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조각] 다음 생에는 마법사로 태어날래요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단 하나의 순간
글 입력 2022.04.02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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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조각 다섯번째. 영화(英華)와 영화(映畵)



# 정밀화와 점묘화

 

영화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영화화된 《해리포터》를 보았던 기억이다. 영화 속에는 내가 상상했던 해리와 헤르미온느와 론이 대화를 나누며 호그와트를 누비고 있었고, 그들이 누비는 호그와트는 상상 속 모습보다 훨씬 웅장하고 신비로웠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영화로 처음 접했을 당시에는 ‘싱크로율’이라는 단어를 몰랐지만, 커서는 영화 속 인물들과 배경이 원작소설과 100%를 넘어선 싱크로율을 보여줌에 감탄하면서 보았다. 그렇게 교실에서 교과서 밑에 『해리포터』를 깔고 몰래 보다가 혼나던 어린이는 해리포터 시리즈 전 편을 결제해서 시도 때도 없이 보는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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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소설 속 문장으로 읽으며 흐릿하게 그렸던 등장인물과 그들이 사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묘사가 정밀화가 되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에 느꼈던 경이로움은 영화라는 영상물에 대한 최초의 호기심을 발생시켰던 것 같다.

 

영화는 현실 속 좁은 내 세계를 대한민국의 어딘가, 일상적으로 오가는 학교와 집을 넘어서 저 멀리 낯선 도시, 나라, 공간, 우주로 데려다 놓아주었다. 본 영화가 늘어날수록, 텅텅 빈 나의 캔버스가 조금씩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수많은 점으로 넓은 캔버스를 채우는 점묘화처럼 영화 한 편 한 편이 하나의 점이 되어 내 캔버스의 일부를 채워주었다.

 

영화의 매력을 이 짧은 글 안에 담아내는 것은 무리겠지만, 이 글은 지나온 내 세계의 일부를 채워준 영화들에 바치는 헌사이다.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을 꼽으라면 내가 속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그 순간이 좋아서, 라고 답하겠다.

 

 

# 어떤 세계로 접속하시겠습니까?

 

어릴 적 무슨 게임을 할지 고르던 순간처럼 영화를 고를 때는 어떤 세계로 들어갈지 신중한 마음으로 임한다. OTT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카테고리 속 영화를 살펴보며 내가 만끽하고 싶은 기분 혹은 속하고 싶은 세계를 선택한다. 어느 날은 성장하는 인물의 서사가 보고 싶고,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사랑하는 주인공들을 보며 미소짓고 싶을 때도 있고, 우울한 감정에 깊이 취하고 싶을 수도 있다. 어찌 됐든 고른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가 시작하는 동시에 나의 현실, 내 방, 복잡한 머릿속의 생각들은 잠시 잊고 화면 속에 집중한다.

 

접속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영화 속 세계들을 소개한다. 이는 사람마다 다른, 그러니 이 글은 지극히 주관적이겠지만 이 글을 읽는 순간에 자신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세계는 어느 세계인지 잠깐 떠올려보시길.

   

 

1. 낯선 사람과 종일 이야기를 하며 산책할 수 있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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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시리즈’ 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비포 선셋(Before Sunset)》,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3부작을 일컫는다. 기차 안 같은 칸의 승객이던 셀린과 제시가 인연을 맺게 되어 비엔나에서 보낸 하룻밤의 시간, 9년이 지난 뒤 파리에서 마주한 둘의 시간, 둘이 만난 지 18년이 지난 후 그리스의 해변 마을에서 보내는 시간을 다룬다. 실제 오랜 시간을 거쳐 영화를 제작해왔다. 그래서 주연을 비롯한 등장인물의 시간이 흘러감을 고스란히 담아낸 이 영화는 두 인물의 삶과 그들 사이를 연결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조명한다.

 

이 세 영화 중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의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주인공 셀린과 제시는 어느 날 기차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지로 향하는 중 서로에 이끌려 대화를 시작하게 되고, 그 대화는 충동적으로 낯선 곳에서의 여행으로 이끈다. 둘은 내려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평소 하는 생각들, 좋아하는 것, 서로의 머릿속에 있던 것들에 대해 계속 궁금해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알아가는데 즐거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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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대화 상대를 만나는 일은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 중 하나이다. 상대방의 입에서 흘러나올 이야기가 궁금하고, 또 그 이야기에 공감하며 맞장구를 쳐 줄 수 있을 때. 당장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내 시야를 기꺼이 넓혀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같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그것도 시간과 장소에 큰 구애 없이!-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그 상상을 구체화한 셀린과 제시의 대화와 그들이 걷는 거리, 들르는 가게를 따라가는 카메라의 시선을 부러워하면서 보다가 이 영화의 엔딩크레딧을 마주했다.

 

많은 사람이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둘의 눈빛이 엇갈리는 레코드 가게에서의 장면을 꼽는데, 나는 제시가 셀린에게 비엔나역에 도착할 즈음 같이 내리자고 제안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내 인생에도 잠깐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더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라서. 그리고 내가 제시처럼 셀린에게 같이 내려서 얘기하지 않을래, 물어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 저 장면을 종종 떠올린다.

 

 

2. 시골 마을에서 사계절 동안 농사를 지으며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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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틀 포레스트(Little Forest)》는 시내로 나가려면 한 시간은 걸리는 고향 코모리로 돌아와 농촌 생활을 하는 이치코의 삶을 담은 영화다. 사계절 동안 집 근처에서 나는 제철 식물과 땀 흘려 직접 농사지은 작물들로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혹은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맛있게 먹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김태리 배우님이 ‘혜원’역을 맡아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이 영화를 시도 때도 없이 틀어놓고 보다가 잠들던 시절이 있었다. 도시로 올라가 치열하게 살다가 지쳐버려 시골집으로 돌아온 이치코와 혜원의 삶을 100%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조금 더 시간이 지난 요즘은 예전보다 더 공감하며 보게 된다), 땀 흘리며 일하고 나면 어느 시기든 그 결실을 맛볼 수 있고 그걸로 나를 위한 요리를 하는 과정은 지켜보는 일만으로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 되어주었다.

