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존재를 향한 너그러운 시선이 밝히는 미래, '원더'

<원더>에서 그려낸 소수자와 주변의 삶
글 입력 2022.02.2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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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는 얼굴 기형 장애를 가진 소년 어기와 그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삶과 관계에 대한 영화이다. 어기가 가장 좋아하고 필요로 하는 물건은 우주인 헬멧이다. 그것만 있다면 어기는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우주인처럼 당당히 활보할 수 있다. 하지만 우주라고 편안한 유영만 할 수는 없는 법. 사회의 구성원인 어기는 결국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하기에 부모는 그의 홈스쿨링을 끝마치고 학교에 진학시키고자 한다. 운석충돌과도 같은 이 사건을 통해 혼자서는 경험하지 못할 다양한 감정과 관계를 맞닥뜨리는 어기. 영화는 그 과정을 담아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원더>에서 마음을 사로잡는 점은 장애를 가진 어기가 '편안한 공간'에서만큼은 굉장히 주체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장애에 대한 가족구성원들의 적절한 반응이 함께했기에 가능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장애에 대한 당사자의 반응 외에도 타인의 반응이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부분이다. 그들에게 어기의 얼굴은 하나의 특성일 뿐 장애가 아니었다. 다만 이런 환경을 목도하는 데에서 오는 편안함만이 영화가 가진 매력의 전부는 아니다. 더 큰 매력이 되는 지점은 플롯의 발견에 있다. 영화는 같은 사건에 대해 어기 외에도 여러 등장인물들의 시선과 서사를 제공하고, 이는 더 큰 주제의식을 만들어낸다.

 

‘사람을 단편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명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당히 말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대부분은 편협한 이해를 하기 마련이며, 대상이 소수자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는 마치 습관과도 같다. 관객은 어기를 지켜볼수록 그에게 이입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를 향한 부정적인 시선들에 비판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를 감싸기 위해선 당연하다는 듯, 무방비상태로 주변 인물에는 즉각적인 판단을 해버린다. ‘앞에선 웃고 뒤에서 욕하다니 형편없다’, ‘어기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다니 희생적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영화는 쉽게 판단해버린 인물의 관점에서 같은 사건을 되풀이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피어나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관객을 무참히 부끄럽게 만들어버린다.

 

 

 

입체적인 시각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플롯


 

한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다른 인물은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 습관을 플롯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영화는 마치 질문하는 것 같다. 장애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로 그들의 삶에 장애를 입혔는데, 왜 다른 이를 향해 다시 같은 짓을 저지르는가. 이것이 반복된다면 앞선 시선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먼저 어기의 시선이 아니었다면, 이해해보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 그의 삶에 조명을 비추는 일이 분명 필요하고 더 많이 이뤄져야 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조명을 필요로 하는 소수자들은 무수히 많고, 한 쪽에 밝아진 빛이 다른 영역으로 계속해서 번져나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단편적 시선의 구조 아래에서라면, 이는 아이러니하게 타인을 다시 어둡게 만드는 행위에서만 끝날 수 있다. 소수자가 겪는 불평등에 대한 편협한 시선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순간의 조명이라고 여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특정 부분만 밝게 비추는 무한한 ‘조명 놀이’와도 같다. 그러나 이는 애초에 동등한 위치와 분량의 시선이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결국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건 단순히 소수자에게 조명을 비추는 것만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게끔 점차 무대 전체의 불을 밝혀나가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존재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것은 입체적 시선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영화는 여러 인물의 관점을 동등하게 소개하며 역설한다. 이는 어기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다시 어기에 대한 적극적인 존중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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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각자에게는 수많은 서사가 존재하고, 개인은 그를 둘러싼 관계 속에서 결합하여 또 다른 서사를 만들어 낸다. 장애를 가진 이에게는 장애에서 비롯한 처절하면서도 감동적이고 숭고한 서사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의 친구 잭이 그랬듯 당연히 어기도 부적절한 판단을 하고 이는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판단이 부적절하다 하여 단순히 모질게만 평가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 역시 영화는 제공한다. 잘못된 판단이 극심하고 연속된다면 제동을 걸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조금은 너그러운 시선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그것이 결국 불을 밝혀나가는 자세가 아니냐고.

