는 역할을 앞으로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 삶의 진실과 가까운 질문들을 던지고 싶어요.

 

그게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러로서의 최종 목표이자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겠네요.

 

네. 계속 그 일을 하고 싶어요.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도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러의 일환으로 진행한 첫 번째 프로젝트예요. 사람들이 그냥 평범하고 뻔한 것을 남기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잖아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사람들이 진심으로 마음과 접속해서 지금 말을 뽑아내요. 마음과 접촉해서 나오는 스토리는 생명력이 있어요. 펄떡거려요. 그런 이야기들이 정말 귀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있는 스토리는 표현과 상관없이 이미 그 자체의 에너지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첫 작업을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를 하고 두 번째로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진행했는데요. 두 번째 프로젝트에 담긴 글들도 "어떻게 이런 표현들을 하지?"하는 생각들이 참 많았어요. 저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과 접촉했을 때 그런 독창성이 나오는 것 같아요. 그게 본질인 것 같아요. 우리 안에 창조적이고 예술가적인 면모가 모두에게 있는 것 같고요.

 

※ 두 번째 프로젝트,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는 미러 디스플레이 테크놀로지를 활용하여 제작된 인터랙티브 거울 앞에서 내면의 나와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작업이다. 거울 앞에 서면 한 개의 질문이 떠오른다. "만약 당신을 이 세상의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은유한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함께 질문에 대한 각자만의 답을 작품으로 남긴다. 작품은 인스타그램 계정 @mirror_portrait에서 확인 가능하다.

 

질문은 내면의 이야기를 꺼내게 하는 아주 좋은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앞서 주홍글씨 게시판을 만드실 때도, 이후 작가가 되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계속해서 질문을 생각하고 던지시네요.

 

맞아요. 저는 질문에 힘이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질문을 던짐으로써 나의 답변은 뭘까를 생각해 보게 되잖아요. 저는 생각나는 질문들을 가끔 써보기도 하고 그래요. (주섬주섬 바구니에 편지 형태로 접은 다양한 색의 쪽지들을 보여주며) 이게 다 제가 써놓은 질문 종이에요. 하나 펼쳐볼까.

 

<남들의 시선과 상관없이 가장 당신이 좋아하는 어떤 한 장면 또는 어떤 순간은 언제인가요?>

 

제가 되게 많은 질문들을 생각하고요. 그러고 나서 가만히 놔둬요. 지금은 너무 하고 싶지만 아직은 그 주제가 너무 무거워서 소화 못하는 질문들도 있고, 내가 다루기에는 아직 준비가 안 돼서 나중에 다뤄보자 미룬 질문들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어요. 지금도 계속 수면 위로 나올랑 말랑한 질문들이 몇 개 있거든요. 질문 자체로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때가 되어 더 큰 중력으로 나한테 다가오면 세상에 얘기해야지 하면서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살려놓고 있어요. 항상 그 사람의 가장 진실을, 그 사람 또한 진실을 보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어요. 다시 안으로, 본질로 향하게 하는 그런 질문들이요.

 

 

 

PART 3: 차마 하지 못한 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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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퍼포먼스 필름 ⓒ설은아


 

전시가 끝나면 수화기 안에 남겨진 이야기들을 세상의 끝에 놓아주는 의식이 진행된다. 2018년 처음으로 모여진 부재중 통화들은 2019년 지리적 세상의 끝인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의 바람 속에 자유롭게 놓아졌다. 이후 작년까지 모인 통화들을 놓아주기 위해 2022년 4월, 두 번째 세상의 끝, 사하라 사막으로의 여정을 떠났다.

 

작가님이 ‘세상의 끝’으로 선정한 곳에는 어떤 공통된 특징이 있을까요?

 

세상의 끝을 선정하는 기준은요, 저에게도 하지 못한 말이 있잖아요. 저한테도 연약하고 아팠던 말들. 그래서 혼자 끌어안고 있었던 말들. 그 말들이 이 세상 어디에 있다면 내가 가장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내 마음이 거기에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곳, 그러니까 되게 고요하고 청정하고 아름다운 곳에 그런 이야기들을 놔두고 싶더라고요.

 

약간 고요하고 청정한 곳은 목소리가 더 깊게 울리는 효과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그곳의 자연이 알아서 보살펴 줄 것 같아요.

 

연관된 질문으로, 이야기를 놓아줄 다음 세상의 끝도 정하셨을까요?

 

작년까지 모인 목소리는 모두 사하라에 놔줄 거고요. 이제 새로운 세 번째 세상의 끝이 필요한 시점인데요, 이번에는 청명한 아이슬란드의 오로라 빛 속에 놓아주려고요.

 

보통 목소리를 놓아주는 데 얼마나 소요되나요?

 

아까 정리해 보니까 분량이 300~ 400시간 정도 나오더라고요. 이 분량이면 10박 11일로 여행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24시간 틀어도 모자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스피커를 5대를 가져가는데, 한 대에 한 60~70시간 정도의 분량을 다 넣어가지고 가요. 그래서 사막에서 20시간, 나일강에서 20시간, 그리고 여러 고대 유적들이 놓여있는 곳에서 또 20시간 등등, 장소를 다르게 이동해 가면서 목소리를 놓아주려고요.

 

보통 목소리를 틀어 놓으시고 잠자코 들으시나요?

