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푸른 눈의 할머니 - 조성호의 콘체르토 플러스 [공연]

그리고 분홍색 털실뭉치
글 입력 2022.04.08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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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이른 퇴근을 맞아, 멀리 콘서트홀을 찾는 길은 행복하다. 용인에서 서초까지는 제법 멀어 서두른 걸음걸음에 고조되는 행복이 어리어 있음을 느낀다. 비록 경부고속도로는 턱턱 막히고, 강남에서 갈아탄 지하철에서는 사람들에게 부딛으며 땀을 뺐다지만 그 길은 행복이라는 모양으로 돼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모르는 중 찾은 봄이라, 이녁 즈음 하늘이 이다지 밝았던가 감탄해보기도 했다.

 

조금 일찍 도착해 예술의전당 음악당 앞의 광장 어귀에 앉아 신발을 벗는다. 하늘은 어슴푸레 지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을 쐬면서 잊고 있던 여러 가지 생의 감각들을 되새김해본다. 출퇴근길은 편도로 2시간, 과연 길어 회사와 집만을 맴돌던 일상이라, 별것 아닌 일들에도 괜히 마음이 송송거린다. 하물며 공연은 어떻겠는가. 그를 기다리는 내 마음이 어땠을지는 이쯤 되면 빤한 이야기일 것이다.

 

 

[PROGRAM]

 

요한 슈타미츠

1. 신포니아 제2번 가장조, "만하임 교향곡"

2. 클라리넷 협주곡 내림나장조

 

카를 슈타미츠

3. 클라리넷 협주곡 제3번 내림나장조

 

- INTERMISSION -

 

안토니오 비발디

4. <올림피아데> 신포니아 다장조

5. 클라리넷 협주곡 제1번 내림나장조 "산탄젤로"

6. 클리레넷 협주곡 제2번 라단조 "불사조"

 

 

간만에 찾은 홀, 규모는 체임버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에 비하여 무대는 그만큼 객석에 가깝고 더욱 아담해 연주의 소리가 가깝고도 밀도 있다. 벽에 닿아 공명하는 소리의 맛이 진득하니 좋았다. 첫 곡인 신포니아는 본격적인 클라리넷의 향연에 앞서 현악기들만으로 공연의 분위기를 환기한다. 현악 특유의 산뜻한 음색, 종일 따라다니던 편두통이 스러진다. 모든 공연에서 그랬듯, 가장 첫 구절로 터져 나오는 음률들은 놀랍도록 새로운 감각이다. 클래식 콘서트를 졸졸거리는 이유 중에 단연 으뜸인 까닭을 꼽자면, 바로 이것일 테다. 첫 선율에서만 상기되는 놀랍도록 신선한 음률의 맛. 내 귀를 맑게 씻기어 주고서 새 술이 부대에 담기면, 부대에는 조금은 낯을 씻은 익숙하고도 낯선 감정들이 자리를 바로 해 앉는다. 이건 무어라 말로 다 표현해내기가 어렵다.

 

첫 곡이 귀를 씻기어 주면, 이제 클라리넷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차례이다. 생각해보면 클라리넷이 목관악기라는 사실을 빼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클래식을 애호하긴 하지만, 알아야 할 것들은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다. 취미생활에까지 학습활동을 할애할 정도로 나의 정신은 근면하지는 못하기에, 벼락치기를 하기보다는 모르는 채로 그저 음미해보기로 하였다. 이것은 즉 문외한의 감상기이고, 클래식을 감상하는 여러 모습 중 한 개의 단편이 되어줄 것이다.

 

 

리뷰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주 영상을 가져온다.

 

 

두번째 곡은 요한 슈타미츠, 클라리넷 협주곡이다. 클라리넷이 익숙지 않으니 당연히 작곡가들도 낯설다.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발랄했다. 첫 악장은 느리지 않은 템포. 이제는 기억과 동경, 타 他의 것으로만 남아 있는 동심을 자극하는듯한 익숙한 선율이었다. 들판과 양치기 소년의 그 전형적인 풍경이 떠오른다. 낯익은 소리이고 퍽 다정하다.