 

 

 

장애를 바라보는 두 시선, 불행과 불평등


 

이 지점에서 드는 의문은 근본적으로 왜 어기라는 인물을 그토록 이해하려 했냐는 것이다. 그가 장애를 갖고 힘겹게 살아가야하는 것이 불쌍해보여서? 필연적으로 아픔을 겪어야 하는 사회에 분노해서?


탈시설한 장애를 가진 동생 장혜정과 함께 생활하며 여러 장애관련 콘텐츠를 제작했던 장혜영은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애를 불행과 불평등 중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른 행동양식이 나타난다고. 간단히 말하면 불행은 장애를 개인적 차원에서, 불평등은 장애를 사회적 차원에서 바라본 것이다. 불행은 현상을 유지시키지만 불평등은 개선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드러낸다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의 입체적인 서사는 장애를 불평등의 관점에서 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어기가 삶에서 겪는 장애를 단순히 불행으로 봤다면 더욱 연민하게끔, 그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띄우고 그 속에서 겪는 아픔을 드러내며 흔한 스테레오타입을 만들어내기 바빴을 것이다. 영화로나마 그의 삶을 위로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곧 앞서 말한 조명 놀이로 이어지게 된다. 조명이 필요한 이들을 향해 잠깐씩 비추면 된 거 아니냐는 자세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빛의 확산’이 아닌 ‘빛의 이동’에서만 머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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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어기를 둘러싼 다양한 시선과 환경을 보여주면서 장애의 사회적 측면을 드러낸다. 그가 겪어야 했던 개별적 어려움들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발생하지 않았거나 큰 어려움이 되지 않았다. 전적으로 외부와 반응을 일으키며 극심해진 구조적 불평등에 가까웠다. 단순히 장애를 가짐으로써 겪어야 했던 반응들은 다양한 인물들의 서사가 합해지면서 얇아지거나 두터워졌다. 그 속에서 어기는 악화되었지만 분명 치유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차별의 가변적인 양상은 장애가 개인의 삶에서 발생하는 절대적 불운이 아니라, 이를 받아들이는 사회구조에 따라 변모하는 불평등의 요소임을 드러낸다.


우리 사회는 장애를 불행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 같다. 그들을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어왔고, 보통의 삶에서는 주체적일 수 없는 유리된, 분리된 존재로 만들어 왔다. 동정해야 하지만 일단 자신의 삶에는 포함되지 않는 어떤 먼 나라 이야기. 결핍되었지만 특정 부분에서는 굉장히 과잉된 시선. 그것이 장애를 다루는 현실이다. 장애를 불평등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평등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 그러기 위해 장애와 비장애 모두에게 동등한 분량의 기회와 서사를 제공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지향점이자 도착점이라고 영화는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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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연코 장애는 하나의 요소일 뿐, 그것이 존재를 이해하는 모든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기는 이성애 부모와 여성 형제를 가진 가정의 어린 남성이다. 그는 가족의 적극적인 돌봄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 또한 애정 어린 관심과 교육 속에서 과학에 재능을 보이며 스스로에게 당찬 성격을 지녔다. 어기 역시 이런 몇 문장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될 수많은 요소들의 결합체이다. 어기는 안전한 공간이었던 집 밖에서는, 작은 헬멧 속에 이토록 많은 서사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헬멧 속 어기는 비단 장애를 가진 이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폭력을 겪을 것을 두려워하는 모든 벽장 안에 있는 이들을 대변한 것 같다.

 

영화 속 언급된 법칙과 같이, 움직이는 물체의 속도와 방향은 외부의 힘이 없으면 변하지 않는다. 즉 한 개인의 특성이 장애가 되는 것은 그에 대한 사회적 반응을 만나는 지점부터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함은 강함에 있지 않고 힘을 바르게 쓰는 것에 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사람은 그 힘으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며 직접 본을 보입니다."

 

헨리 워드 비처의 말처럼, 상대적 권력을 지니게 된 자들이 벽장 속 존재들을 위해 자신들의 힘을 생활과 제도와 법의 영역에서 어떻게 적절히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꾸준한 논의와 적극적 행위, 겸손한 자세가 필요한 현재이다.

 

 

[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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