 

그렇죠. 그들의 이야기를 그냥 가만히 들어요. 이야기 하나하나가 다 생명이자 에너지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곳에서 제 역할은 하나하나의 에너지들을 듣고, 이 자연이 들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 그렇게 자연적으로 흩어졌을 때 실제로 말한 사람들도 그만큼의 홀가분함이 깃들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수화기로 모인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때와 광활한 자연 속에 흘려 보내며 들을 때 마음은 또 다르군요.

 

그렇죠. 그냥 이제는 놔주는 거죠. 자유롭게.

 

세상의 끝에서 작가님이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지금 당장 생각나는 말도 좋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다 눈을 조용히 감고서) “네가 계획한 일들에 대해 약간의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알고 있어. 약간의 무게감을 느끼고 있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네가 원했던, 가장 너라고 믿었던 그 모습, 그 벌거벗은 모습을 그냥 용기 있게 계속 가보자. 괜찮아.”

 

어떤 마음으로 남기신 말일까요?

 

사람들의 얘기를 다 가지고 간다는 게 너무 뿌듯하고, 내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으면서도 동시에 약간의 부담감도 있거든요. 하지만 부담감을 느끼는 건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인 것 같고요. 그런 걸 빼고 나만 바라보면요, 나 스스로에게 직접 물어봤을 때, 저는 더 용기 있게 그냥 하고 싶거든요. 내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 내가 나라고 믿었던 걸 용기 있게 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그냥 “괜찮아”라고 얘기해 주고 싶어요.

 

부재중 통화로 담긴 목소리들에게 또는 앞으로 남겨질 목소리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사실 이 질문에 대해서 가만히 생각해 봤어요. 차마 하지 못한 말들에게 내가 남기고 싶은 말들, 앞으로 나에게 있을 하지 못한 또 말들이 나도 생길 텐데, 그런 말들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을까 했을 때 되게 심플한 말들이 생각나더라고요.

 

"괜찮아."

 

사실 사람들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괜찮아" 하고 자기 스스로를 안아주는 행위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것 자체로 그 사람에게서 허용 의식이 90퍼센트 이상은 다 완성됐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미 완성된 것을 나에게, 내 이야기를 듣게 될 누군가에게, 그리고 대자연에게, 그러니까 세 번의 허용 의식을 통해 자유롭게 해주는 거죠.

 

 

 

PART 4: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작가님이 생각하는 진정한 소통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인가요?

 

저는 수많은 소통 중에 진정한 소통이란 그냥 순리에 따르는 소통인 것 같아요. 현재 내 마음을 지나가고 있는 파동과 흐름이 있잖아요. 어떤 상황에서는 거스르는 것들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것들도 빨리 풀려나갔으면 좋겠어요. 머리로 분별해서 나쁘다 조작하지 않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 내 마음에서 느끼고 있는 그것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저는 진정한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막힌 것들을 흐르게 하는 소통의 장을 만들고 싶은 거고요. 저 스스로하고도 계속 더 솔직해지고 싶고.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 혹은 그게 불편한 감정일지라도 그대로 흐르게 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겨진 귀한 이야기들을 두드릴 예정이라고 하셨어요. 이를 위해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요?

 

사실 책을 출간하는 과정 자체도 저한테 하나의 큰일이었거든요. 일단은 사하라를 갔다 오면 스스로에게 "너무 수고했다" 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요. 그냥 그렇게 한참 널브러져 있다 보면 그 널브러짐이 달콤할 때가 있고, 어느 순간 싫어질 때가 있잖아요. 그런 고통이 오면 그때 "그럼 다음에 뭐 하고 싶어?" 물어보려고요. 그래서 그 다음에 하고 싶은 거 하려고요.

 

좋네요.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설은아,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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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퍼포먼스 필름 ⓒ설은아

 

 

사실 진정 내가 원하는 건 딱 두 가지뿐이구나.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충분히 사랑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표현하는 사람이 되는 것,

나머진 모두 장식일 뿐이구나.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설은아 213p)

 

 

나에게 다가온 작업,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덜 주저하고, 솔직하고 용기 있게 사랑한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


p.s. 책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속 작은 파동으로 다가온 누군가의 '하지 못한 말'을 남겨본다.

 

 

(침묵 후 통화 종료)

- 다수의 부재중 통화

 

세상에서 제일 안쓰럽고 제일 잘됐으면 하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고, 사랑하지는 못해도 아끼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 44,187번째 통화

 

저는 우는 어른이 되려고 해요. 저는 우는 게 힘들면서도 좋고 또 울음으로써 내 모든 게 터지는 기분이 들어요. 어른이 되면서 점점 우리는 울음을 참아야 하잖아요. 근데 저는 그런 세상에 맞춰가지 않고 계속해서 우는 어른이 되고 싶어요. 

- 53,992번째 통화

 

꿈이 없이 걸어가도 괜찮을까. 앉아 있지만 말아줘. 

- 46,998번째 통화

 

늘 불안한 내 삶이라 여기고 버텨왔으나, 정작 그 불안함의 출구는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냥 불안할래요.

- 72,801번째 통화  

 

-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中

 

 

*

 

 본 인터뷰는 설은아 작가님의 작업실에서 이루어졌으며,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지키며 안전하게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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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현장 ⓒ설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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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송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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