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애 無礙 4

사랑스러움에 대하여
글 입력 2022.03.0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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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건 어린아이의 시절, 마구 앞으로 뛰어나가다간 우뚝 서 뒤돌아보며, 세상 가장 가득찬 웃음을 지으며 어머니를 불러보았을 것이다. 사랑스러운 모습들. 누구의 아이가 됐건 그렇게 가득찬 환희를 앞에 두고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내가 이제, 주변의 사랑스러운 이들을 관찰하며 느끼는 바로 그 감정과 같이. 아무런 노력 없이도 가득 차 있는 그 감정, 그것은 본위의 행복, 행복의 본질 같다. 그것이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 지난 에세이, 무애 3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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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 無礙, 그것은 얽매임이 없다는 것이다. 풀어쓰자면, 마음에 얽매임이 없어 비로소 자유롭다는 뜻이고, 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여기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얽매임이 먼저 자리하고 있노라는 말씀이다. 무애를 떠올리면은 일견 우스꽝스러운 이미지가 짜인다. 저잣거리에서 목탁을 두들기며 덩실거리는 파계승의 이미지, 그러니까 이것은 시쳇말로 TPO에 맞지 않은 행위이다. 저 스스로 벌써 부끄러울 일. 그리고 이것이 드러내 시사하는 바는, 일명 내재된 약속들, 사회화의 긴 그림자, 다른 말로는 얽맴이 '여기' 이미 많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얽매임은 예민한 의식의 일. 얽맴은 마음의 바람에 일일이 토를 달고 재단해보고 제지하고 설득하려 하는 일련, 곧 의식의 영역이다. 마음의 바램, 즉 소망과 욕구는 본능의 영역, 생명의 달이 점멸하는 때까지 줄곧 다시 차오르는 것, 이것은 생명의 민낯. 그리고 이를 재단하고, 가부를 결정하는 일은 의식의 영역이다. 인간이 동물 너머의 존재를 꿈꿀 수 있게 하는 바로 그 힘, 물론 인위인 의식이 자연인 본능에 비해 열세에 놓인 것이야 우리가 익히 겪어온 바일진대, 여기서 영원한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강렬하고 끊임이 없는 생명의 부름, 그 터진 둑 앞, 세찬 물살을 조악한 두 손으로 맞서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앞을 맞서게 하는 두 가지 힘에 대해서는 다음번 다른 기회가 있으면 논해보아도 좋겠다.


나와 '내'가 가깝기 위해, 나와 '내'가 서로 정다워 자기혐오나 자기검열의 스트레스로부터 멀기 위해서는 마음과 의식, 본능과 이성이 합치되어야 하고, 다시 그를 위해서는 무해한 욕구를 가지고 있거나, 의식이 욕구에 순응해야 한다고 줄곧 생각해왔다. 전자에 대하여서는 말을 줄이겠다. 무해한 욕구와 해로운 욕구, 즉 욕구의 무해함 그를 논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가치 기준을 정립하고 여러 예시를 나열해본 다음 항목화하는 지난한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그저, 사람들에게 부끄럼 없이 공표할 수 있는 성질의 욕구로 일축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차라리 무난한 욕구로 바꾸어 표현해볼까. 그럼에도 여전히, 내게는 스스럼없이 말해보기엔 부끄러운 욕구가 많았다. 그것에 대하여서도 그리 길게 논할 생각일랑 없다. 법을 저촉하지 않음에도, 네게 혹은 스스로에게 해로울법한 욕구는 정원을 이루어 있었다. 그것은 가볍게 말하자면, 나태와 질투와 허영과 오만과… 대략 칠죄종 七罪宗에 해당하는 모든 것들이다.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것들, 그러나 중한 것은, 그것의 존재 여부 자체가 아닌 그것들의 빈도와 점유율이다. 생명 있는 것들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이 욕망 자체로 번뇌를 느껴볼 만큼 고운 심성의 사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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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반짝이는 사람들을 발견한다고 이전 에세이에 썼다. 사랑스러운 이들, 그들은 무해한 욕구를 가지고 있거나, 스스로 자신의 욕구를 긍정하는 사람들, 그로써 세상 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고 대화하는 사람.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욕구를 표출하고, 그로써 다소간 충족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동공에서 맑게 흐르는 천진함을 관찰했다. 뺏들어 훔쳐보고플 정도로 맑은 눈, 아무런 환영도 어리어있지 않은 아름다운 근시안, 진정한 의미의 카르페디엠, 나를 향해 넘실대오는 그 눈은 마주치는 순간 내게 물어오고 있었다. 왜 그리 고민이 많아 보이느냐고, 왜 웃고 않냐고, 오늘도 이렇듯 별다를 것 없이 다소간 즐겁지 않냐고.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좀 더 나아가 성인이 성인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더 나아가선 현대인이 현대인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종국에는 나와 관계한 뭇 인간들에게서 최소한의 인정과 존중을 받기 위하기까지 그 얼마나 많은 욕구와 아우성을 마음 안에 잠가두어야 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밤이다. 이미 체화되어 잊혀버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은 이렇게 습관화된 자기 억제를 통해 스스로에게 잊혀지는 것일까? 내게 있어 한 인간의 자아 혹은 개성은 그 인간이 지닌 욕망의 '가공된' 색깔이기에. 다만, 세공이라는 후험적 영역에 앞서 존재하고 있는 것, 원석에 더욱 초점을 두게 된다.