 

의외로 하루를 돌이켜보면, 그렇게 바쁘게 사는 와중에도 정작 나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일은 많지 않다. 돈을 벌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일을 하거나, 일하느라 바빠서 대충 밥을 때우거나, 조금이라도 불편한 사람과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 등등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즐겁지 않음을 감수하고 버티듯이 하는 일들이 하루를 채울 때가 있다. 그것이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는 이치코와 혜원의 도시 속 삶이 그런 하루들로 표현된다.

 

“나는 도망쳐 왔다.”고 이치코는 말하지만, 그들이 도망쳐 온 곳에서의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도망치는 것도 내가 잘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보인다.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장을 보러 가는 일, 산수유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잼을 만드는 일, 가까운 데 사는 친구와 술 한 잔 기울이는 밤처럼 땀 흘려 일하고 타인과 날 세우지 않고 이야기하며 보내는 시간 사이에는 잡념이 끼어들 여지도, 남과 나를 비교할 여지도 적다.

 

내 삶에서 나는 없었던 하루를 보내고 오면, 이 영화를 틀어놓고 나도 잠시 이치코와 함께 내 삶으로부터 도망친다. 그의 나날을 보면서 나도 내일은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줘야지, 하늘을 보면서 오늘의 하늘 모양을 기억해야지, 땀 흘려 일하는 슬픔보다는 기쁨에 대해 더 생각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생각들이 옅어지면 잠이 든다.

 

 

3. 머글세계에는 무지한 마법사들의 세계 혹은 고도로 발달한 미래도시 천공의 성 라퓨타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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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이 정말 마법사인 건 아닐까? 라고 생각이 들고, 《해리포터》 영화 제작팀은 알고 보니 마법 세계 관계자인 건 아닐까, 종종 상상하는 해리포터 세계관은 볼 때마다 다음 생애에는 저 세계에서 태어나게 해주세요, 간절하게 기도하게 된다. 사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갔다가 도저히 집에 갈 힘이 안 날 때, ‘이럴 때 내가 순간이동 마법을 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난 왜 머글이어서.’라는 생각을 할 때 마법의 힘은 더욱 간절해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들은 일상 속에 작은 판타지를 불어넣어서 잠깐이라도 즐겁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를 본 이후로, 큰 구름을 보게 되면 ‘만약 라퓨타가 있다면 저런 구름 뒤에 숨어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사진을 한 장 남긴다. 스쳐 지나가듯 지나가는 이 시간은 나중에 사진첩 속 아름다운 하늘 사진으로 남아 다시 한번 마음을 충만하게 만드는 기록물이 되어준다.

   

 

4.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낸 풍성한 식탁에서 즐기는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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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어머니의 농장을 물려받은 안토니아와 그의 딸 다니엘이 마을에 정착해서 꾸려가는 4대에 걸친 모계 가족의 삶을 다룬 영화이다. 모계 중심 서사를 바탕으로 여성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모습과 그들이 모인 따뜻하고 풍성한 식탁을 보여주며 이상적인 혈연가족과 대안 가족 그리고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식탁에는 안토니아와 다니엘, 다니엘의 딸, 가정폭력으로부터 구해진 이웃의 딸과 그의 남편, 전쟁을 겪고 마을에서 혼자 오랫동안 살아온 크룩핑거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밥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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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아의 식탁을 보며 내 미래의 식탁을 저런 모습으로 꾸려나가겠다고 다짐하게 된 일은 현재를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아니어도 기꺼이 나의 저녁 식사에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그런 사람을 불러들일 수 있도록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라는 어떻게 보면 소소하기 그지없는 다짐이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도록 만들어준다.

 


# 접속이 끝난 뒤, 나에게 남는 것

   

 

다른 세계를 만들어서 이 세계에 대한 생각을 표현했죠

 

- 리처드 링클레이터

 

 

결국 현실을 잠시 잊어보려고 선택한 영화에서 다시 내 삶을 소환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다른 세계에 접속한들 우리는 다시 나의 삶으로 돌아와야 하니까. 영화 속 가상의 세계를 보면서 내가 속한 현실 세계를 돌아보게 된다. 결국 영화의 진정한 매력은 우리가 현실의 삶을 모두 잊고 잠시나마 다른 세계에 흠뻑 빠지게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서 우리의 세계를 그리고 나의 삶이 어떠한지 성찰하도록 만드는 점이다.

 

그렇게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나의 삶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면서 나와 맞는 대화상대와 함께 거리를 걸어가며 이야기 나누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꼈다면, 앞으로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고 대화를 청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보겠다고 다짐을 해볼 수 있다.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느닷없이 낯선 곳으로 도망치듯 여행을 떠나 나에 대해 생각하면서 온종일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큰 구름과 우연의 일치를 지나치지 못하고 상상력을 잃지 않는 어른이 될 수도 있다. 마주하고 있는 현재도 한 치 앞을 모르겠지만, 그래도 미래에 이루고 싶은 장면을 상상하며 또 현실을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도 있다.

   

글을 마치며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어떤 영화를 떠올리셨는지 궁금하다. 그 영화를 공유해주신다면 좋겠지만, 아니라도 잠시 그 영화의 장면 혹은 대사를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짓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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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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