 

2악장은 바닷가, 가본 적도 없는 그리스 어딘가를 떠올리게 한다. 항구의 아침, 거기엔 가로수로도 쓰일 만큼 시트러스류 나무들이 그렇게 많다던데, 시트러스 나뭇잎 풍성한 그림자 사이로 듬성하게 영근 금귤이 떠오른다. 그러한 것들로 꾸려져 있는 어느 봄 아침 09시의 정경이 공감각적으로 내 안에 들어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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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임버 오케스트라는 당연히, 대규모 관현악단에 비해 악기 수가 적어 소리의 깊이가 한결 가볍다. 그러나 그래서 각 악기의 소리와 개성이 뚜렷이 닿는다. 각 악기가 내는 소리를 실에 갖다 대어 보자면 더욱 굵직굵직하게 얽어 있는, 할머니 스웨터 같다. 음들의 사이사이에서 자맥질하는 베이스 음들을 추적하며 듣고 있자면 마치 할머니 스웨터가 탄생하는 과정을 보고 있는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클라리넷은 그 굵고 탐스러운 분홍색 실뭉치 위에서 조잘거리는 할머니들의 수다 같기도 하다.

 

세번째 곡, 카를 슈타미츠의 클라리넷 협주곡에서는 특히, 계단을 타고 오르는 클라리넷의 음계에서 귀를 잡아당기는 무언가를 느낀다. 본 연주자의 개성인지 이 악기가 갖는 보편적 매력인지는 다 모르겠지만, 빠른 스타카토로 타고 오르는 음계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뚜렷한 상승의 감각을 받는다. 그러나 이 악기가 가지는 고유의 음색, 그것이 불러일으키고 구성해낼 만 한 문화나 정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대단히 아쉬울 따름이었다. 음은 언제나 내면 심상에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불러일으키고 구성함으로써, 가닿아 본 적 없는 정경을 만들어주기에 그렇다.

 

클라리넷의 목소리, 그것은 마치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어느 자애로운 푸른 눈의 할머니 같다. 푸른 눈의 할머니라니… 그녀와의 아무런 추억도 없는 나로서는 잘 이입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할머니의 손을 잡고서 내가 무슨 말이나마 풀어낼 수가 있을까. 내게 있어 할머니는 회색 머리에 졸리운 까만 눈동자, 뽀글이 파마를 하고 핫핑크색 몸뻬를 입은 존재의 원형을 가진다. 비유인즉 이 음악이 어울려봄 직한 문화와 기억, 그 위의 감정 등이 부재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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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리넷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으면, 돈후함, 풍부함, 자애, 넉넉함, 졸림, 느긋함, 서두르지 않음 등의 키워드가 구름처럼 피어난다. 특히 장조계의 그 밝고 명랑한 선율 위에 턱을 괴고 있어서 더욱 그런 듯하다. 낯설기만 한 속성의 것들이 담겨 있는 방울방울들을, 나는 턱을 괴고서 툭툭 건드리곤 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어느새 접어든 3악장이 내 안으로 들어와, 삐뚤삐뚤 그려본 어리숙한 초원에는 멋대로 스위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진다. 게임과 PC방, 어두운 밤의 교실과 학생들로 빼곡히 차 있는 대강당 도서관에서의 야간자습으로 점철된 내 오랜 기억들이 풍기는 냄새와는 거리가 아득 멀다. 이런 것들이 아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한국의 아이로서는 당연한 감각상태이기도 할 터. 그래서인지 요즘은 여러 예술 장르를 돌아다니며, 서로 간 심상의 기억을 공유해줄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경험을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말했듯 내가 가진 경험과 유산으로서의 심상이 갈증을 일으키는 까닭이다.

 

