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몰입하기 힘든 시대 [문화 전반]

글 입력 2022.03.07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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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하고도 반나절 전, 아트인사이트의 에디터로 발탁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합격의 기쁨은 짜릿했지만, 짜릿한 모든 것들이 그렇듯 그런 감정은 탄산음료의 기포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첫 번째 기고문의 첫 번째 문장도 쓰지 못한 채 하얗게 빈 페이지만 마주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어제의 기포는 다 빠져버리고 애매하게 들쩍지근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꾸준히 글을 써왔지만, 글 쓰는 건 늘 어렵고 지난한 노력이 드는 일이다. 좀 더 나은 표현, 매끄러운 문장을 고민하는 것도 만만치 않게 품이 드는 작업이지만, 사실 내게는 책상 앞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집중하는 일이 가장 힘들다. 간신히 마음을 잡고 앉더라도 내일의 일정을 알리는 각종 알람, 누군가와의 관계를 상기시켜주는 무수한 카톡 메시지 세례에 10분을 채 집중하기가 어렵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신경줄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바야흐로 몰입하기 힘든 시대다. 전에 없이 활발한 가상공간에서의 소통이 팬데믹 시대의 물리적 단절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일상의 모습이라면, 그로 인해 발생한 정서적 산만함은 그 일상이 드리운 그림자다. 똑같은 글을 쓰고 똑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디지털 매체 안에서의 나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하고 호흡이 짧다.

 

 

필자의 요즈음을 돌아보기 위해 블로그를 켜봤다. 작년 이맘때쯤 일기장으로 쓰기 위해 시작한 블로그는 어느덧 일상의 소소한 낙으로 자리 잡았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투자하기는 힘들어 이동시간 중 짬이 날 때마다 조금씩 기록해 두곤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스마트폰에 설치한 블로그 앱을 자주 이용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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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좁은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며 글을 쓰다 보면 한 줄에 여덟 단어가 채 들어가지 않는다. 적당한 한 문장이 스마트폰 안에서는 세 줄, 네 줄로 늘어진다. 뚝뚝 떨어지는 가독성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미사여구나 비유를 몽땅 들어내고 헐벗은 여덟 글자로 간추리기 일쑤다.

 

SNS나 각종 채팅 앱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화도 마찬가지다. 듣는(엄밀히 말하면 보는) 이가 혹여나 지루할까, 내 말의 중간에 끼어들세라 한마디 말을 짧은 문장으로 토막 내 전달하곤 한다. 디지털 세상에서 문단은 드물고 글은 귀하다.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범람하는 자음과 모음, 낱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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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문장, 간결한 대화는 단순한 생각, 납작한 감상으로 이어진다.

 

최근 필자가 경험한 '넷플릭스 파티', '왓챠 파티'를 일례로 들 수 있다. '와치 파티'로 일컬어지는 이 새로운 관람 문화는 콘텐츠와 채팅 문화가 연동된 서비스이다. 친구들과 실시간으로 함께 영화를 보며 그때그때 궁금한 것을 묻고, 장면마다 핑퐁 놀이하듯 빠르게 오가는 채팅에 영화 보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새로운 감상 문화를 통해서는 작품의 긴 호흡을 온전히 향유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생각을 정립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실시간 소통 기술은 우리에게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난 새로운 소통의 장을 열어주었지만, 그 대가로 시간의 공백 사이에 존재하던 침묵과 침잠을 앗아갔다.

 

*

 

디지털 매체상에서 이루어지는 감상과 소통은 마치 거미줄과 같다. 빠르고 유연하게 뻗어 나가지만, 그런 만큼 작은 바람에도 휘청이고 날아가기 쉽다. 이 짧은 글을 통해 동시대 감상문화에 대한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할뿐더러 불가능하다. 그저 오래간만에 마주한 흰 종이 앞에서 전에 없이 주춤거리게 된 필자의 지난 모습을 되돌아볼 뿐이다.

 

왁자지껄 채팅 놀이와 시끌벅적 왓챠 파티는 여전히 즐겁다. 하지만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쯤은 그 주에 보고 읽었던 것들을 글로써 풀어보며 몰입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글 쓰는 건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거미줄처럼 후 불면 날아갈 듯한 지금의 표피적인 감상이 아니라, 얕게나마 내 안 어딘가에 뿌리내릴 수 있는 생각의 깊이를 가지고 싶다.

 

아트인사이트에서의 4개월이 그 생각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최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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