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애 無礙 2

이제, 악흥을 좇아 실컷 우스워지리라
글 입력 2022.01.23 16:1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찬 겨울, 억지 펴 본 가슴 안으로 시린 것이 가득 들어차 좋다. 폐부를 씻기는 맑은 것들, 이 감각과 같이, 가슴에 설기인 넝쿨을 찢으며 더 넓은 가슴으로 세상 앞에 서기를 바란다. 악흥을 좇아 마음에서 솟는 것들을 오롯이 몸에 담아 발산하기를 바란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기를, 그 아래 나와 내가 마주하여 서로 미소 짓기를…. 그로써 나를 사랑하고, 이제 너를 사랑하고, 또 기꺼이 이별할 수 있기를. 자유롭기를.

 

- 지난 에세이, 무애 無㝵 中

 


마음을 지키기 위해 마음 안에 설치된 각종 제약을 느끼는 중이다. 무의식과 의식 가운데 설치된 심리적인 기제들을 내가 느끼고 있다는 것은, 이질감을 통하여 그 존재를 깨닫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렇지 않고선 웬만큼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것은 소리 없이 뿌리내려 있는 것들이다. 슬며시 자라나서는 나를 이루고 나를 규정하고 나를 제약하는 것들. 선을 넘지도, 우스꽝스러워지지도, 예측 불가하지도 않게끔 나를 규정하는 것, 이 모종의 자기개념과 강박들은 내 작은 마음을 지키기 위한 펜스이다. 조그마한 풍파에도 아파하는 마음을 위하여 나를 예측 가능하고도 절제된 사람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을 테다.

 

 

 

나의 청춘, 나의 경계



이 '경계'에 대해 생각하기 위하여, '경계 안'의 나는 어떠한 인간이었는지를 기억해본다. 대학 시절이다. 기억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나는 다람쥐길에 버려진 낙엽을 걸으며, 어떤 생각에 사로잡힌 채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다. 계절은 늦가을이 적당하다. 아마 비가 왔던가, 모쪼록 그랬을 테다. 무엇에 사로잡혀 있었지? 변치 않는 것들에 대한 자기 문답,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 참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이상과 꿈과 현실... 이 모든 시시각각 떠오르는 단편들을 아우를 수 있는 하나의 생각, 기저에 있는 하나의 욕망이란 '변치 않는 사랑과 그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나'에 대함. 나는 그런 이룰 수 없는 것들을 공상하며 그 시절을 재웠다.

 

여기까지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럽지만, 조금 더 톺아볼까. 사랑은 각각 한 여인에 대함, 그리고 뭇사람들에 대함. 나를 듣고, 날 같이 알고, 계속해서 곁을 지킬 뭇 사랑들을 그리며, 비로소 그 안에서 하나둘 표현제약과 강박을 벗어던지며 자유로울 나를 그리었던 것 같다. 비로소 피어나 다시 그들을 듣고, 그들을 알고, 그들의 곁을 지킬 나를 떠올려보며 추운 늦가을을 걸었나. 추위를 밝히는 성냥 속 환영 같은 것들, 과연 그 얼마나 실현 가능한 것들인지…

 

 

[크기변환]henry-be-6mwtDZUOFrw-unsplash.jpg


 

변치 않는 사랑이란 완연한 이상 개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것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했다. 인간으로부터 멀었기에 이상은 드높아지는 건지, 바라건대 이상이 드높아 계속해서 사람 속에서 목말랐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 알 수가 없다. 결국 이런 공상들을 가슴에 품고, 그것에 대해 계속 골몰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것을 그리워하면서도 그들로부터 내가 멀리 있었음을 시사한다는 것. 이상 개념으로서의 사랑, 그것에 대한 좁혀지지 않는 이 거리감과 갈증이 어디서 시작된 것이었을지 아직 모르겠지만, 이상 개념과 모순들에 대하여, 나는 그 속을 살며 그 속을 열심히 궁리해 헤집어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 이별이 두려운 것인지, 고독이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나의 초라함이 두려운 것이었던지... 여하간 내 바라는 사랑은 너무 아득했고, 그에 비친 나는 너무 자그마했다.

