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 소설 '나를 지워 줘'

소설 '나를 지워 줘'
글 입력 2022.04.1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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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떠올랐다. 소설 끄트머리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 사건을 지켜보며 대대적인 수정 작업을 거쳤기에 유사성은 당연하겠다. 게다가 현실에서 똑 떨어져 독립적으로 탄생할 수 있는 창작물은 없다. 창작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이 하는 것이고, 우리는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을 겪고 부딪히고 아파하고 모이고 흩어지므로.

어떤 유형의 범죄이든 창작물에선 대개 극을 이끄는 주인공이 사건의 피해자인 게 흔하다. 1인칭 관점에서 한 사람을 깊게 파고들어야 그 사람의 상태, 감정, 생각, 느낌, 그리고 선택을 관객이 쉽게 몰입하고 이해할 수 있으니까. 다만 이 과정에서 만연한 편견 또한 담겼다는 게 문제다.

특히 영상처럼 구체적 이미지를 그리는 매체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를 테면 피해자의 고통을 자극과 쾌락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게끔 가해자 시선에서 그린다거나 가해자를 가해자답지 않게 그린다거나. '악마', '사탄', '공포감과 두려움을 일으키는 존재', '몬스터' 따위의 명칭을 붙여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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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텍스트로 이루어졌으니 이러한 위험성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소설 주인공은 사건의 피해자가 아닌 주변인 둘의 교차로 이루어졌으니 얘기가 달라진다. 직접 겪지 않은 이의 묘사, 특히 당사자성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중요한 순간에 중요한 맥락을 결여한다고 본다. 그저 타인의 고통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끼고 분노하는 것과 나 또한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경각심 내지는 공포감을 가진 것은 꽤 다른 이야기가 될 테니.

그래서였다. '강모리'라는 캐릭터가 디지털 장의사 역할을 자처해가며 불법 촬영물을 지우는 열일곱 남자아이라는 사실에 다소 의아함을 느낀 건. 어떠한 성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자격 운운하는 게 아니다. 인물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혹은 사람들을 위해 나서는 타당한 이유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고 느꼈다. 더 나아가, 피해자들이 겪은 일은 자신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고 선 긋는 느낌도 받았다. 흐름 전체를 이끌어 가는 캐릭터를 조금 더 섬세하게 다루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메인 캐릭터에 대한 감상은 이쯤 하고, 우리에게도 무척 익숙한 프레임 씌우기를 말하고자 한다. 차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피해자 다움'이다. 사건의 뿌리는 가해자인 진욱에게 있으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거나 깨닫기는커녕 생존 피해자에게 검열의 잣대를 들이민다. 진짜 피해자 맞아? 근데 이렇게 당당할 수 있어?

저 말을 뒤집어 보면, 사회에 만연한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다. '끔찍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피해자는 당당하게 자신의 욕구를 요구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이다. 살고자 하는 의지와 의미를 잃어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억지로 이겨낸다.' 순진무구한 생각의 맹점은 피해자를 진단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함이다. 몸소 겪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제쳐두고서도 무슨 근거로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라 확신하는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상황 하나만 가정해도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먹는 것만 해도 매운 걸 찾는 사람, 단 맛을 찾는 사람 등이 갈릴 테고 그 카테고리 안에서 어떤 음식을 택할지도 달라진다. 여기에 개개인의 성향과 기질, 성격까지 고려하면 'A는 B다'라는 결론을 내기엔 근거가 턱없이 부족하다. 가까이에서 그 사람을 오래 보아온 사람도 판단하기 어려울 문제를 제삼자가 단언할 수 있는가.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걸 하나의 의무감으로 치부해 피곤하다고 느끼는 이들도 심상치 않게 보인다. 무언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건 노력이 필요한 일이긴 하다. 그러한 노고를 들일 엄두가 안 난다면, 나 자신을 위한다는 이기심으로 똘똘 무장하자. 변화가 없다면 다음에도 비슷한 일은 벌어진다. 이번 일의 당사자는 내가 아니었을 뿐, 미래엔 내가 제삼자에 머물러 선택권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내게 고통스러운 미래를 만들지 않기 위해 지금의 내가 '다음'을 막는 데에 함께 한다는 논리.

그러나 애석하게도 변화의 기점은 누군가의 희생에서 시작된다. 현실을 담은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딥 페이크 영상으로 온갖 조롱과 루머에 시달리던 리온은 스스로 생을 끝낸다. 이마저도 그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라고 할 수 있을까.

언젠가 보았던 동물 영상이 떠오른다.

나무늘보를 뒤쫓던 퓨마. 속도는 느려도 나무는 잘 타는 덕에 간신히 퓨마의 발끝에 닿지 않았다. 하지만 나무늘보를 잡아먹을 생각뿐인 퓨마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나무에 제 뭉툭한 발톱을 갈아 날카롭게 다듬는다. 그리고 나무늘보를 쫓아 올라가 제 이빨로 콱, 문다. 네 발을 모두 나무에서 떨어뜨려 나무늘보가 온전히 제 무게를 감당하도록. 그러다 끝내 감당하지 못하도록.

마지막은 나무늘보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잡혔다. 생리적 아픔 때문인지, 죽음을 직감해서인지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나무를 붙들고 있던 팔을 놓으며 눈을 감던 그 모습. 그들은 먹이사슬 관계이자 자연의 이치라고 바라보기엔 너무도 우리가 사는 세상 사람들과 닮아서, 이토록 오래 기억 남는다.
 
 
진욱에게 사연이 있다고 해서 잘못이 저절로 용서되지는 않았다. 용서받아서는 안 된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리온이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순간을 되돌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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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한다. 진욱은 잘잘못을 가리기 의미 없을 만큼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반면, 재이는 상황이 좀 더 복잡하다. 진욱의 협박으로 생존 피해자이면서 리온에겐 또 다른 가해자가 된 재이. 모든 원흉은 진욱이긴 하나, 그렇다고 한들 재이의 잘못이 사라지진 않는다. 잘못에는 면죄부가 없기에.

그럼 가해자는 피해자를 만들고, 피해자는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고, 삶을 스스로 끝내는 악순환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가. 시작과 끝이 없는 매듭은 한 지점이 끊어지면 인위적이긴 해도 시작점과 끝점이 생겨난다. 여기서 말하는 끝은 죄책감의 끝이며, 시작은 책임감의 시작이다. 죄는 사라지지 않으므로 잘못이 남긴 해도 그 후에 어떤 선택을 하고 살아갈진 각자 다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죄책감을 책임감으로 바꾸는 방향을 택하기를, 그렇게 함께하기를 바라게 된다.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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