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인류가 '진화'의 대가로 잃은 것 - 다윈의 거북이

그래서, 오늘은 어제보다 더 행복합니까?
글 입력 2022.02.2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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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학생일 적에 한창 유행하던 책이 있었다. '지대넓얕'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채사장)'이라는 책이었다.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 상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책의 첫 장에서 읽었던 한 문장이 아직도 선명히 떠오른다. "어제는 삐삐, 오늘은 핸드폰, 내일은 스마트폰인 건 인정한다. 그래서, 오늘은 어제보다 더 행복해졌는가?"

 

물론 2022년 현재 이 문장은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 '스마트폰'이 더 이상 내일의 것이 아닌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직선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순환한다는, 원형적 시간관을 설명하는 이 문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의 발자취, 그러니까 역사는 직선 트랙 경기가 아니다. 오히려 시간과 선수만 바뀔 뿐 본질적으로는 같은 사건들이 반복되는 계주 경기에 가깝다.

 

그리고 지난 23일, 필자로서는 꽤 오랜만에 이 역사관을 바탕으로 구상된 작품을 만났다.

 

 


 

다윈의 거북이

-  2022년 제 3회 딜레마 극장 참가작 -

 

일자

2022.02.23~2022.02.27


시간

평일 7시 30분

주말 4시

 

장소

대학로 후암스테이지


티켓가격

전석 30,000원


주최/주관

연극제 딜레마극장 운영위원회


관람연령

미취학 아동 입장불가


공연시간

120분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연극 <다윈의 거북이>는 후안 마요르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손대원 연출과 극단 가음이 합심해 막을 올린 작품이다. 대학가 소극장 세 곳 ㅡ 공간아울, 후암스테이지, 단막극장 ㅡ 이 연합하여 주최한 제3회 딜레마극장 연극제에 출품된 이 작품은 '포기해야만 선택이 가능해지는 삶의 딜레마'라는 본 연극제의 주제를 가장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작품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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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는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의 애완 거북이 '해리엇'의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다윈의 거북이>를 집필했다. <다윈의 거북이>에서 해리엇은 갈라파고스 섬에서 찰스 다윈의 눈에 띄어 인간 세계로 건너오게 된 거북이다. 그녀는 유럽 복판에서 산업화로 인해 소외된 인간들의 모습을 목격하고 세계 대전을 직접 겪거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는 등 과도한 자극으로 인해 급속한 진화를 거치게 된다.

 

200세를 앞둔 해리엇은 인간의 역사란 결국 반복되는 것임을 깨닫고 인간에게서 멀어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인 갈라파고스 섬에 돌아가고자 역사 교수에게 도움을 청한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기억을 제공하는 대가로 갈라파고스 섬에 돌아가게 해주겠다는 교수의 약속을 얻어 낸 해리엇은 경험담을 풀어 놓는 과정에서 교수의 아내 베티와 한 의사를 만나게 된다.

 

역사 교수, 베티, 의사 세 명의 인물들은 모두 해리엇에게 큰 흥미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해리엇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아니다. 역사 교수는 자신의 연구 결과에 활용할 목적으로, 그의 아내는 쇼(Show)로 돈을 벌 목적으로, 의사는 장수 혈청을 만들 목적으로 그녀를 착취하려고 저마다 계획을 세워 실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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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거북이>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를 꼽자면 '진화'일 것이다. 찰스 다윈의 이론에서 진화란 곧 자연선택 이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닌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진화하는 대신 무엇을 포기했는가? 바로 '인간성'이다. 해리엇이 목격한 수많은 다툼과 분란이 이것을 증명한다. 인간은 '유대인', '공산주의자', '파시스트', '부르주아' 등 언어로써 끊임없이 '인류의 적'을 지목하고, '적'으로 지목된 다른 인간들을 억압한다.

 

그렇다면 인간성을 포기한 인간은 과연 '진화'한 것이 맞는가?

 

전 세계 인구가 풍족히 살게 할 수 있는 식량과 기술이 있음에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는 굶주린 채 죽어가는 이들이 있다. 당장 한국만 해도 전 국민이 입주하고도 남을 수량의 주택이 있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길거리에서 잠을 해결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빨갱이', '틀딱' 등의 언어를 만들어 끊임없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더 나아가 혐오를 즐기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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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간 세상을 약 200년 간 지켜본 거북이 인간 해리엇은 자신의 경험담을 시간순으로 실컷 늘어놓다가 1900년대 후반에 이르러 갑자기 이야기를 뚝 끊고 이렇게 말한다.