욕구는 자아의 색을 정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소개하는 장면을 기억해본다. '나는 어떠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고 어떤 것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것을 잘한다.' 우리가 개성이라 부르는 것들은 대개, 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욕구와 반욕구, 그 집체로 보인다. 본디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치 않고 있었으며, 개중 발현된 것과 억제된 것들이 있으면, 이것이 뭉둥그러져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이룬다고 보는 것이다.


고로, 내게 있어 한 사람이 풍기는 색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욕망이 지닌 속성이다. 욕망은 그 속성에 따라 각 색깔의 비유를 가진다. 의식화해서 정렬해본 적은 없지만, 주로 붉은 것과 노란 것, 그리고 시퍼런 그림자의 색이 있었다. 이것은 욕망 자체의 비유이기도 하지만, 욕망이 억눌렸을 때, 만성적 욕구불만 상태에서 각 자아가 띄게 되는 부정상의 비유이기도 하다. 이 둘, 욕망의 속성과 욕구불만 상태에서의 왜곡 사이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유기적 관계를 정립하지 못했기에, 우선은 독립적으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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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생각이 정립되지 않았다.



사변이 대단히 길었다. 이번에야말로 가볍게 접근해보려 한 본 주제는 생각보다 복잡하게 되어버렸다. 욕구의 속성에까지 들어가 보기에는 내 능력이 모자라겠으니 이만하도록 한다. 여하간 뭇 욕구가 먼저 있고, 그것이 후험적 노력을 통해 발현되거나 억제되는 과정에서 한 인간의 개성과 자아의 색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잘 발현될수록 색은 뚜렷해지고 의식은 건강할 것이다. 내가 바라본 사랑스러운 그들은 매우 건실한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다.


이것, 사랑스러운 이들과 무애 사이에는 어떠한 상관이 있는가? 무애를 과정으로 보는가, 현상으로 보는가에 따라 답은 갈라질 것 같다. 무애를 과정으로 본다면, 이를 '마음을 얽매는 것들을 없앰'으로 해석될 것이고, 현상으로 본다면 이를 '마음에 얽맴이 없음'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말장난 같겠지만,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결론부터 이야기해보자면, 사랑스러운 이들은 내게 있어 현상으로서의 무애의 일종으로 비친다. (분명, 그들도 인간이기에 마음에 얽매임이 아예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현상으로서의 무애, 그것은 성취한 것이 아닌 일종의 '그러함'이다. '없앤 것'이 아니라 '없던 것'이다. 고로 그것은 감각되지 않는다. 여하간 그들은 쾌활하고 명랑하며, 사랑스럽다. 이 모든 것들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직 지난한 인생의 항해가 충분히 남아있음을 떠올려볼제, 현재의 '없음'은 기한을 확정받지 못하는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 언제 생길지 모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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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위하여 조금 더 나아가, 얽맴이 없는 어느 사랑스런 짐승을 떠올려본다. 고향 집의 골든 리트리버 정도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그는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은 채 넓은 정원을 뛰논다). 그들에게도 욕구와 반욕구가 있고, 그것의 발현과 억제가 있다. 다만, 짐승에게 있어 억제는 영원히 피동행위일 것이다. 얽맴이라는 욕구의 자기 억제란, 인간만의 것이라는 사실이 보다 명료해진다. 그리고 지금 없는 자기 억제가 언제 다시 생겨날지 모른다는 것, 현상으로서의 무애는 지극히 현재적인 것이다. 굳이 말해보자면 자식이 생긴다거나, 갑자기 가족이 아파 장기입원하게 되거나, 목돈으로 투자한 주식이 급락하거나, 전셋값이 갑자기 올라버린다거나… 달리 얘기해보자면, 영원히 명랑하고 쾌활하기란 대단히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고로 그 사랑스러움들은 애초 희구의 대상이 될 수 없을뿐더러, 지선의 목표가 될 수 없기에 질투의 대상으로 화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사랑스러운 채로 평온히 내 눈 안에 담긴다. 그들에게 내가 하고픈 말은 그저, 영원히 명랑하기를 하는 담보 없는 진심뿐이다. 그들을 축복한다. 온갖 자기 강박과 제약조건에 속박된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렇듯 무애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는가. 다만 거기 어디 나와 같은 사람이 있어, 명랑한 이의 아름다움을 흠모하고 있다면 우리가 걸어보아야 할 길은 다를 것이라는 말, 이것이 이번 글에서 진정으로 드러내고자 한 이야기이다. 즉, 지금부터 이야기해볼 것, 과정으로서의 무애에 대해 생각해보는 편이 더욱 이로우리라는 말이다.


현상으로서의 무애와 과정으로서의 무애, 하고 싶은 것을 쉬이 할 수 있는 것과 일견 꺼려지는 것도 능히 해내이는 것의 차이, 명랑히 자신의 욕구를 천명하고 충족하는 것과 저잣거리에서도 자유로이 목탁을 두들기는 것의 차이. 이 사이 거리감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계속 논해보도록 하자.

 

이제야 그 비범한 파계승을 불러올 만한 충분한 조건이 형성되었다. 이번 글은 이를 위해 피치 못하게 지난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여기까지 호흡을 따라오셨을 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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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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