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골방 속에 쌓이는 숱한 기억들

안녕하세요,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추예솔입니다.
글 입력 2022.03.29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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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으로 해준 말들을 기억해



누군가 음성으로 건네준 말을 잘 기억한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놀랍거나 등등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나를 동하게 한 그 문장들을 말이다. 한 번 누군가의 목소리로 들은 말은 십 년 아니, 그 이상이 지나도 상대의 목소리와 함께 지층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다.

 

문제는 늘 그 안에 경도돼 있다는 것이다. 내게 켜켜이 쌓인 그 말의 기억들은 꿈으로도 발현된다. 그렇게 꿈을 꾸다 눈을 뜨면 한동안은 그 안에 매여 헤어 나오지 못한다. 한때는 나를 기쁘게 했을지 모르는 말들도 과거가 된 이제는 가시로 변모해 자꾸만 쿡쿡 들쑤신다. 왜 그 말, 말, 말들은 잊을 만하면 출현해 제동을 걸까.

 

어쩌면 늘 상대방의 말을 곱씹고, 그 안에 내포된 함의들을 습관처럼 분석하고 추측할 때가 잦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를 보고 엄마는 참 이상하고 독특하다 했다. 뭘 그렇게 따지고 있냐. 말한 사람은 별 의미 없어.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그러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내 사고 체계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 가동을 중단하지 않는다.

 

평소 아르바이트를 하든, 학교에서 조별 활동을 하든, 뭘 하든, 사람들은 전부 융통성 있고 센스 있게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한 가지에 너무 집요하게 파고들지 말고, 때로는 편법도 쓰면서, 어느 정도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라는 거다. 그런데 나는 그런 요구가 곧잘 먹히지 않는 사람인 것만 같다. 남들이 아무렇지 않게 흘린 말과 농담에 쉽사리 웃지 못하고 멈춰 선 채 어느 쪽인지를 가늠하다가, 그 안에 갇혀버리는 이상한 사람이니 말이다. 언젠가 성공한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고, 실패한 사람은 과거에만 머무른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잣대로 봤을 때 나는 실패한 사람인 걸까?

 

그러나 근래 아트인사이트와 심리학 전문지에서 글 쓰는 일을 지속하며 느낀 게 있다. 내 글들은 그 숱한 말에 시달리며 울었던 시간이 없었더라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으레 타인들이 독특하고 음침하다고 치부하며 손가락질하는 지점들이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한 셈이었다.

 

이쯤에서 앞서 던진 물음에 답해본다. 과거에 빠져 살면 실패한 사람일까?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추억할 만한 말과 기억이 많다는 건 그것 자체로 이미 성공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괴롭게 한 것은 그 말들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살게 한 것도 그 말들이었으니 말이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이렇듯, 대개 과거 기억으로 집약되는 무질서하고 양가적이며 혼란스럽기만 한 내 사유들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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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위해 사는 사람



과거의 어느 기억을 떠올려본다. 언젠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라는 말로 명명한 바 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두 인물이 만나 하는 형태의 사랑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태초의 내 사랑은 연예인을 향한 맹목적이고 순수하며 열정적인 사랑이었다.

 

중학생 때, 가족들끼리 둘러싸여 <슈퍼스타 K>를 시청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린 그때 무대 위 가수에게서 후광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렇게 홀린 듯이 텔레비전을 바라봤다. 뒤이어 흘러나온 우승자를 알리는 프로그램 종용 멘트는, 누군가에겐 그저 금요일 밤 안줏거리에 그쳤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삶의 판도를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작용했다. 누군가를 이상화하고 열정을 불태워 사랑하는 계기로 발전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우승자에게 반한 뒤로 소위 덕질에만 푹 빠져 살았다. 앨범을 사고, 콘서트를 가고, 팬 사인회에 방문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당시 느낀 떨림과 처음 겪는 감정들을 숱하게 기록해나갔다. 누군가는 말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어떻게 사랑한다고 할 수 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때 처음으로 헌신적이고 무한한 사랑이 뭔지를 배웠던 것 같다. 이는 사랑의 표준 점이라 상정될 만큼 아주 강렬하고도 상징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내가 무언가에 천착할 때 주변을 보지 못할 정도로 몰입하는 것은 여기서 기인한 것이겠다.