 

 
"끝이에요. 나는 그 이후로 인간에게서 더 이상 새로운 걸 본 적이 없어요."
 

 

필자는 해리엇의 처연한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기술은 발전하지만 사람은 발전하지 않는 무한의 굴레 속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존재의 눈빛이었다. 그녀의 시선에서 인간의 역사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던 시점에 이미 끝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기를 '포기했다'. 대신에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인간으로부터 멀어지기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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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고 돌이켜보니 서사적으로는 의문점이 많다. 아무리 해리엇의 증언이 참신하더라도 정보의 출처를 공개하지 않는 한 역사학계는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인데, 왜 교수는 그토록 해리엇의 존재를 숨기면서 '도쿄에서 스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는가? 또한 의사와 교수를 해리엇을 두고 경쟁하는 인물들로 설정했으면서 왜 의사는 교수와 달리 해리엇과 무언가를 두고 거래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본 연극은 사실주의적인 연극이 아니며 판타지적인 연출이 극 자체의 핵심 매력 포인트다. 그리고 기실 상연 중에는 배우들의 연기에 몰입하느라 개연성을 따질 정신도 없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관객들이 극장의 연기톤보다는 드라마와 영화 등에 사용되는 정제된 연기톤에 더 익숙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극단 가음의 연기는 전혀 이질적이지 않았다. 극에 등장한 모든 배우들이 과장되지 않은 발성과 몸짓으로써 그야말로 "소극장에 제격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사실 <다윈의 거북이>는 소극장에서 상연하기에는 매우 힘든 공연이다. 일단 배경이 여러 번 바뀌어야 하고, 줄거리 특성상 '판타지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을 여러 번 삽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중극장 이상의 공연장에서나 가능할 법한 연극을, 극단 가음과 손대원 연출은 지하 소극장에서도 거뜬히 해 낸다. 심지어 손대원 연출은 "원작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며 원작을 현실과 타협하는 방향으로는 수정하지 않았음을 밝혀 필자를 더욱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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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하자면 활용할 수 있는 무대와 조명, 장비가 적었기에 오히려 배우들의 실감나는 표정 연기와 세심한 무대 배치 및 분장, 그리고 연출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 특히 필자는 개인적으로 묵직한 주제의식 위에 예고 없이 흩뿌려지는 주연 배우들 ㅡ 특히 의사의 감초 연기는 가히 최고였다 ㅡ 의 유머 코드와 애드리브가 주요 관람 포인트였다. 자칫 잘못하면 한없이 가라앉을 수 있는 주제를 적당한 연출과 연기로 '재미있게' 전달한 것 역시 배우들과 제작진이 가진 능력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필자는 연기를 너무 잘 하면 인간이 정말 거북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본 연극을 통해 처음 알았다.

 

**

  

극중 역사 교수의 아내 베티는 지속적으로 해리엇을 '짐승'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과연 해리엇이 짐승인가? 해리엇보다는 차라리 해리엇을 조각내고 이용하고 착취하려 한 세 명의 인간들이 더 짐승에 가깝지 않은가? 연극 <다윈의 거북이>는 관객들에게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어제는 산업화, 오늘은 초고층 건물, 내일은 메타버스인 건 인정한다.

그래서, 인간은 거북이보다 더 행복해졌는가?

 


극단 가음이 공연하는 <다윈의 거북이>는 2월 27일 일요일이 마지막 공연이다. 웅장하고 즐거운 뮤지컬도 좋지만, 더 나은 삶에 대해 고민하기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자그마한 소극장에서 해리엇과 함께 사색에 잠겨보는 것도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해리엇 역

박은주

 

의사 역

이정희

 

교수 역

안성진

 

교수 아내 역

김단경

 

원작 

후안 마요르가

 

연출 

손대원

 

번역 

김재선

 

조연출 

이예원

 

액팅코치 

황연희

 

프로듀서 

백재욱

 

무대디자인 

이상헌

 

조명디자인 

김경호

 

오퍼 

전예지 박재호

 

소품제작 

진유리

 

진행 

이지현 이지수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 주신

박은주 님과 손대원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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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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