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종말이 만들어 낸 기묘한 유토피아 -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
한 달 후, 소혹성이 지구와 충돌한다. 갑작스러운 멸망 선언에 고등학생인 소년 에나 유키는 특별히 절망하지 않는다. 학교 폭력 피해자로 이미 충분히 궁지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깡패 메지카라 신지도 마찬가지. 사회에선 아무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아, 살인 청부까지 자포자기해 받아들여 저지른 마당에 지구 멸망 선언은 어이없기만 하다. 또한 미혼모와 거식증에 걸린 인기 가수까지, 망한 인생의 표본 같은 사람 넷이 멸망 이전 마지막 한 달을 보내는 기묘한 희망의 이야기.
1.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 샹그릴라 - 고등학생 유키의 이야기다. 유키는 미혼모 아래에서 가난하게 자랐으며, 남들보다 키가 작고 통통하다. 성격 또한 늘 주눅 들어 있기에 소위 말하는 일진들에 의해 따돌림을 당한다.
따라서, 소혹성이 지구에 접근하여 인류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 안도한다. 지구가 멸망하는 것은 유키의 오랜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키는 유키가 짝사랑하는 후지모리를 지키기 위해 카오스 상태에 빠진 도쿄로 간다.
도쿄로 가는 길, 열차가 멈추어 선다. 그리고 유키는 암흑 속에서 후지모리 일행에게 전화를 걸어가며 뒤따라가던 중,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고 겁탈당할 위기에 놓인 후지모리를 발견한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서며 가지고 온 식칼을 휘두르고 몸싸움을 벌이다가 자신을 괴롭히던 동급생을 살해하게 된다.
◈ 퍼펙트 월드 - 신지의 이야기다. 그는 질 낮은 야쿠자로 무엇에도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인 불혹의 나이에도 변변찮은 삶을 산다. 소혹성의 충돌을 한 달 앞둔 시점, 그는 선배에게 속아 아내와 딸이 있는 타 조직의 두목을 살해하게 되고, 죄책감에 하루하루를 낭비하다가 젊은 날 만났던 시즈카를 떠올린다.
시즈카는 신지를 피해 도망갔던 여자다. 따라서 신지는 그동안 그녀를 찾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그러나 멸망을 앞두고 다들 자포자기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지막 순간을 지난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이들이 많았기 때문인지 관공서의 직원은 쉽게 시즈카의 주소를 알려준다.
◈ 엘도라도 - 시즈카의 이야기다. 시즈카는 유키의 어머니이자, 신지의 애인이었다. 신지와 함께 지내며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신지는 자신의 아버지가 신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폭력으로 그녀를 지배하고자 했고, 시즈카는 배 속에 있는 유키를 지키기 위해 신지를 떠난다.
집으로 찾아온 신지와 만난 시즈카는 유키의 연락을 받게 되고, 함께 유키를 찾아가기로 한다. 가는 도중 둘은 친절한 노부부가 운영하는 국숫집에 들른다. 그러나 시즈카와 신지가 잠시 일을 보고 돌아온 사이 둘은 한 무뢰한에 의해 살해당한다. 시즈카와 신지는 그 무뢰한을 죽인다.
◈ 마지막 순간 - 여가수 Loco의 이야기다. Loco는 원래 지극히 평범한 소녀였다. 그러나 한 프로듀서를 만나고 일약 스타가 되어 10대 여아들의 우상이 된다.
그러나 그녀의 이력이 화려해질수록 그녀의 삶은 피폐해진다. 그녀는 지독한 외모 강박에 시달리게 되고 점점 예민해져 간다. 그것에 지친 그녀의 가족들과 고향 친구들은 하나둘 그녀의 곁을 떠난다.
그러던 중 Loco는 유부남과의 성스캔들에 휘말리게 되고, 그것이 모두 자신이 전적으로 믿던 프로듀서의 소행임을 깨닫고 그를 둔기로 살해한다.
2. 가장 찬란한 종말
덧말) 2021년 1월 12일에 작성된 김혜원 전문 필진의 기사 제목을 빌림
◈ 살해의 체험 그리고 각성
소설의 모든 장에서 ‘살해’ 모티프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공들이 각성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양상은 1장 ‘샹그릴라’에서 유난히 두드러진다.
유키는 유키 자신과 유키가 사랑하는 후지모리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한 악한을 살해한다. 이러한 살해는 책 속에서 지속해서 언급되는 ‘기사가 악한을 처치하고 공주를 구한다’라는 이야기의 흐름으로는 필수적이다.
이때, 유키의 살해 행위는 악한을 해치웠다는 것 이면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바로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다. 헤르만헤서의 <데미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는 인간의 몸에 수탉의 머리를 가진 신이다. 양손에는 방패와 채찍을 들고 있는데, 이는 각각 힘과 이성을 상징한다. 이러한 아브락사스는 여호와와 같이 완전한 선도 아니며, 사탄과 같이 완전한 악도 아니다. 이를 미루어 칼 융은 아브락사스를 통해 인간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바도 있다.
어차피 멸망까지 한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 힘들어도 참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유키는 그 남은 한 달 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내고 영웅으로 거듭난다.
다른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그래왔던 것처럼 완전히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 속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으며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그 평화를 깨고 우물 밖으로 나와 더 넓은 세상을 향한 여로에 오른다.
◈ 종말이 만들어 낸 기묘한 유토피아
앞서 살펴본 각성과 성장에는 특별한 배경이 따른다. 바로 ‘지구 종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지구 종말’은 각 인물의 서사에 스며들어 ‘살인’이라는 금기에 예외를 만들고, 씻지 못할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그들을 이해하고 응원할 수 있도록 만든다.
내용적 측면에서도 주목할만하다.
소설 속에서 지구 종말이란 배경은 모든 인물을 같은 선상에 둔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또한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는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가 등장한다. 그 살인마는 동전을 던져 표적의 생사를 결정한다. 이는 죽음의 속성에서 기인했다. 가는 데에 순서 없다는 말이 있듯이, 그것은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도 지하철의 노숙자도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다. 완벽한 평등인 것이다.
이는 기존에 있던 “평등”의 해석을 완전히 뒤섞은 것이다. 이로 인해 만들어진 카오스는 왕따를 당하던 고등학생,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깡패, 홀로 아이를 기르는 미혼모, 거식증에 시달리는 여가수를 한곳에 모이게 하고, 이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유대를 형성한다.
또 다른 코스모스가 만들어진 것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자체를 두고 보면 색다르다. 그러나, 각각의 챕터를 뜯어 보면, 그저 원래 있던 이야기를 재현할 뿐이다. 특히 소설 속에서 큰 줄기를 담당하는 ‘샹그릴라’, ‘퍼펙트 월드’, ‘엘도라도’를 관통하는 서사 속에서 인물들은 그 속에서 현실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대신 서사 속에서 각자 맡은 역할 만을 보여줄 뿐이다.
‘샹그릴라’의 경우, 태곳적부터 존재했던 드래곤 슬레이어 서사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간다. 학교 속 생태계라는 설정을 추가해도 라이트 노벨들에서 숱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속에서 유키와 후지모리는 기사와 공주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퍼펙트 월드’와 ‘엘도라도’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챕터에서는 가정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부정하던 인물들이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가족 서사의 전형이다.
이러한 평면적 인물들은 지나친 성역할론이라는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소설의 주제가 주제인 만큼 이러한 부분은 다소 아쉽다.
[신동하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