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장벽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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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전 세계 12개 지역 상공에 정체 모를 외계 비행물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왜 지구에 온 것일까? 지구를 정복하기 위해서? 혹은 인류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그러나 비행물체 '쉘'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각국 정부는 이들과 소통을 시도하지만 도통 말이 안 통한다. 영화 속 주인공 언어학자 '루이스'는 이러한 차이를 뛰어넘어 그들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컨택트 Arrival>은 테드 창이 쓴 단편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이다. 소설과 영화의 기본적인 스토리는 동일하다. 그러나 영화는 원작을 재구성하여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냈다. 예컨대 소설에는 우주비행선이나 문자의 모양 등등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없다. 영화는 이러한 텍스트 속 상상의 영역을 새롭게 창조해냈다. 예컨대 타원형 모양의 우주비행물체(쉘) 디자인은 드니 빌뇌브 감독이 '15 에우노미아'라는 소행성 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아 구상했다고 알려져 있다. 소설에서는 외계인 '헵타포드'와 인간이 체경 looking glass라는 디스플레이 장치를 통해서 소통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영화에서는 인간이 직접 우주선에 들어가서 그들과 접촉한다. 헵타포드가 뿜어내는 원 모양의 문자 같은 경우는 각본가 '에릭 헤이저러'가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예 'Logogram Bible'이라는 문자 체계를 새롭게 프로그래밍했을 정도로 디테일하다. 이 과정에서 공학용 계산 소프트웨어인 울프럼 알파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 울프럼 형제가 많은 자문을 해줬다고 한다. 이렇게 공학적인 영감과 예술적인 고민이 교차하는 영역에서, 영화는 그 자체로 장엄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미쟝셴을 빚어냈다.
외계인을 다루는 수많은 SF 영화에서 '소통'은 생각보다 큰 주제가 아니다. 대게 이진법 등과 같은 수학적 언어로 소통이 해결되거나, 그들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여 습득하거나, 또는 소통의 여지도 없이 그들이 지구를 공격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외계인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소통의 간극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이 영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큰 골자가 되는 개념은 '언어 결정론'이다. 이는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어떠한 언어에는 그 언어를 구사하는 존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자연스레 반영된다. 예컨대 어느 나라에는 '눈 snow'을 지칭하는 낱말이 수십 가지가 존재하는 반면 어떤 나라는 눈을 그저 눈이라고 부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환경에 조응한 언어의 채택은 또다시 세상을 규정하는 틀을 만듦으로써 세상에 대한 인식적 틀을 만들어 낸다.
영화에서 '헵타포드'와 '인간'이 갖는 가장 큰 차이는 '시간에 대한 인식'에 있다. 인간은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인 틀에서 인지하고 인과론적 관계에 따라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헵타포드는 시간을 현재와 미래를 동시적으로 인식하며 목적론적 관계에 따라 세상을 바라본다. 이는 영화에서 헵타포드의 문자가 '원 모양'으로 디자인된 이유와도 이어진다. 끝도 시작도 없는 닫힌 도형인 '원'은 그 자체로 비선형적인 헵타포드의 시간 인식을 상징한다.
영화에서 헵타포드 언어를 습득하게 된 주인공 '루이스'는 헵타포드처럼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인간의 시간관'에서 해방됨으로써 루이스는 외계인과 인류 사이의 충돌을 막아낸다. 또 먼 후일 본인이 마주한 이혼과 딸과의 결별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을 미리 보게 된다. 여기서 루이스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결말을 미리 알고도 이안과 사랑에 빠질 것인가, 혹은 아픈 미래를 피하기 위해 다른 선택을 할 것인가?
일단 루이스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여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해석을 제기하고 싶다. 이는 원작소설이 다루고 있는 '페르마의 원리'란 개념에 기반한다. 햇빛이 물을 통과할 때 그 빛이 굴절하는 현상을 생각해보자. 빛은 공기와 물이라는 서로 다른 매질을 통과하기 때문에 굴절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렇게 꺾여서 빛이 나아가는 것이 물의 바닥에 도달하는 최단 경로이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러이러한 원인 때문에 결과가 도출된다'는 인과적인 추론과, '최대-최소의 원리에 입각하면 과정은 이러하다'는 목적론적 추론은 방향이 다른 것일 뿐 같은 결과로 귀결되는 동일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루이스의 선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순간의 판단이 사소한 차이를 빚어낼 수는 있어도 본질적인 삶의 경로를 뒤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헵타포드적 삶'은 인과론적인 전제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와닿지는 않는다. 미래가 과거와 현재의 과정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걸 알고 살아간다면? 무거운 운명론에 짓이겨 사는 게 재미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이는 내가 그쪽 삶을 경험해본 바가 없기 때문에 쉽게 평가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헵타포드 입장에서는 정해진 미래를 바람직하기 위해 이행하는 삶이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뒤얽혀 분투하는 우리의 삶'보다 낫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또 정작 영화 속 인간들은 동일한 언어관 속에 살아감에도 서로 제대로 된 소통을 하는데 실패한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방향과 방식이 어떠하건 각자의 삶에는 저마다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제에서 어쩌면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지 모를, 매우 다르지만 그 다름에 비해서는 생각보다 가까운, 그런 서로를 향한 소통을 시도하는 과정이다.
'자유의지란 실재하는가?', '세상은 결정론적인가?'.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에게 논쟁적인 주제이다. 영화 <컨택트>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가까우며 자유의지의 부재를 옹호하는 입장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도 삶의 긴박함이 있고 다양한 여지가 발생할 수 있다는 형태의 설명을 택한다. 정말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세상이 어느 쪽으로 어떻게 굴러가건, 저마다 삶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조건에서 이뤄지는 변동성이 참 많다는 사실이다. 루이스는 앞으로 벌어질 아픔이 눈 앞에 뻔히 보이면서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떠나 보내는 길을 택한다. 우리의 삶이 그렇다. 뻔한 실패가 보임에도 꿈을 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SF영화인 <컨택트>는 세상과 삶을 둘러싼 논리적인 화두를 던지면서 우리의 감수성에 호소한다. '이토록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감상적인 영화가 있을 수 있다니!', '어쩌면 허무맹랑하게 뻥튀기 될 수 있는 상상의 영역을, 이렇게 건조한 현실주의로 풀어낼 수 있다니!'. 보는 내내 머리가 말랑해져서 좋았던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드니 빌뇌브 영화를 기다리고 사랑하는 이유다.
[정호익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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