 

모순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누구에게나 이중성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너무 극심하다고 느낀다. 사람을 많이 사랑했지만, 사람에게 쉽게 적의가 끓었고, 일견 문학을 사랑하는 이의 면모가 보이는가 하면, 어느 날에는 갑자기 시장판의 잡배같이 거칠었다. 어떤 때에는 지나치게 세심하고, 어떤 때에는 서리 같이 무심하다. 마음은 상처에 쉽게 매몰되는 한편으로 겉치레는 더 표독스러워 갔다. 점점 가시가 돋아나는 얼굴, 그리고 이 모든 스스로를 시종 관찰하고 있었다. 이런 나를 아주 모르는 것도, 혹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아니. 멈추려고, 바꿔보려고도 했지만, 천성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을 알게 되었다.

 

너무 쉽게 사랑하였기에, 서로 간의 속도를 맞추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기에 언제나 돌아오는 길은 쓸쓸했다. 이해받지 못할 이상을 안고 설레는 문전을 서성이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혹여 너는 나를 듣고 알까 하는 기대감은 괜히 돌아오는 길의 나를 더욱 초라하게 하는듯했다. 이에 내가 알게 된 것이란, 또한 주변의 사랑받는 이들을 바라보며 내린 결론이란, 내가 쉬이 이해되지 않는 짐승이라는 사실 하나와 내가 너무 진지한 사람이요, 무거운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 마지막으로 내가 너무 큰 사랑을 안고 있다는 사실 하나.. 이런 전처로 내가 네게 닿고,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고, 마침내 사랑하고, 피어나기까지의 이 일련이 내게는 너무나도, 너무나도 아득하다.

 

 

[크기변환]esther-ann-EbBiu1tYElI-unsplash.jpg

 

 

어쩌다가 이번 글이 재미도 없는 고백록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은 나의 청춘이고, 내 자취이다. 그 과정 속 쉬이 초라해지는 나를 보다 견디다 못해 여러 장치는 개발된 것 같다. 쉽사리 움직이지 않고, 너무 쉬이 사랑하지 않고자 애쓰고, 쉬이 다가가지 않고 기다리게끔 붙잡고, 그때그때의 나를 계속 관찰하려 하며, 다가올 결말을 예측하려 부던 머리를 굴리게끔. 초라함이라는 결말을 피하기 위해, 나는 이렇듯 경직되어 간 것 같다. 이것이 나의 '경계'이다. 즉 경계는 제멋대로 뻗어 나가려는 마음을 붙잡아두는 울타리. 해변으로 마구 내달리는 아이를 붙잡으려는 어느 어머니의 마음같이, 고꾸라질까 사고가 날까 애 졸이고 염려하는 그런 마음이다.

 

그래서 이 경계가 새삼 내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질문을 해보면, 이렇게 내재화한 경직된 내가 성가신 이유일 테요, 성가심을 느끼는 것, 그것은 내가 다시 움직이며 경계 바깥을 꿈꾸고 있다는 방증일 테다. 그러나 왜? 이 긴 글은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왜 느닷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자기 문답의 과정인 것이다.

 

왜? 무엇이 바뀐 것일까? 이 이질감은 성가심으로써 먼저 다가왔다. 어느 출근길 아침, 마음의 거동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제약으로서. 이 속박감과 무거움, 자기구속으로 인해 아무것도 마음껏 펼치지 못하며, 일일이 자기검증의 과정을 거치고 적격판정을 내린 다음의 행동들에는 자연스러움과 신속함이 결여된다. 늘 타이밍을 놓친 뒤 우물쭈물하다간, 이내 삼키게 되는 생각들. 나는 어떤 새로운 환경 속, 새로운 욕망을 발견함으로써 경계 바깥을 꿈꾸게 되었을까? 아니. 환경은 바뀌었지만, 마음속에 아무런 새로운 것일랑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정, 내게 더이상 이러한 울타리가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눈을 감아, 내 안으로 들어가 짧은 과거 속 나를 반추하며, 지금 내 안에 숨 쉬는 욕망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겠다. 늘 아우성으로 차있던 내 욕망의 도가니, 잊을 수 없는 것들을 미루어 유폐해둔 곳간이 조용하다. 조용하다. 이것만으로도 벌써 내게는 어떤 대단히 서늘하고도 불길한 느낌이 찾는다. 짧은 과거 속 나, 언제고 단 한 번이라도 내 안은 조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 사라진 지도 모르게, 욕망들은 사라져 있었다. 두 개의 몽타주는 소름 끼치도록 다른 색깔을 띠고 있다.

