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편지는 언제나 낯간지럽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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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쓰는 일은 참 어렵고 낯간지럽다.
카카오톡처럼 부담 없이 마구 여러 문장을 끊어 보낼 수도 없고, 전화처럼 내가 했던 말이 공중으로 흩어지지도 않는다. ㅋㅋ와 ㅎㅎ를 종이 위 펜으로 남기기엔 뭔가 진중하지 못한 것 같아 망설여지고, 흔히 쓰는 이모티콘을 사용할 수도 없다.
편지지 위에서 내 생각과 마음은 어디 숨거나 기댈 곳 없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더 부끄럽고 간질간질하다.
어렸을 적에는 꼭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단짝 친구와 쪽지도 주고받고, 교환 일기장도 쓰며 서로의 감정을 부담 없이 나누곤 했는데. 조금씩 나이를 먹을 때마다 편지를 쓰는 일에 인색해져 버린 것 같다.
며칠 전, 방을 청소하다가 이것저것 추억거리를 모은 상자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가 잔뜩 있었는데, 하나하나 들춰보니 마음이 그렇게 벅차오를 수가 없었다.
그 안에는 어린 날의 친구와 내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재고 따지는 것 없이 과감한 표현, 조금은 거칠어도 정감 넘치는 말투, 각자의 취향이 느껴지는 편지 봉투, 그리고 그 시절의 감수성으로 적혀진 날 것의 감정들.
대부분의 편지가 낯간지러운 인사말로 시작해 생일 축하한다는 말로 마무리하는 비슷한 전개였지만, 그 말들을 꼭꼭 펜으로 눌러 적은 친구들이 눈에 선했다.
여러 해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은 친구와의 편지 속에서는 그 친구의 성격이나 가치관의 변화도 느낄 수 있었다. '아, 얘가 이때는 힘들었구나.', '이 해에는 감성이 넘치는 때였구나.' 하고 말이다.
체면이나 부끄러움 없이 적혀진 날것의 감정들을 시간이 훌쩍 지난 후에 마주하니 싱숭생숭했다. 이렇게 반짝이고 순수한 마음을 주고받았던 우리가 참 예뻐서 흐뭇하면서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감정과 시절이라는 걸 알기에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생각만은 확실해졌다. 앞으로는 더 자주, 꾸준히 편지를 써야겠다는 걸. 내가 쓴 편지를 내가 갖게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써야겠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걸 남기고 싶어서.
요즘 세상에는 사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고화질 사진과 동영상으로 더 생생한 기록을 남길 수 있지만, 편지는 편지만의 매력이 있다. 왜인지 꼭 편지를 쓰는 시간은 새벽이 되어서 감수성 풍만한 채로 오글거리는 말을 잔뜩 쓰게 된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창피해 숨고 싶지만, 편지를 받는 사람으로서는 그보다 더 진실한 마음이 없다.
누군가를 위해 예쁜 편지지와 봉투를 고르는 정성. 디지털 시대에 맞춰 살다가 예쁜 글씨체는 잃어버렸지만, 삐뚤빼뚤해도 꾹꾹 눌러 적은 손글씨. 오로지 손편지만이 가질 수 있는 따뜻한 매력들.
모두에게 특별하지만 시끌벅적하게 만나 놀 수 없는 연말연시, 나는 이번에 친구들의 집주소를 물어보려 한다. 생일에만 으레 적어 보내던 편지가 아니라 3년, 혹은 5년에 한 번씩 연하장을 보내고 싶어졌다. 그러면 나의 주변 사람들은 긴 시간 동안의 나를 추억할 수 있겠지. 그러다 보면 누군가도 자신을 기억하라며 답장을 보내오지 않을까?
또 어느 날 방 정리를 하다 추억상자를 발견하는 날에 내 손에 들린건 낡고 바랜 종이겠지만, 나는 추억을 읽고, 억만금으로도 살 수 없는 몽글몽글한 감정들을 선물 받게 될 것이다.
[이채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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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다크
- 2021.12.30 2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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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잘 봤습니다 몽글몽글한 감정이 살아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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