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길

글 입력 2022.01.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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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지만 눈앞에 놓인 길은 어둡다. 그걸 알고 있어서인지 유독 어쩔 줄 모르는 마음으로 연말을 보냈다. 하던 대로 한 해를 정산하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연초에 설레고 들뜨는 마음은 별로 느낄 수 없었다. 앞으로도 쉽지 않을 테니까.


어른이 되는 건 더 많은 이별을 겪고 견디는 일은 아닐까. 추석을 앞두고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어깨 통증으로 힘들어하신다. 아버지는 크게 앓으셨을 때 잠시 쓰러지셔서 마음이 무너졌다. 언니들은 한창 커가는 조카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많이 말랐다. 친구이자 동생인 강아지는 큰 수술을 두 번 하고도 매주 병원에 간다. 배에는 종양이 만져진다.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자연스럽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은 흐르고 모두와 평생 함께 할 수는 없다. 살아있다면 언젠가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소중한 존재가 사라진다고 혼자가 되는 건 아니다. 그간의 기억이 내게 남아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모두 힘들어할 때 단단하고 강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된다. 모두 어린 시절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처럼 돌려줄 때가 되었을 뿐이다. 다행이지 않나. 시간과 기회가 있다는 게. 그마저 없었더라면.


생각보다 멀쩡하게 지냈다.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는 말을 주문처럼 간직한 덕분이었다. 오히려 생각보다 괜찮아서 감정이 메마른 건지 단단해진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연말이 되고서야 모든 게 착각이란 걸 깨달았다. 그전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눈물이 고이면 흘려 넘기면 됐지만 연말에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전례 없던 연말 증후군인가? 왜 그러냐고 물으면 이유를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새해가 되고 나니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힘들었던 건 두려움 때문이었다. 소중한 사람들, 든든하던 주변이 흔들리는 모습에 혼자 남은 폐허가 떠올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도 나를 버리지 않았는데 버려질까 걱정을 했다. 누구나 약할 때가 있고 약해지는 건 자연스러운데도. 죄책감에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누가 잘못해서가 아닌데도, 멀쩡한 내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게, 그러면서도 지칠 때 불쑥 드는 몹쓸 생각으로.


정체되었다는 불안함도 있었다. 그리 대단하지 않은 일을 하면서도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벌렁거리는 게 부끄러웠다. 사소한 것에 분개하는 게 싫으면서도 마음 놓고 풀지 못한 감정이 되돌아온다. 혼자만의 시간이 좋으면서도 때로 초라해지는 건 별 수 없었다. 별생각 없는 안부처럼 좋은 소식 없냐는 말에는 에이, 코로나19에는 무소식이 희소식이요, 건강이 좋은 소식이라고 넙죽 답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툭툭 불거져 나오는 어머니의 한두 마디 걱정이,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 쉬고 있냐는 동료의 악의 없는 말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기 전에 먼저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경계를 풀지 못한 것 역시 사실이다. 상처를 주고받았지만 상대방은 저 멀리 앞서 나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기도 했다. 나만 거대한 벽을 넘지 못한 기분이었다.


거울에는 움츠린 얼굴이 있었다. 그려왔던 멋진 어른은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건사하기는 것도 쩔쩔맨다. 여전히 혼자 그 자리에서 아무런 성장도, 발전도 없이 버티고 있는 건가. 긍정 회로를 돌려보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나는 망했고, 이번 생은 망했다는 해석일 뿐이다. 생사를 앞다투는 심각한 상황도 아니고, 당장 모두와 멀어지는 것도 아니고, 내 불행이 세상 그 무엇보다 커 보이는 건 내 눈에만 그렇다.

 

나의 세상은 무너지고 있지만 무너지지 않는 세상도 없다. 내 부족한 면이 너무나 싫은 건 스스로에게 기대하고 있는 게 역으로 너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뚜렷한 성과가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마도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는 건 큰 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체 그 멋진 어른이란 게 뭐길래.


누군가 일을 하다 상황이 좋지 않았을 때 어떻게 마무리했냐고 물었을 때, 이전의 나라면 울어버렸겠지만 이번엔 울 시간이 없어서라고 답을 했다. 멋 부린 허세일 수도 있지만 쌓여있던 눈물과 부담감이 연말에 몰아서 찾아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 그게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고. 모든 걸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언젠가 그때 그래서 그랬나 보다 하면 될 일이다. 굽은 어깨를 펴고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때로 부끄럽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부끄럽거나 초라하지 않다. 그동안의 선택도 후회되진 않았다. 폐허가 되는 건 어렵지 않다. 어렵겠지만 분명히 이 길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길이 끝나지 않을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때로 무너지더라도 길을 걸어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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