 

물론 이 이후에는 그 대상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때로는 공부와도 같은 비물질이기도, 때로는 연애 대상이 되기도 했고, 예술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로는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매체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대상을 달리하며 나는 늘 사랑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주인공 소년은 본래 사랑을 지켜만 보는 관음증적인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무언가를 만지고 접촉하는 것 역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정의는 변모하였다. 나 역시 그러한 변천사를 겪은 셈이다.

 

 

 

사랑의 무상감 속에서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사랑의 본질을 두고 무상감이 일기도 했다.

 

얼마 전 읽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소설의 이야기를 잠시 하고 싶다. 주인공 폴은 자신의 연인인 로제에게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며 미묘한 심리를 즐긴다. 놀랍게도 이는 폴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었다. 폴과 로제는 맞바람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그렇게 사랑과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외줄 타기를 하며 아슬아슬하게 관계를 이어간다. 상대가 가면 뒤 감추고 있을 추악한 심리를 늘 지레짐작하며 말이다. 경악스러웠다. 그러나 어쩌면 이게 사랑의 민낯은 아닐까 하는 반대 급부의 감정 역시 차올랐다.

 

그 대상이 사람이 됐든 그 무엇이 됐든, 사랑은 삶에 있어 꼭 필요하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짜 사랑이라는 건 누구나 당도하고 싶은 지점이겠다. 그러나 나는 하면 할수록, 이 사랑이란 게 뭔지 잘 모르겠다. 때로는 내가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만 같다. 나는 어쩌면 사랑놀이를 하는지도 모른다. 다들 의례적으로 연애를 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하고, 상대가 불안하지 않게 연락을 하고,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암묵적이고 도의적인 룰에 따라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상대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 분노하지 않나. 으레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으니, 나도 그 흐름에 편승하는 건 아닐까.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어를 두고 칸트가 내린 정의가 있다. 무언가를 '아름답다'라고 자각하지 못할 만큼 그 안에 푹 빠져서, 어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도 개입되지 않는 무위의 상태라고 말이다. 다소 다를 수 있지만, 이를 사랑이라는 개념에도 적용시켜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요컨대 마음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도 어려울 만큼 누군가에게 푹 빠졌는데,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정서적 충족이 돼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위의 상태를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이다. 물론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살면 살수록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규제와 규격이 선명하게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 안에서 자유롭고 자족적인 사랑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싶다. 아니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그러니까 다들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싶다. 세상에 절대 진리는 없으니 다들 과학이 사실이라고 '믿고', 종교가 사실이라고 '믿고', 우리는 하나라고 '믿듯'이, 나 역시도 그냥 그렇게 '믿는' 것은 아닐까. 이상적인 사랑은 일종의 신화가 아닐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혼란스러운 동시에 돌연 다 허무해졌다. 존재론적인 물음은 사는 의미 자체를 흔들어댔다. 진정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내가 종국에 얻을 수 있는 게 뭔가, 하는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의문에 봉착했다.

 

이쯤에서 연이어 실연을 당했던 스무 살 언저리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견고하다 믿었던 내 사랑의 안전한 터전에 조금씩 균열이 일은 그 역사의 시작점 말이다. 계속해서 울며 한탄하고 있는 나를 두고, 옆에 있던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그게 쉬웠으면 세상의 모든 글과 음악은 없지 않았을까?"

