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렇게 따뜻한데 진작 껴안을 걸 그랬다 [문학]

한국인도 잘 모르는 한국 소설 톺아보기 - 오수연 <황금지붕>
글 입력 2021.12.2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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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기도다 (334)

 

소설집 <황금지붕>의 작가의 말 끝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작가 오수연은 2003년에 미국에 침공당한 이라크와 이스라엘에 점령된 팔레스타인에 갔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파견 작가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가서 평화감시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팔레스타인 분단 상황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소설집 <황금지붕>을 썼다.


한국이 배경인 소설은 소설집의 소설들 중 <여름방학> 단 한 편뿐이고, 나머지 소설들은 모두 정확한 지명을 언급하지 않은 타지가 그 배경이다.

 

이라크, 팔레스타인에서 머무는 동안 그녀는 당장 발밑의 땅을 구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사라져 버린 소중한 것들, 모든 사람들, 모든 생명들. 아무렇지 않게 분열되는 모두들, 고통받고, 죽어가는 사람들. 그들이 자기 발밑의 땅 위에 편안히 깃들기를 그녀는 기도한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발화하는 기도라는 단어가 내게 특별한 온도로 전달됐다.


팔레스타인의 장벽과 한반도의 휴전 장벽은 닮았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슬픔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우리 또한 전쟁으로 인한 조상의 죽음을, 이산가족의 오랜 기다림 끝의 만남을, 둘로 나뉘어 대치해 싸우는 상황을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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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과 장벽 너머


 

황금 지붕에 수록된 대부분의 소설에는 철저하게 둘로 나뉘어 양극단에 선 서로를 억압하고, 고통을 주는 상황이 등장한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대치 상황의 외부와 내부는 언제든 허물어질 수 있는 미약한 기준선에 의존한다.

 

소설집에 수록된 소설 <문>에서 화자는 나라의 국경을 넘어야 한다. 그러나 적국의 비자가 여권에 붙어 있으면 다른 나라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는다는 법률이 있다.

 

‘나’의 여권에는 적국 나라 비자 우표와 다른 나라 비자 딱지가 같이 붙어 있다.  ‘나’는 우표가 여권에 있어도 딱지 덕분에 이 나라 국경을 넘을 수 있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딱지를 믿고 다섯 시간이나 국경까지 갔는데 우표 때문에 퇴짜를 맞을 수도 있다.

 

우표도 딱지도 두께는 0.1 밀리미터(26)에 불과하다. 하지만 0.1 밀리밑터의 간극은 광활한 두 나라 사이의 분열을 상징한다. 국경에서는 종이 한 장의 두께 0.1 밀리미터가 히말라야보다 높고 심해보다 깊다(27)

 

두 나라 사이를 넘나들 수 없는 상황은 모순적이면서도 분리 상황에서의 경계와 혼란은 필연적이다. 선을 사이에 두고, 나뉘는 것들, 이분화된 것들이 두려운 이유는 갈등을 동반하고, 우리를 이차원(27)의 세계에 가두어 평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적이 명확한 상황에서 우리는 두려움 없이 앞으로 걸어나가지 않는가. 정답이 있다는 확신에 차서 말이다.

  

 

 

여기와 저기, 모호한 경계선


 

수록된 소설 <소리>에도 완전히 구분되는 두 공간에 대한 서술이 등장한다. J는 아내를 고향에서 데려와 결혼했는데 아내는 아이들을 교육시킨다는 명목으로 J와 떨어져 다른 지역에 머물고 있다.

 

J는 아내에게 묻는다.

 

내가 너를 여기 데려왔는데, 왜 거기 도로 가 있는 거야? 내가 너를 거기서 여기로 데려왔잖아.(44)

 

그는 아내를 다른 공간으로 옮겨왔다고, 또 아내가 다른 공간으로 옮겨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곳과 저곳으로 분리될 수 있는 명확한 공간이 맞을까. 이곳과 저곳으로 나뉜 공간은 너무나도 주관적인 구분이다.

