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차갑거나 뜨겁거나 '낙원의 밤', '뜨거운 피' [영화]

다른 때깔로 차별점을 둔 국산 느와르 영화
글 입력 2022.04.0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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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영화 목록 중에 국산 느와르 영화가 있으면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나에게 한국 느와르 영화는 ‘실패는 안하는’ 영화다. 시간을 보내기도 좋고, 배우들의 연기도 보기 좋은 그런 종류의 영화. 느와르는 자극적이고, 캐릭터들의 개성이 워낙 강하니 심심할 틈이 없다. 그리고 한국 느와르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회 뜰 때나 쓸 것 같은 칼이나 야구 배트, 밤거리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캐릭터 간의 날이 잔뜩 선 대화, 주구장창 피어대는 연초. 어딘가 끈적끈적하고 쩐 내가 날 것 같은 한국 느와르의 무드를 말이다.

 

<범죄와의 전쟁>, <신세계>, <내부자들>, <아수라>, <브아이아피>, <독전>… 등의 작품들을 거치며 한국 느와르는 어느 정도 틀을 잡았다. 개성 강한 캐릭터, 유혈이 낭자하는 결투신, 러닝타임 내내 피어로는 담배 연기, 무리 지어 다니는 모습, 배반과 의리. 혹자는 ‘클리셰’라 하는 요소들이 어느새 한국 느와르 영화를 대표하는 특징이 됐다. 뻔하다고 하지만, 이런 것들이 소위 ‘먹히니까’ 말이다. 없으면 괜히 아쉽다. 나는 저런 뻔한 것들을 기대하고 한국 느와르 영화를 찾아보기 때문이다.

 

근데 뻔하면서 잘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클리셰를 넣지만, 거기서 ‘한 끗 다른’ 것을 만드는 건 분야를 막론하고 까다로운 작업이다. 같은 음식을 파는 곳이라도 매장의 분위기, 인테리어, 음악에 따라 다르지 않은가. 상업영화는 재밌어야 하고, 동시에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줘야 한다. 느와르 영화만큼 재료가 뻔하다면? 때깔을 달리해야 한다. <남산의 부장>이 실화를 바탕으로 느와르의 색깔을 입히고 <아수라>가 극단으로 치닫는 캐릭터로 밀어붙인 것처럼 말이다.

 

<낙원의 밤>과 <뜨거운 피>는 각자 나름의 색깔로 한국 느와르를 풀었다. 영화적 완성도를 논하기 보단 두 영화의 때깔을 소개해보려 한다.

 

 

 

차갑지만 따듯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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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밤>, 주인공 태구(엄태구 역)


 

<낙원의 밤>의 영상미는 차갑다. 칙칙하고, 콘트라스가 쌘 이전의 한국 느와르 들과는 달리 색감이 옅고 어딘가 물 빠진 것 같다. 채도를 -20로 낮춘 듯한 색감은 영화의 분위기를 무미건조하게 만든다. 영화의 주된 장소인 제주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국적이고, 따듯한 곳이다. 영화의 제목처럼 ‘낙원’과 가장 유사한 곳이다. 휴식, 힐링, 관광지 같은 키워드가 떠오르는 평화로운 섬이지 않은가. 하지만 <낙원의 밤>은 제주도를 차가운 영상미로 담았다.

 

<낙원의 밤>의 플롯은 낭만적이다. 조직에게 배신당한 남자(태구)와 시한부인 여자(재연)가 제주도에서 만나 서로의 존재로 인해 결핍을 채운다는, 한국 느와르에선 보기 드문 서정적인 내용이다. 두 인물 모두 결핍되어 있다. 태구는 고아 출신으로, 이부남매인 누나와 조카가 전부이지만 조직의 배신으로 둘을 잃었다. 재연은 불치병에 걸린 시한부 인생으로, 어릴 적 마피아였던 삼촌의 싸움으로 가족을 모두 잃었다. 결핍된 두 인물은 제주도에서 만나 서로의 공백을 어루만진다. ‘애정’보단, 세상에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린 ‘동료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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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밤>, 주인공 재연

 

 

