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는 과정 -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글 입력 2022.04.05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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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대 소녀 로리는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빠를 떠나보낸다.

 

로리는 북극 탐험가가 꿈이었던 아빠를 대신해

그의 유골함을 가지고 홀로 북극 여행을 떠난다.

 

앞서 세상을 떠난

수염쟁이 탐험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길을 나서는

로리의 성장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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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20분 동안 한 사람만 말하고 한 사람은 듣고만 있어야 한다면 듣는 이는 매우 지루해하거나 지칠 것이 분명하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엄청난 재담꾼이거나 그 이야기가 정말 흥미롭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1시간 20분 동안 한 사람이 이끌어 가는 여성 1인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지 궁금했다. 생소한 형태인 모노드라마를 처음으로 관람하며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고 느낄 수 있었다. 무대구성과 배우를 세세하게 살펴보며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1. 조명과 음향으로 확장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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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색, 붉은색 그리고 여러 색깔의 조명들. 밝은 조명과 어둠. 부분조명과 전체조명.

 

조명을 비추면서 긴 간격으로 울리는 멜로디, 무대를 꽉 채운 리드미컬한 노래, 긴장감이 도는 소리, 다른 음향 없이 그저 배우의 대사만 읊조리는 구간.


한정된 공간은 조명과 음향을 통해 확장되었다. 무대에는 세 공간밖에 없었다. 기울어진 빙산을 닮은 무대, 얼음조각을 매달아 놓은 듯한 공간, 그리고 책상. 이 세 공간은 다양한 조명과 음향을 사용해 여러 다른 공간들-예컨대 로리의 방, 박물관, 공항, 비행기 안, 차, 북극, 헬기 안, 환상의 공간-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새로운 공간마다 달라지는 조명과 음향으로 하나의 무대를 여러 공간으로 분리해 느낄 수 있었다. 조명과 음향이 배우 혼자서 이끌어가는 1인극을 풍성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2. 무대 위의 유일한 존재,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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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안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의 눈동자가 모두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이 오로지 한 사람의 숨, 말, 몸짓, 표현에 집중하여 그녀가 그리는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는 사실이 굉장하게 느껴졌다.


배우가 역할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감정에 따라 어떤 식으로 말투가 변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떻게 움직이고, 어디로 이동하고, 어떻게 속도를 조절하고, 소품은 또 어떻게 사용하는지 등. 배우를 이렇게 세세하게 뜯어본 건 처음이었다.


배우는 종종 빠르게 이동하기도 했고, 서 있다가 무릎을 끌어안고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아있기도 했다. 사회자와 로리, 로리 엄마의 경계선을 마구 뛰어다니며 분명 한 사람인데 여러 사람인 척, 하나의 공간인데 여러 공간인 척 연극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런 척에 모두 기꺼이 속아 넘어갔다. 낯선 공간인 북극, 북극에 탐험하러 떠난 어쩌면 무모해 보이는 로리, 로리가 표현하는 로리가 만난 사람들. 관객들은 극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느끼며, 로리의 크고 작은 순간들을 함께 겪어나갔다.

 

로리의 이야기에 몰입하여 그 과정을 함께할 수 있었던 데에는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의 독특한 1인극 형태와 배우의 연기력이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고 생각한다.

 

 

 

#스포일러 주의#

3.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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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이를 최근에 떠나보내야 했거나, 꼭 죽음이 아니더라도 이별의 상황을 겪은 사람에게 이 연극은 펑펑 울게 만드는 작품일 것 같았다.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로리의 이야기였다. 로리의 어머니와는 다른 방식으로, 로리만의 방식으로, 로리만의 속도로 아버지를 마주하고, 기억하고, 함께하고, 부정하고, 인식하고, 수용하고, 떠나보내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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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가 이 여정을 거치며 느끼는 감정을 배우가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었다. 헬기를 타고 올라가 아버지를 북극으로 보내주는 장면에서는 로리의 감정이 더욱 날 것으로 다가와 함께 숨이 벅찰 지경이었다.

 

로리를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장면에서 나는 로리와 함께 북극을 날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는 장면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울음이 터져 나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연극이 마치고도 자리에 눈을 가리고 앉아있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를 잃고 보았다면 나 또한 마음의 안전지대가 무너져 연극을 보는 내내 펑펑 울기만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강렬하고 힘든 감정들을 북극을 탐험하는, 어쩌면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야기에 녹여낸 작품이었다.

 

 

 

마무리하며


 

연극은 금방 쾌활하지도 계속 무겁지도 않게, 딱 적절한 무게로 마무리되었다. 로리가 이제는 아버지의 죽음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무거움으로 느끼게 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환상적인 이야기에 담긴 생생한 감정을 느끼며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이별을 감당해나가는 과정을 극 작품으로 승화해 묵직한 감정을 느끼게 한 작품이기에 기회가 된다면 작품을 관람해보길 권한다.

 

 

[이진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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