 

더불어 현재 J는 고향의 완전한 반대편에 살고 있는데 그에게 고향이 매마른 먼지 냄새, 퀴퀴한 냄새, 향신료와 시궁창의 시궁내로 대변되는 공간이라면, 현재 살고 있는 공간은 청량한 냄새로 대변된다.

 

J의 고향과 J가 현재 거주하는 곳으로 공간이 나뉠 뿐만 아니라 J의 고향에서도 공간은 나뉘었다.

 

그들은 대대손손 미워하는 사람들끼리 다만 피해의식으로 한데 묶여 살 수밖에 없는 저주를 받은 듯했다.(57)

 

공동체 안에서조차 내부와 외부는 존재한다. J는 도시에서는 부모 고향에 자부심과 소속감을 느꼈으나 막상 고향에 가면 거리감과 배척감을 느꼈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 살면서 비로소 이곳의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 옆인지 헷갈려하고,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와 싸우는지 알지 못한다. 그 안에서는 거대하게 느껴졌던 갈등과 분열이 조금 멀리 떨어져 나와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지난한 싸움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무책임한 우월감



소설 <황금지붕>에서 화자는 나는 중간이야(241)라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듣는다. 여기서 중간은 긍정적 의미의 중립이 아니라 회피의 중간이다.

 

소설 <황금지붕>에는 전시 상황의 타자라는 정체성에 대한 (작가로 대변되는) 화자의 죄책감과 고민이 극명히 드러난다. 그는 비점령국을 돕는 ‘좋은’ 일을 하러 왔으나 같은 공간에 있어도 민중들보다 비교적 안전하다.

 

나도 곧 떠난다. 얘기했지?(218)

 

그는 타자이고, 잠깐 머물다 갈 뿐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의 고통을 온전히 체험할 수 없다.

 

그와 동료들은 난민촌의 한 집 3층 방에 머물렀는데 외국인이 집에 있지 않다면 점령군이 집을 포위하곤 했으므로 그를 포함한 외국인은 난민촌에서 방패(225)와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화자와 점령군 군인이 빈민촌에서 공유하는 감정의 결은 흥미롭다.

 

피점령국의 민중들을 보호하는 외국인의 자리가 점령군에게는 전혀 불편하지 않다. 심지어 군인들은 화자와 동료들을 착한 젊은이(235)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아니라도 지킬 사람 많은 강하고 부유한 나라에 태어나 세계평화를 외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군인들은 자기들 나라를 가장 많이 지켜야 한다는 점만 다를 뿐 공유하는 것이 많다. 그들은 똑같이 할리우드 영화와 팝송을 즐기고, 화성이나 가상세계에 마음이 가 있는 21세기 신세대들이다. 그런 그들은 빈민촌에 사는 사람들, 당장 점령군들의 총에 언제 맞을지 모르는 이들을 끝내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화자는 심지어 피점령국 민중들을 아무 짓도 안 하는 인간들(236)이라며 폄하하기도 한다. 군인들은 점령지에 파견돼 임무를 수행하고, 자신은 외국인으로서 군인들을 감시한다. 반명 민중들은 그저 시간을 낭비할 뿐이라는 거다.

 

그는 자유가 없는, 장벽에 갇혀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두려움에 떨며 모든 피해를 감내할 뿐인 그들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한다. 그는 민중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면서도 이곳의 민중들을 일깨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우월감에 젖어 있다.

 

그는 맨 앞에 빛나고 있을 황금 지붕을 향하여, 똑바로 줄을 섰다(239) 줄에서 벗어난다면 여기 이곳의 저들처럼 영원히 암흑과 흙먼지 속에서 뒹굴거라는 걸 알았다. 그는 이상을 쫓아 더 나은 땅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하지만 줄의 앞과 뒤는 쉽게 뒤바뀔 수 있는 미약한 개념이었다.

 

서 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뒤로 돌아서면 끄트머리가 맨 앞이 된다(240)


 

 

갇힌 사람들


 

이 소설집의 소설들에는 갇힌 사람들이 등장하고, 이들은 아무리 문을 열고, 새로운 도약을 시도해도 고난이 반복되는 공포를 느낀다.