<낙원의 밤>은 따듯한 제주도와 모든 걸 잃어버린 두 인물의 모습을 차갑게 담아 공간과 인물의 대비를 극대화한다. 인물들의 결핍은 제주도란 공간에서 더욱 커진다. 아름다운 제주도의 풍경을 두고도, 태구는 술과 담배를 피운다. 재연은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잃은 채 하루하루를 갉아먹는다. 제주도는 둘에게 도피처도 못 되고, 상처를 치유해 줄 휴양지도 못 된다. 대한민국 남쪽 끝에 위치한 섬은 둘에게 삶의 끝자락과도 같다. <낙원의 밤>이란 제목은 둘을 더욱 처연하게 만든다. 그래도 두 발로 선 제주도는, 비록 끝자락이지만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두 인물이 만난 공간이다. 구원은 못 받을지언정, 처음으로 상처를 긍정해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점에선 ‘낙원’일지도 모른다.

 

 

 

아둔한 내가 너무 밉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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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주인공 해수

 

 

한국 느와르 영화는 스타일리시하다. 수트를 쫙 빼입고, 세단을 타고 다닌다. 담배 피는 모습은 어찌나 멋있는지. 인물들의 카리스마는 어떠한가. 잘생긴 배우가 툭툭 내뱉는 말 한 마디가 유행이 되곤 한다. 건달인데, 분명히 나쁜 인물들인데 의리도 넘치고, 거침없는 모습이 멋져 보인다. <뜨거운 피>는 ‘건달’을 미화하지 않는다. <뜨거운 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죄다 동네 사람들 같다. 수트보다는 공장 잠바나 다 헤진 가죽점퍼를 입고 부둣가를 돌아다니고,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들이니 싸움을 쉬쉬하는, 건달 치곤 모냥 빠지는 모습이다.

 

크게 한탕을 하려고 하기보단 관광업, 상납금으로 (그들에게 있어선) 푼돈을 벌고 서로의 사업 영역을 애지간해선 침범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다 동네 사람이니까. 성인 오락실 기계를 팔거나 양주 장사로 돈을 버는 모습은, 이전 한국 느와르 영화에서 ‘거대 기업’ 혹은 ‘마약 조직’, ‘정계 배후’로 묘사되던 조직폭력배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주인공 해수도 푼돈이나 만지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랫동안 충성하던 손 영감의 밑에서 나오지만, ‘먹을 거 없는’ 항구 동네를 둔 조직 간의 이권 다툼에 휘말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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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는 해수의 선택에 따라 무너지는 현실을 보여주는데 중점을 뒀다. 복수의 성공, 조직의 탈환, 목적의 달성 등 비교적 ‘성공’에 가까운 결말을 보여준 한국 느와르 영화와는 다른 지점이다. 열심히 밑그림을 그리는 ‘대장’들도 어설프고, 그 아래 움직이는 인물들도 멋있고 치밀하기 보단 번민하고 흔들린다. 모난 구석 없이 직선으로 달리지 않고 주인공 해수는 고민하다가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채 주어진 상황에 휩쓸린다. 양자택일의 선택에서 도망치던 해수는 마지막이 되서야 ‘선택’을 하지만 이미 해수에게 남은 건 ‘조직폭력배’라는 타이틀 하나 뿐이다.

 

 

 

멋있는 게 다가 아니다


 

두 영화 모두 완성도 높다고 할 순 없다. 공통적으로 듣는 말은 ‘전형적’이고 ‘폭력적’이란 비판이다. 장르물의 재미를 살리자니 ‘전형적’이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지만 나 역시 두 작품을 보며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한 지점이 있긴 했다.

 

그래도 좋은 점만 남기자면, 양산형 느와르는 아니었다는 점. 각자의 때깔로 차별점을 두려고 노력했다. <낙원의 밤>은 서정성으로, <뜨거운 피>는 조직 폭력배의 인간 군상으로. 그런 차별점이 난 새롭고 재밌게 다가왔다. 불량식품 맛이 나지만, 포장지가 다른 그런 재미. <낙원의 밤>은 감성 인테리어 카페, <뜨거운 피>는 오래된 노포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정도의 평가만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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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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