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가장 찬란한 종말 -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삶에 집중하는 순간의 희망
글 입력 2022.01.12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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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다. 몇 년 전에는 제야의 종도 찾아보면서 올해는 무언가 바꾸리라는 다짐을 했는데 올해는 그런 것도 없었다.

 

수능 날이 기억난다. 세상이 크게 바뀔 거 같이 굴던 수능이었는데 하교하며 얼마나 허무하던지.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더라. 새해도 비슷하다. 12시가 되면 신이 나서 연락이 드물던 친구에게까지 새해 복 많이 받으란 문자와 덕담을 보냈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대화는 잠깐뿐이고 1월 3, 4일이 되면 다시 평상시처럼 연락이 드문 친구로 돌아간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렇게 바뀌지 않는 세상이기에 많은 사람이 이런 상상을 했다. 지구가 좀 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자기 직전 다음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던가, 중요하고 끔찍한 일을 앞두고 행성이 부딪히길 바란다던가, 행복한 시간이 부서지는 게 무서워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원하다 둥의 파격적인 생각 말이다.

 

종말에 대한 기대는 예언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1999년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설처럼. 진심일 때도 아닐 때도 있었겠지만 그런 기대와 소원은 번번이 실패한다.


 

- SOS 지구, SOS 지구, 발신자 나. 긴급사태 발생.

- 지금 당장 폭발해서 인류를 멸망시켜주세요.

좋아하는 소녀에게 무시당했다. 초등학교 남학생이 지구 폭발을 바라기에는 충분한 이유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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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도 모두와 비슷한 이유로 지구 종말을 바라는 소년이 있다. 좋아하는 소녀에게 무시당한 초등학생 에나 유키다. 모두가 겪은 듯이 지구는 그가 고등학생이 되도록 소원을 이루어주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에나 유키의 지구가 소행성과 충돌할 위기에 처한다. 정확히 한 달 뒤에.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에선 한 달 뒤 지구가 멸망한다. 어떤 이변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유도 없다. 소행성은 시간마다 내려오고 구원하는 영웅은 없다. 종말 후에 살아남는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다.

 

세상 만물에 끝이 있다지만 한날한시에 끝난다는 건 의미가 다르다. 그동안 속에 묵혀두었던 감정과 생각이 의미를 잃는다. 사람들이 조금씩 더 솔직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은 현실적이고 흥미진진하다.

 

처음엔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학생들도 어리둥절하게 등교하고 회사원도 쭈뼛쭈뼛 출근한다. 똑똑한 사람이 알아서 잘 해결해주리라 믿으면서. 다음에는 혼란이 발생한다. 사람이 죽고 테러가 일어난다. 음식을 약탈하고 차를 훔친다. 사랑하는 가족과 더 오래 있으려고 하는 한편 갓 태어난 아이를 방치한다.

 

끝까지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를 돌보는 사람, 인터넷 서버를 지키는 사람까지 다양한 인생이 소설 속에 녹아있다.


 

그렇잖아, 다들 조금 더 행복한 줄 알았다. 그 안에서 나만 홀로 쓸쓸하게 사라지기는 싫었다. 그렇기에 보통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할 최고의 죄악과 사랑을 손에 넣은 여신으로, 세상이 가치를 인정하는 행복의 형태에 흠집을 내서 뚜렷하게 기억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은 대체 뭐지?

다들 사실은 별로 행복하지도 않고, 황폐했던 것 아닐까?

 


삶이 이어진다는 것은 책임져야 할 것도 많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는 뜻이다. 한 달 뒤에 지구가 멸망하면서 이들의 준비와 책임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미래를 준비하면서 덜 행복하고 더 경쟁하던 사람들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놓인다. 좌절하고 절망하거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금 더 행복할 길을 찾기.

 

작가는 모두가 인간성을 상실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인류애를 표현한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인 학생, 사람을 죽인 야쿠자, 미혼모, 거식증에 걸린 인기 가수까지 삶에 허무함을 느끼는 캐릭터를 각 챕터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따로 살펴보면 망한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모습이지만 모두에게 공평히 남은 한 달 동안 그들은 이상하게 행복을 느낀다.