 

그렇다. 그 말이 맞다. 그러니 내가 그저 그 대상을 달리하며 숱하게 설레었다가, 무너졌다가 다시금 타오르기를 반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일지 모르겠다. 더욱이 사람은 감정을 복합적으로 느낄 수 있는 동물이니, 그것들의 총합체인 사랑이 끼었을 때 오류가 난 것처럼 혼란스러운 건 당연한 일이겠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며 살아왔습니다



누군가는 내 할 일을 잘해야만, 내가 안정돼야만 내 사랑도 지킬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딱 그 반대다. 나는 나를 버려야 내 사랑도, 주변 이들도 챙길 수 있다. 이는 앞서 연예인을 좋아할 때 속속들이 파헤쳐야만 직성이 풀렸다는 성향에서도 알 수 있듯, 늘 무엇을 하든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이런 고질적인 특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고등학생 때, 방과 후 친구 집에서 다 같이 놀려고 모여도 할 일이 생각나면 양해를 구하고 빈방에 들어가 거기에만 매달렸다. 언제 놀 거냐는 말은 속 좋은 투정처럼 들렸다. 학생 신분이니 내가 그렇게 하더라도 당연히 이해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더욱이 일대일로 모인 만남도 아닌데 나 혼자 빠진다고 해서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늘 '네게 도움을 주지 않을 테니 너 역시 내게 도움을 주지 말라'는 각자도생 마인드로 살아온 나였다. 그러니 당장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내가 더 중요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당시 모두가 학생 신분이었다는 거다. 모두가 바쁜 일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모여서 놀자는 약속하에 모인 만남이니 다들 그 룰에 충실했으리라.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는지를 알겠다. 각자도생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나 자신이 편해지고자 하는 합리화일 뿐이었다. 무인도에서 사는 게 아닌 이상 사람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나 역시 주변 이들에게 단 몇 퍼센트라도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니 말이다. 아니 오히려 단 몇 퍼센트라고 축소하기엔 어려울 정도로 그 빈도가 잦다.

 

당시 학업 스트레스로 인해 자습 시간에 숨죽여 울었던 것이 기억난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그때, 짝이었던 친구가 본인의 공부도 포기한 채 한 시간 동안 필담으로 내게 위로를 건넸다. 너 잘하고 있어. 솔직히 항상 뭐든 열심히 하는 게 부러웠어. 아까도 애들이랑 네 칭찬했잖아. 손으로 꾹꾹 눌러 담은 진심이 고마워서 눈물이 배로 흘렀다.

 

이게 단편적인 기억인 것만 보아도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만 같다. 적어도 내게 있어 '원래 인생은 혼자야'라는 말 같은 건 이기적인 마인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글에서도 타인들의 말들이 반 이상의 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그러니 가만히 다짐해본다. 지금껏 주변 사람들이 내게 품을 주었으니, 나 역시 조금씩 내 품을 내어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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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유연한 도약을 위해



이 글을 쓰며 숱한 문장들이 머릿속에 부유했다. 그러나 이내 기록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잘 써내고 싶다는 욕심이 적지 않았으나 야속하게도, 그에 비례하는 다른 중요한 일들도 겹쳤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 같으면 이러한 사실에 적잖이도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다. 여기에만 매달리는 데도 시간이 없는데, 왜 각종 일이, 사람들이 겹쳐서 나를 가만 안 놔두나 하고. 그러나 유연해 보고자 한다. 완벽해지고자 하는 강박도, 무조건 어떤 것에 천착해야 한다는 데서 오는 불안도 조금은 내려놔 보려 한다.

 

신기한 건 여기 적어 내려간 생각이 몇 달, 몇 주 전에 했던 생각과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하긴 감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고, 감정은 생각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니 이상할 것도 없겠다. 앞으로도 나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업데이트하며 유연하게 살고자 한다. 밀려오는 말들의 퇴적과 침식 속에서 다시 공회전을 반복하겠지만, 거기서 깨닫는 바도 상당하다는 점으로 위안 삼으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고집스럽게 주장했다가도 꼭 그것만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여유를 가지며, 파도가 밀려 들어왔다가 빠지는 과정처럼 흐름에 몸을 맡겨 보고 싶다. 물론 여기 있는 문장들도 언젠가 번복될지 모른다.

 

글에 숱하게 등장한, 각자의 목소리로 위로를 건넨 주변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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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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