모든 예술은 무언가를 표현하는 행위이다. 수단과 도구가 무엇이냐에 따라 수많은 분화가 일어날 테지만, 드러내고 표현하고 구성코자 하는 것, 무언가를 형상화하는 일이라는 점에선 꼭 같을 것이다. 바이올린이건 클라리넷이건 피아노건 그 악기를 연주하는 솔리스트들이라면 누구나 선보이는 미간의 찌푸림과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몸은 그 방증이다. 쉴 새 없이 표현하는 그 몸을 보고 있으면 조금 아쉬워지는 까닭이란, 그가 지금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에까지 내가 아직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음색과 선율이 안길만한 모종의 감정, 풍광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어떤 음악을 듣건 내게 떠오르는 질문이다. 인간의 감정이 예술을 발생시키고 그 예술이 다시 다른 이에게 닿아 감정을 이끌어낸다는 것, 이것이 예술의 의의라면, 공연 행위는 그 감정을 그려내 펼쳐 보이는 작업. 한편 글, 그림에 비해 음악은 직관성과 지시성이 약하다고 느끼는바, 내게 더 많은 상상을 요한다. 이제 음이라는 비유에서 어떠한 감정과 그 감정을 느끼는 한 사람의 면모를 내가 그려내기 위해서는 이 음악에 걸맞는 공간적 배경이 필요하다. 심상의 도화지를 골라내 마음이 더없이 족하면, 그때야 그 위로 선율의 스케치가 착상한다.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으니, 너와 나의 접선 장소, 소개팅 장소, 너와 내가 만나서 접점을 이룰만한 공간이 어딘지는 차차 알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제 겨우 너의 목소리를 듣고선 성격 정도나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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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리넷과의 첫 만남. 클라리넷의 목소리가 고음역대에서 놀기 시작하면 신기한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음은 고음역대에 가닿을수록 날이 서고 카랑카랑한, 드높고 센치한 속성을 갖게끔 된다고 생각하는데, 클라리넷의 '포근한 보자기에 덮인' 소리에는 이러한 엣지, 주의를 한 번에 몰입시키되 긴장을 유발하는 날이 서려 있지 않다. 푸근함이 부족한 예민한 젊은이로서는 찰싹 공감 붙지 않는 속성의 소리, 나중에 어느 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싫어도 세월에 얽혀 푸근해져 버리는 날이 오면 달리 들릴까, 이런 실 없는 생각도 다 해본다.

 

마지막 곡, 비발디의 '불사조'는 단조계 구성이다. 비장하고 장엄한 선율, 나른하게 녹아 있는 의식이 다시 제 형상을 찾아갔다. 여전히 악색은 포근하지만, 그래서 새롭게 들리기도 한다. 이미 이미징과 표현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은 터라 마지막 곡은 의식의 붓을 놓고 온전히 감상만 했다. 온전한 감상의 평은 늘, '좋았다.' '너무 좋았다'가 되곤 한다. 마지막 악장, 바이올린의 악적 공세에 맞서 클라리넷이 현란하게 춤춘다. 서로의 스텝이 교차하고 맞물리며 음계를 따라 내려가는데, 강렬한 마무리를 향해 달려간다.

 

앵콜곡은 gabriel's oboe, 넬라판타지아로 알고 있던 곡이다. 밤은 이제 깊었고, 돌아갈 시간이다. 긴 하루, 멀리 용인까지의 출퇴근과 회사에서의 일과가 끝나고,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선율은 그렇게 말한다. 돌아가는 밤의 나른하고 괜히 허전하면서도, 뭉클한 선율. 포근한 이불 생각나게 하는, 오늘 같은 밤을 담았다. 참, 퇴근 후 집에 돌아가기 전 들르기에 가장 적합한 공연이었다. 너무 큰 주의를 요하지도 않고, 너무 웅장하지만도 않으며, 적당한 길이의 공연. 동그마니 포근한 소리들 곁을 잠시 쉬다가, 이제 집에 가 침대에 누우면 딱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일은 아직 금요일이니 말이다.

 

집에 돌아와 연주를 틀어놓으며, 기억을 반추해보며, 글을 끄적이는 지금까지도 내게 클라리넷은 푸른 눈의 할머니다. 그것이 덩숭덩숭, 겅중겅중 엮어낸 스웨터 같은 선율의 집합에는 '가본 적 없는 스위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명랑함이 부족한 나로써는 아직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 그것의 목가적인 풍광에 가슴 당기우지 않는 나는 상상의 나래를 이만 접는다. 더 깊은 이해에는 실패한 것 같다. 클라리넷과의 첫 만남이었으니 이 정도의 '있을 자리'를 만들어 놓는 것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도 퇴근 후에 찾는 클래식 콘서트의 기쁨과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적당함과 클라리넷의 낯선 세계를 기억한다. 3가지나 가지고 나왔다니 이번 관람은 대단히 성공적이었구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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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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