 


brusk-dede-FnFlm1cPfjw-unsplash.jpg

 

 

물론 일상적 욕구들쯤이야 육신이 숨 쉬는 한 끊임이 없는 것이려니 사라진 것이 아니겠지만, 그보다 더 치열한 것, 나를 꿈꾸게 하고 아프게 하고 나아가게끔 채찍질하고, 기꺼이 살아가게끔 하고도 일순 만사 두렵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사라져 있었다. 그러니까 '변치 않는 사랑'과 같은 것들이. 그렇다고 내가 지금을 행복해하며, 무언가 충족된 것은 또 아니다. 정말이지 작별도 없이 사라져 있는 것이다.

 

어쩜 불가한 것들, 주변에서 참 낭만적이라는 조언 아닌 조언을 들어가면서도 품고 있던 것들, 아니 품에서 떼어낼 수 없던 것들. 지난번 어떤 글에서는 이 불가한 꿈들이, 낭만이 사라진 것을 두고 어쩌면 내 청춘이 지나가려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 보기도 했다. 굳이 주판을 튕기며 모든 것들의 손익을 재는 수준까지는야 아니지만,  맹목적으로 불타는 마음이 사라진 시기 지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일견 서글프지만, 비로소 나는 고요하게 여러분을 바라볼 수 있다. 너무 큰 사랑이 가지는 추동력, 경계는 그것을 막고자 생성되고 그 크기만큼 비대해지는 것이었다면, 이상 내겐 그 경계가 필요치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남은 것은 경계의 잔상과 습관, 이제 이 수풀 우거진 철망을 거두어야겠다는 생각은 뒤따른다.

 

 

 

이상과 경계, 꿈과 강박



불가한 꿈과 '경계'인 자기강박의 관계성. 드디어 이런 것들을 내 안에 던져본다. 담뱃불이 채 꺼지기 전만큼 곧, 어떤 불길한 힌트가 뇌리를 잠깐만 스치고 간다. 내게 자기강박이 생긴 까닭, 그것은 말했듯 내가 너무 큰 사랑을 바라면서도 너무 작은 가슴의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쉽사리 아무런 사람에게나 나를 의탁하지 않으려는 격리조치이기도 했다. 웃긴 일이지. 이런 내게도 가끔은 어떤 사람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기도 했더랬다. 그것은 꼭 이성 문제만을 꼬집어 하는 말은 아니다.

 

사람을 사랑한 만큼 사람을 그리워하며 시절을 보냈다지만, 내가 절대적 고독 속을 살아온 것만은 또 아니었다. 이따금 어떤 이들은 나를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개중엔 어느샌가 자연스레 친해져 버린 '그늘 없는 사람들'과 두려운 손으로 내 소매를 꼭 말아쥔 '그늘뿐인 사람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내게 무언가를 바라는 눈빛을 띤 이들도 있었고 내가 아니라 그저 말동무를 필요로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나를 찾아온 이들, 내 자기강박 속에서 희한한 평안과 편리를 느끼는 그들이 또한 내 곁을 하나 둘 메워가고 있었다.

 

격리조치, 그래 이건 참 써놓고 보니 부끄러운 말이다. 그러나 나를 찾아온 그들을 통해 절대적 고독을 벗어날 수 있었음에도 계속이 다른 누군가를 꿈꾸고 있었다는 것, 그것은 내가 그들로부터 충족 받지 못했음을 뜻한다. 사람 사이에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일랑 없을 테다. 뜻 맞고 말 통하면 장땡인 것, 이야기나 잘 통하면 내가 너를 찾고 너가 나를 찾으며 캘린더에 약속을 채워나가는 것이 단편 사람 사이라고 생각하는바, 그것이 모이면 더욱 좋을 일이리라고 생각도 해보았다.

