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러게 니가 조심했어야지 [영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비난하는 당신들에게, <프라미싱 영 우먼>
글 입력 2022.01.2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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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자들 생각하느라 바빠’라는 가사가 담긴 찰리 xcx의 ‘boys’가 흘러나오면서 뮤비 속 환상에만 존재할 것 같은 남자들이 아닌 현실적인 몸매의 남자들을 길게 보여준다. 강렬한 첫 장면은 시작부터 내 기대감을 높였다.


의대에 재학하며 전도유망‘했던’ 여성 캐시는 같은 의대 동기이자 자신의 반쪽 같았던 절친한 친구 니나의 죽음으로 의대를 자퇴한다. 자퇴 후 의대와는 거리가 먼 동네 카페에서 일을 하는 캐시는 밤마다 클럽에서 술에 취한 척하고, 이를 노리고 접근하는 남자들과 함께 밖을 나간다.

 

접근하는 남자들의 수법은 하나같이 똑같다. 일단은 나도 집에 가는 길이고 많이 취해 보이는데 내가 데려다줄까?라며 정말 집에만 데려다줄 것처럼 상냥하게 물어본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너네 집보다 우리 집이 여기서 좀 더 가까운데 괜찮으면 갈래?라고 물어보지만 긍정의 대답이 없어도 답은 정해져 있다.

 

남자의 집으로 가면 술을 더 따라주고 예쁘다고 말하며 다짜고짜 키스를 해온다. 자연스럽게 침대로 데리고 가서 옷을 벗기며 인사불성이 돼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도 모르는 사람과 성관계를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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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한 척했을 뿐인 캐시는 한 명도 빠짐없이 이렇게 접근해왔던 남자들이 성관계를 맺으려 할 때쯤 술에 취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정확한 발음으로 지금 뭐하고 있냐고 묻는다.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여자랑 한 번 하고 팽할 생각이었던 남자들에게는 고작 자신의 뜻대로 안 되는 이런 상황이 공포에 포함되는 게 웃겼다.


캐시가 술에 취한 척 남자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이유는 니나의 죽음에 대한 복수 때문이다. 의대생 시절 니나는 몸을 가눌 수 없이 술에 잔뜩 취한 적이 있었는데, 같은 의대생 남자 동기인 알 먼로가 니나를 남자 기숙사로 데리고 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눈앞에서 강간을 하고 동영상까지 찍혀 희롱 당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니나는 과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는 전도유망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시선을 견딜 수 없어하며 자퇴를 비롯, 목숨을 끊는다. 캐시는 당시 니나가 처한 상황을 재연하듯 술에 취한 척하며 복수를 한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복수를 했는지는 보여주지 않아 아쉬웠다.


캐시는 니나와 관련된 인물들이 아니라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복수를 하고 있었지만 카페에서 의대생 동기 라이언을 만나며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준비한다. 라이언은 캐시에게 의대에 다닐 때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그만두게 돼서 연락을 못했다느니 이런저런 말을 하며 데이트를 신청한다. 캐시는 처음에는 라이언을 경계하지만 니나가 그런 사건에 처했을 때 라이언은 없었고, 다른 남자와는 다른 듯해 마음을 연다.


의대생 동기들과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변호사, 사건을 덮으려고 했던 학장을 차례대로 만난 캐시는 니나와 함께 동기 때 친하게 지냈던 매디슨을 만난다. 매디슨에게 혹시 하는 마음으로 그때 사건 기억하냐,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지만 매디슨은 니나는 평판도 안 좋았잖아, 그만큼 술 먹은 게 잘못 아니야?라는 말로 화답한다. 화룡점정으로 그땐 어렸잖아라며 묘하게 가해자의 편을 드는 말까지. 이 영화는 하이퍼 리얼리즘이다.


남자들이 이렇게 말하면 그래 너네가 그렇지, 기대도 안 했다는 마음으로 대꾸할 가치가 없어서 말을 돌리고 말 텐데 같은 여자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그래서 캐시는 이래도 남 일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듯 매디슨에게 계속 술을 먹이고 미리 남자와 입을 맞춰 호텔에 데려가라고 시킨다.

 

캐시는 복수를 하기에는 너무 착했는데,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친구라는 포지션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캐시가 대부분의 여성들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호텔에 데려간 남자에게는 매디슨을 돌봐주라고 부탁했고, 좋아하는 아이돌을 빌미로 학장의 딸을 납치해서 남자 기숙사에 데려다줬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식당에 앉혀 놨다.

 

 

마지막 복수를 위해 간호사로 분장한 캐시가 알 먼로의 총각파티에 가는 장면.

바이올린으로 연주된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Toxic이 이렇게 스산한 음악이 될 줄.


 

하지만 사건의 가해자인 알 먼로와 방관자들, 자신은 관련자가 아닌 척했던 라이언에게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복수에 성공했다. 캐시가 복수를 기록하는 수첩이 있는데, 그 수첩에 작대기가 꽤 많이 그어져 있음에도 아직까지 캐시가 경찰에 잡히거나 하지 않았던 게 약간 현실성이 떨어져 알 먼로의 총각파티에서 이야기가 그렇게 진행됐을 때 캐시가 살아 돌아오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정말 영화가 그렇게 끝나서 마냥 유쾌한 복수를 보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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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를 베개로 눌러 죽인 죄책감 때문이 아닌, 곧 와이프가 될 약혼녀가 알면 어떡하지? 경찰이 알게 되면 앞으로 내 커리어는 어떻게 되는 거지? 만 걱정하는 알 먼로와 그런 알 먼로에게 잘못 없다며 달래주는 그의 절친 조는 역겨움 그 자체였다.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한 캐시가 미리 발송해 놓은 예약 문자로 경찰이 알 먼로를 체포하며 영화가 끝나지만 프라미싱 영 맨인 알 먼로는 보석금을 잔뜩 주고 풀려나온 후에 의사로 잘 먹고 잘 살지 않을까.


인상 깊었던 장면도 많았고, 아쉬웠던 장면도 많아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로 나왔으면 더 좋았을 것 같지만 남의 일이라고 쉽게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꼭 한 번은 봤으면 한다.

 

 

[신민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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