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애매한 위선, 가위손 [영화]

애매한 위선주의자, 장인어른(?) 빌을 살펴보자.
글 입력 2022.01.05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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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우리들은 차별과 혐오가 나쁜 것이란 걸 안다. 인종과 능력, 정체성 등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똑같으며 평등하게 대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고도화된 문명사회에서 일컫는 ‘교양’이자 ‘격식’이다.


우리는 피부색으로 인한 불이익이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여전히 백인은 흑인에게 손쉽게 총을 겨누고, 한국인 고용주는 외국인노동자에게 박봉을 준다. 모든 직업은 나름의 가치가 있고 귀천이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배달음식 기사들은 ‘짱개’로 불리고 사돈이 정육점 하는 것을 꺼려한다. 경제 수준에 따라, 성적 지향성에 따라, 신체 능력에 따라, 규정되고 수식되는 모든 것들로 인한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앎에도 차별과 혐오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다행히도 그것을 강력히 표출하는 몇 몇 집단, 혹은 상대적 소수를 빼놓으면 사회는 꽤 잘 굴러가고 있는 듯 보인다. 사람들은 티내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스스로가 ‘저열한 인종차별주의자’나 ‘맘씨 나쁜 노동착취자’로 비춰지길 원하지 않는다. 그보단 ‘편견 없이 모두를 감싸 안는 따뜻한 사람’이나 더 나아가 ‘불쌍한 이들을 도와주는 봉사자’처럼 보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차별과 혐오를 지양하면서도 앞서 말한 현상들은 계속해서 발생한다. 그것들은 모두 ‘실재’하지만 사람들은 흐린 눈을 한다. 여전히 거부감과 껄끄러움이 듦에도 그렇지 않은 척 하는 것, 전부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이타주의를 발휘하는 척 하는 것, 진심에서 우러러 나오지 않는 학습화된 교양과 격식은 결국 ‘위선’의 형태를 띠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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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손>은 일반사회와 분리되어있던 반체제적 인물 에드워드가 그곳에 정착해보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보수적인 마을 공동체가 자신과 다른 타자 에드워드를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인간의 이기심과 배척심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오늘은 이를 대변할 수 있는 캐릭터, 펙의 남편이자 킴의 아버지인 ‘빌 페그스’에 초점을 맞춰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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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의 태도는 한 마디로 말해 ‘쎄하다’.


빌은 전반적으로 에드워드에게 긍정적인 듯 보인다. 그를 혐오하거나 모욕하지 않으며 갑자기 집으로 데려온 아내의 독단적인 결정에 반발하지도 않는다. 특히 빌은 에드워드에게 ‘가족이기에’ 받을 수 있는 공동체의 도움을 제공한다.

 

에드워드가 경찰서에 체포되었을 땐 보호자 신분으로 찾아가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며, 크리스마스 때 에드워드가 사라지자 한밤중에도 그를 찾아 집 밖으로 나선다. 집 밖으로 이탈된 구성원이 다시 되돌아올 수 있게 돕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단 듯 행하는 모습을 통해 빌이 에드워드에게 꽤 호의적 태도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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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행동’이 아닌 ‘태도’는 조금 다르다. 결과적으로 빌은 에드워드를 물건, 대상, 그리고 온전한 인간과의 차이를 넘을 수 없는 타자로서 ‘취급’한다.

 

에드워드가 처음 페그스 가족과 식사자리를 가졌을 때, 아들 케빈은 에드워드를 신기한 듯 ‘구경’한다. 주의를 받는 케빈에 비해 어른인 빌은 적당한 시선을 유지한다. 아내가 에드워드를 소개해줬음에도 빌은 절대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않는다.

 

옆에서 에드워드라고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고쳐주지만 그는 에드워드를 ‘에드’라고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일부러 착각한 척 다른 이름을 부르며 상대방을 무시하는 미국의 사소한 문화가 나타난 부분이다. 이때부터 그의 태도는 줄곧 쎄함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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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그스 가족 모양으로 정원을 손질한 에드워드에게 빌은 “완전한 가족이 됐구나”라고 말하면서도 아들에겐 ‘녹슬지 않게 기름칠을 해줘라’고 말한다.

 

수고했으니 물이라도 한 잔 마시렴-이 아니라 기계 관리를 위해 기름칠을 시킨다. 그는 에드워드의 몸뚱어리(인간성)보다는 오로지 그의 손(기계성)에만 집중한다. 손만 빼면 인간과 동일한 신체요소를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빌은 에드워드의 생산성을 개발하려 한다. 에드워드의 놀이인 가위질에 돈을 받으라고 한다. 그는 에드워드의 감정에 신경 쓰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날, 자신의 정원에서 에드워드가 짐에게 “꺼져, 괴물아!”라는 혐오성 모욕을 듣는 장면을 목격했음에도 짐을 따로 꾸짖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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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빌의 ‘쎄함’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 수 있다. 빌은 자신을 에드워드의 ‘아빠’가 아닌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의 가족 구성원이 아닌 어쩌다 얻게 된 노동 기계였으며, 그가 에드워드를 찾으러 가거나 교육하려 하는 행동은 그저 자신의 소유물을 되찾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다. 에드워드를 대상화하는 그의 태도는 아들에게도 전달되어 가위손이 학교 발표에 끌려 가도록 하기도 한다. 아들 케빈에게 에드워드는 다른 친구들에겐 없는 진귀한 자랑거리로 보여 진다. 가족의 범주엔 들지 않는다.


빌의 태도는 분명 에드워드에게 호의적이었다. 오갈 데 없던 외로운 이를 선뜻 집으로 불러오고 가족이라 말해주는 모습은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랑을 실천하는 자’로 보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빌이 에드워드에게 잘해줬던 것은 누군가를 차별하고 혐오하면 안 된다는 그의 사회적 학습효과가 만들어낸 일종의 교양이었다. 그의 내면은 에드워드를 기계로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이 가위손에게 보여준 태도는 이웃사랑, 배려, 나눔, 사랑 같은 것들이 아니라 사실 위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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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는 애매하다. 아무도 자신이 차별/혐오주의자로 보여 지길 원치 않는다. 하지만 겉으로 식별되지 않을 뿐, 뿌리 깊게 남아있는 혐오의 낌새를 알아채지 못할 사람은 없다.


동성애자, 장애인, 흑인과 동남아인을 보았을 때 왠지 모르게 솟구치는 거부감. 그럼에도 모든 것은 평등하고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며 난 그것을 포용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하는 이상적인 태도. 진심으로 이해하진 못하지만 대놓고 미워할 수도 없는 사회에서 보여 지는 것은 결국 ‘애매한 위선’들이다.

 

<가위손 Edward Scissorhands> 팀 버튼, 1990, 미국.

 

 

[박태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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