 

세상은 격차로 가득하고 하류층이던 자신은 결코 상류층이 될 수 없다며 무력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에나 유키는 뜻밖의 기회를 얻는다. 그는 자신을 지켜주던 울타리던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독립된 개체로 성장한다. 작가 니기라 유는 이렇게 말한다.


"10대의 젊은 아이들은 분명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조금이라도 미래를 보거나 앞을 향하거나 할 거예요. 억지로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그 또래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가진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른들은 싫든 좋든 솟아오르는 것이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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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아끼는 선배가 사실 이용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위해 움직이던 메지카라 신지는 첫사랑을 만난다. 폭력적이고 행동만 할 줄 알지 머리는 쓸 줄 몰라 자책이 심하던 성격의 그는 어른으로서 존경받기도 하고 모두의 응원을 한 몸에 받기도 하면서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다.

 

에나 시즈카는 어릴 적 가정 폭력을 당하고 그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버둥 치느라 정작 사랑하는 아들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 소행성으로 지구가 멸망 직전에 그는 비로소 그가 원하던 가족을 꾸리고 과거의 두려움을 직시한다.

 

신비주의 가수였던 야마다 미치코는 부와 명예는 가졌지만 모든 것이 부족하고 과다한 인생을 살았다. 종말을 앞두고 소중한 사람들의 진심을 알게 된다. 그때야 비로소 미치코 본인이 하고 싶던 음악을 찾는다. 또 일에 치여 버려두어야만 했던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종말이라는 절망을 앞둔 이들은 삶과 자신을 직시한다. 과거의 잘못을 버려두거나 고쳐나가며 그간 찾을 수 없었던 행복을 느끼고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올바르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가장 원했고 가장 증오했던 꿈이 모든 것이 미쳐버린 세상 속에서 겨우 뒤섞여서 하나가 되었다. 신이 창조한 세상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꿈이 신이 망가뜨리려는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말았다. 신이라고 했나, 당신 정말 모순덩어리야.

 

이렇게 마지막 순간에야 아슬아슬하게 이루어주다니, 그것은 자비일까, 벌일까? 하지만 웃음이 나올 만큼 기쁘다. 실제로 나는 웃고 있다. 환희에 감싸여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이야기 전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흥미진진하다. 누구도 겪어보지 않은 종말이란 상황을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자극적인 묘사는 최대한 배제하여 부담 없이 읽힌다. 각 등장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이 소설은 마치 내가 같이 종말을 맞이할 것처럼 아련하고 행복해진다.

 

책을 덮으며 나의 종말을 생각해본다. 이 세상의 등장인물이면 어떤 종말을 맞이할까. 짐이라 생각했던 것을 다 놓아 해방감을 느낄 수도 있겠고 인생 그 자체에 이제야 충실해져 아쉬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어쩌면 죽음 그 자체에 절망을 느끼고 방에 틀어막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라는 책을 읽고 난 이상 남은 시간을 불운하게 보내기보다 행복하게 맞이하고 싶다.

 

중요한 것은 지구의 멸망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일 테니까. 종말이라는 단어가 주는 암울한 기운 속에서도 희망과 행복을 찾아내는 작가처럼 말이다.



- 내일 세상이 끝난다면 난 좋아하는 남자하고 함께 있을 거야.

- 술을 마시고, 맛있는 걸 먹고, 너하고 잘 거야.

 

그때, 우리도 젊었다. 신지는 싸움밖에 할 줄 모르는 양아치였고 나는 싸구려 호스티스. 그로부터 긴 시간이 흘렀고 이번에야말로 정말 세상의 종말이 찾아왔다. 나는 곁눈질로 신지를 훔쳐보았다. 당연하지만 늙었다. 나는 궁금해졌다.

 

“신지, 마지막 순간에는 뭘 하고 싶어?”

“술을 마시고, 맛있는 걸 먹고, 너하고 유키하고 유키에 곁에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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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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