 

써보니 더욱 별것 없는 일, 그럼에도 나는 사람들 속에서 목말랐다. 언제나 나를 찾아온 이들의 앞에 서면, 그들 눈빛에 비치어 있는 나를 본다. 어떤 이는 내게 거친 사내를, 어떤 이는 우수에 찬 청년을, 어떤 이는 자신만의 소신 속을 살아가는 사내를 보았고 또는 자신을 듣고 이해해줄 오빠를, 흔들리는 자신을 바로 세워줄 신념을 바라기도 했다. 그 모두는 그들의 눈동자에 포착되어 깃들어 있는 나, 그러나 파편이다. 그리고 그 안에 초라한 나는 지워져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지워져 있길 바라는 이것, 여기까지가 모두 나이다. 그리고 왜인지 나는 그들 앞에서 그들이 바라본 바인 파편으로만 존재하고자 했다. 말한즉, 너무 모순적인 사람이기 때문일 테지. 자기강박의 첫 번째는 여기서 시작한다. 한 번에 하나의 사람으로만 기억되고자 한 것. 각자 기대한 나, 그 이외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리라 예단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잘 들었던가? 반쯤은 성공한 것 같다. 각자는 마음에 무거운 것을 안고 있을 때 나를 찾으면, 나는 그들을 듣고 그들의 눈빛에서 감도는 것들을 안기어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들었던가? 그랬던 것 같다. 다만 내가 이해되기엔 너무 많았기에, 그들은 내 곁을 지켜도 보며 어디선가 들어봄 직한 보편적인 조언과 충고 몇 마디를 건네곤 하다가 술잔이 식을 때쯤 이별했다. 술을 마셔도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어쩜 너무 큰 갈증을 안고 있었던 것, 이것이 자기강박의 두 번째 까닭이다. 투정을 부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크기변환]jayy-torres-3yhTZ6sYGfs-unsplash.jpg

 


그래서 모두와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 단순하게 피오르는 이끌림들로부터 나를 격리시키고, 너무 깊이 다가오는 마음들을 물리쳤다.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과 감당 가능한, 예측 가능한 범위만큼만 관계선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자기강박의 세 번째 까닭이다. 이쯤 와서 되돌아보자면, 내게 있어 사랑이라는 개념은 상호 충분한 이해와 신뢰의 토대 위에 비로소 경계를 허물고 그 위 나를 완전히 던지는 것이 아니인가. 그것은 모험이고 위험함이다. 그렇다면 나는 실패할지도 모를 사랑이 일으킬 고통을, 떠안을 수 없다 여기고 있는 것이다.

 

'불가한 꿈'이라 위에서 수차례 언급한 것,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꿈은 실패하지 않을 완전한 사랑에 대한 이상 개념이자 공상이다. 보았듯 이것은 자기강박을 이해하는 단초이자, 그 역. 한 번에 하나의 단편적 모습만으로 기억되려고 한 것, 너무 큰 갈증을 안고 있었던 것, 이해할 수 있고 감당 가능하며 예측 가능한 것들만을 받아들이고자 한 것. 그 역의 자리에는 이 모든 것을 대체하거나 해소할 수 있는, 불가한 상승 개념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강박이 깊은 만큼 그 반대편으로 자라나는 꿈들은 더욱 아득하다. 불가한 꿈, 이상 개념들은 차츰 떠올라 별자리가 되어 나를 응시한다. 아예 닿을 수 없기에 아름답기만 한 것들, 불가하다 여기기에 성립되는 낭만적 환상으로서...

 

**

 

타는 목마름, 낭만이 자취를 감춘 이제는 더 늦기 전에 꿈과 강박을 깨어 순간을 살아보고자는 생각, 오늘은 딱 여기까지로 종착한다. 오랜 마음이 변화하려고 하고, 나의 세계는 깨어져 다음의 알 수 없음을 향해 치닫으려고 한다. 20대 전반을 통해 형성되고 지탱해온 가치관과 세계관이 변모하려는 지금, 글은 내가 아는 한 가장 멀리까지 닿을 수 있는 대화수단이다. 오늘의 나는 할 수 있는 전부를 뱉어낸 것 같다. 이 긴 글 끝에 나는 어떤 결론에 닿을지를 기대하며 다음 편을 준비해야겠다.

 


ashwini-chaudhary-BT5YFMewbCo-unsplash.jpg

 

 

[서상덕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0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