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밑바닥을 끄집어,

Damine Rice - 앨범 <O> 20주년 즈음하여,
글 입력 2022.02.22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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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의 법칙... 한 영화에 대한 관객의 몰입도는 도입부 5~10분 사이에 결정된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영화는 5분까지 갈 것도 없이, 5초 만에 끝장 매력을 발산하기도 한다. 영화 <클로저>가 그렇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고막에 꽂히는 중후한 보컬. 절절한 노랫말을 배경으로, 수많은 군중 속에서 눈빛을 교환하는 나탈리 포트만과 주드 로의 워킹을 슬로모션으로 조망한 화면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여하튼 그 영화로, 그리고 그 장면의 노래 The Blower's Daughter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아티스트가 바로 데미안 라이스 Damine Rice이다. 그리고 올해로 그 노래가 수록된 앨범 가 세상에 나온 지 20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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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데미안 라이스는 90년대 '락밴드 주니퍼(Juniper)'에서 활동하며 주목받기 시작한다. 주니퍼는 첼브릿지의 셀리전 콜리지 사립 고등학교의 인연으로 결성된 밴드다. 그들은 아일랜드 전역을 도는 투어를 통해 실력을 입증했고, 1991년 음반사 폴리그램(Polygram)과 6장의 음반을 계약하게 된다. 첫 번째 싱글 앨범 "Weatherman"은 아일랜드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데미안 라이스는 어린 시절부터의 꿈이었던 올림피아 시어티(Olympia theater) 콘서트 홀에서 연주를 하는 성공을 누리기도 한다.


그러나 데미안 라이스는 보다 대중적인 음악을 바랐던 소속사와 음악적 노선을 두고 갈등을 겪게 된다. 결국 주니퍼는 해체되고 그는 유럽을 유랑하는 여행을 시작한다. 이탈리아 토스카니에서 농사를 짓기도 하고, 여러 유럽 도시를 여행하며 버스킹 공연으로 돈을 벌었다. 그렇게 유랑의 시간을 가진 이후, 아일랜드로 돌아온 그는 프로듀서인 데이비드 아놀드에게 자신의 창작곡을 담은 데모 테이프를 들려주게 된다. 그에 감명받은 프로듀서는 데미안에게 새로운 앨범을 발매하길 권하며 이동식 녹음 스튜디오를 주었는데, 이때 영국 전역을 유랑하며 녹음한 것으로 만들어진 앨범이 O이다.


그의 음악이 창작된 배경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앨범 O는 '버스킹'의 정신을 담은 포크록 앨범이다. 앨범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더블린 거리의 어느 펍에서 라이브를 듣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정돈된 스튜디오에서 실험적인 사운드를 계산해내는 오늘날 팝의 시장에서, 날 것에 가까운 통기타와 보컬에 기반한 음악은 '미니멀'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의 미니멀은 의도적으로 최대치를 지워낸 결과가 아니다. 최소한의 조건에서 최대치를 지향하는 과정으로서 구축된 미니멀이다. 그러니까 그가 추구한 레코딩은 "우리는 미니멀해야 하니까 이거 빼고 저것 빼야 해"라기보다는 "우리가 갖고 있는 환경에서 그까지는 가져올 수 있어"라는 태도에 가깝다. 그래서 탄탄한 보컬과 어쿠스틱 사운드를 기반으로 첼로나 바이올린, 코러스 정도는 추가될 수 있고, 라이브는 '맥주 몇 잔에 곁들이는 무성의'가 아니라 '진심을 토해내는 무거움'이 된다.

 

 

 

 

앨범 O의 수록곡들은 모두 슬프다. 이별의 슬픔에 대해 노래한다. 피할 수 없는 이별을 직면하고, 지나간 사랑의 쓸쓸함을 곱씹으며, 마음속 서랍장에 숨겨둔 편지를 꺼내 읽는다. 잔잔하게 출발하여 중반부에 이르러 어김없이 절정을 달리는 노래는 슬프고 고독한 감정을 토해낸다.


"왜 내 슬픔을 당신만 아는 곳에서/빌려온 말들로 채워줬나요?/

당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면/왜 찬송가를 부르나요/

왜 나와 노래를 부르나요?" _ Delicate


"내가 너에게 주는 건 그저 내가 겪고 있는 것일 뿐/

새로운 건 아냐, 아냐 그저 찾는 것의 다른 면일뿐/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나를 피 흘리게 하는 것들.." _ Volcano


"여전히 내 입 안에는 약간의 맛이 남아있고/

여전히 내 의문에는 네가 약간은 곁들여있어/

여전히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말하긴 쫌 어려워.,," _ Cannonball


"마치 시간처럼/내 마음속에는/항상 시간이 있어/

그러니 날 지나쳐 줘/난 괜찮을 거야/그저 내게 시간을 줘.."_ Older chests


"누군가의 딸을 사랑하고/저를 허락하고/

당신 손을 놓을 수 없네요/주여,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_ Cold water

 

창작에는 크게 두 가지 기법이 있다. 하나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하는 방법. 또 다른 하나는 나의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들춰보며 뱉어내는 방법. 물론 이 두 가지 방법을 칼로 무 자르듯 구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데미안 라이스는 후자의 밑바닥을 보겠다는 심정으로, 마음속 우물의 심층수를 퍼 올리는 유형이다. 마음의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서, 벌거벗겨진 자신을 발굴하고, 그것에서 고독과 슬픔의 감정을 호소한다. 음악적 갈등과 유랑기로 빚어진 삶의 껍질을 벗기면서.

 

 

 

 

피곤함이 공허한 생각을 하게 만들고,

어딘가 처박힌 나 자신을 발견하지,

영감을 찾고자, 빛이 빈 공간을 채우지.

지금 내 밑으로는 물이 빠르게

차오르고 있어서 힘들어.

그래서 난 나의 에스키모 친구들을 보곤 하지.

내 기분이 좋을 때 말이야...

비는 진흙투성이의 길을 젖히고,

난 벌거벗겨진 나 자신을 찾지.... _ Eskimo

 

나는 앨범 O를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많이 들었다. 우연히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했던 그의 라이브를 들었던 게 계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시답잖은) 고민거리를 품고 늦은 저녁까지 태화강에서 자전거를 몰면서, 그의 음악을 각 잡고(?) 들었다. 돌이켜 보면 조금 쑥스럽고 웃긴 기억이기도 하다. 그때 내가 뭘 알았다고... 여하튼 그래도 나는 진심으로 들었고 즐겼었다. 그 당시엔 그가 음악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데미안의 음악처럼 나는 내 마음속의 불편한 진실을 들여다보려고 애썼었다. 아마 거기서 그의 음악과 나 사이에 어떤 마음의 주파수 같은 것이 맞춰졌을 것이다. 


소설가 김중혁은 '글쓰기'를 '지하 7층까지 내려가서 기어코 지하실 문을 열어보는 행위'에 비유했다. 정말로 그렇다. 예술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것을 몇 발자국은 더 나아가서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어떤 예술의 힘은 우리가 차마 마주하기 어려운 감정을 직시하는데서 비롯된다. '데미안 라이스의 고백록'과 같은 앨범 O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런 진심이 담긴 이 앨범의 20주년을 진심으로 기념한다. 그리고 제발 그가 최소 20개월 안에 새로운 음악을 가지고 나왔으면 하는 바란다. 이건 정말정말, 진심이다.

 

 

[정호익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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