 

소설 <문>에서 점령군은 문 너머에 있다. 점령군들만이 문을 열어줄 수 있고, 문 너머로 들어가려면 점령군에게 몸 수색을 당해야 한다. 그마저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문 너머에는 또 문이 있다. 그 문에 닿으면 일행은 다시 차에서 짐을 끌어내려 검색대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 문을 통과하고 나면 또 문이 있다. 그 너머에 또 있다. 또, 또 있다. 형은 뒤를 돌아볼 수가 없다. 돌아보면 지평선이 줄어들고 있을 테니.(...) 저 앞에 문이 있다. 그런데 그 문 밑에 땅은 있을까.(25)

 

 

이들에게 문은 새로운 세계로의 탈출이 아니라 끝없는 반복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절망의 감각이 소설을 지배한다. 문 밑에는 땅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그저 멈춰 있기에 지금 이곳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미약한 희망으로 또 다시 문을 연다.

 

땅은 언제든 해체될 수 있는 상태로 위태롭다. 두 방향으로, 세 방향으로 나뉘어 대치할 수도 있고,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모두가 땅에 서 있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특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땅, 분열의 땅은 접히고 찌그러지고 압축되다 못해 터져버리려는 빅뱅의 직전(29)이다.

 

땅에 살던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땅이 줄어드는 것을 바라볼 뿐이다. 항구에서, 도시에서, 저수지가 있는 들판에서 쫓겨난다. 산기슭에서, 산꼭대기에서 계속해서 쫓겨난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방향감각을 잃(35)는다. 그들이 머물 수 있을 땅은 마침내 소실점(35)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런 그들이 지키고 있는 건 무엇일까. 공식적으로 사라져 버린, 그래서 익명의 존재로 남은 그들은 당시 땅이 있었다는 기억만은 지키고자 한다. 이제 미지의 공간이 되어 버린, 동서남북도 아니고, 어디로부터 멀지도 가깝지도 않(36)으며 전진도 후퇴도, 과거도 미래도 없(36)는 공간, 분쟁을 넘어선 땅이 있었다고, 우리가 여기 이렇게 살고 있다고 외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또 다시 울타리도 대문도 없는 마당을 나갔다(37)

 

 

 

우리들의 황금 지붕을 찾아서


 

팔레스타인 민중들도, 남북으로 나뉜 전시 상황의 연장선에 서 있는 한반도 민중들도 각자만의 황금 지붕을 오랫동안 찾아왔다.

 

세상의 중심(252) 지표면 어디에서도 똑같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내부의 초점(252) 가장 밑바닥에서 영원히 빛나는 황금 지붕(252) 왼쪽의 오른쪽, 오른쪽의 왼쪽, 앞의 뒤, 뒤의 앞을 다 같은 곳으로 묶어주는 세상의 중심(252).

 

황금 지붕은 지상에 실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눈물의 씨앗으로 분리 장벽을 넘어서 평화에 당도할 수 있다는 희망은 존재한다.

 

우리는 그저 안전한 세계를 찾는다. 발을 딛고 살 땅을 찾는다. 동과 서가 나뉘지 않고, 태초에 그렇듯이 우리 모두가 하나인 세계를 원한다.

 

소설은 결코 눈물과 슬픔, 고통으로 이야기의 막을 내리지 않는다. 이들의 흘린 눈물의 역사를 인류의 파국을 끝내고 새로 시작하기 위한 고통과 눈물(299)이라 말한다.

 

 

가깝거나 먼 장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역사의 완성입니다.(299)

 


내부에서 폭발이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행성이 둥글고 아름답(254)다면 인류의 불의를 깨부술 수 있는 건 인류뿐이다.

 

수록된 소설 <재칼과 바다의 장>에서 칼릴라와 담니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지붕에서 같이 땅으로 떨어진다. 둘은 서로의 심장 박동을 느낀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렇게 따뜻한데 진작 껴안을 걸 그랬다고(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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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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