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포르투갈의 높은 산 - 상실 이후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난 여정

인간은 고통을 껴안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글 입력 2021.12.1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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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삶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아 떠난 곳이다. 마치 유토피아를 찾아 헤매듯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다다르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그게 삶의 정답이든, 고통에 대한 해답이든, 행복이든 간절히 원하던 바로 그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붙들고 가는 곳이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가는 여정은 힘들다. 길을 헤매고, 무거운 짐의 크기만큼 마음과 몸이 짓눌린다. 가는 여정 내내 고되고 힘들어서 울며 좌절하면서도,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절박하게 도달하고자 하는 곳이다.

 

 

 

1부



주인공 토마스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아버지를 잃고 나서 신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한가득 품고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찾아간다. 안정적인 직장, 아늑한 집과 잠자리를 포기하고 낯설고 험난한 포르투갈의 높은 산까지 찾아가는 이유는 자신에게서 사랑하는 이들을 앗아간 신을 원망하고 조롱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유인원의 얼굴을 한 예수상을 바라보면서 신을 실컷 조롱하고 비웃는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그 뒤에 찾아오는 상실감, 고통에 대해서 분풀이라도 하듯이 신을 조롱한다. 신의 아들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니라 그저 진화한 유인원에 불과하다고 토마스는 절망 속에서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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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가 모든 것을 잃고 나서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해서 가는 험난한 여정은 마치 나의 인생 여정과 겹쳐 보였다. 몇 년 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전부 잃고 나서 나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 나만의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해 떠났다.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인간의 삶이란 온통 고통과 결핍으로 가득한가? 인간은 필연적으로 고통받으며 살아가고, 고통으로부터 성장해서 성숙해지는 존재라면 이 힘든 삶을 왜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의문이 소용돌이쳤다.

 

나는 토마스처럼 긴 여행을 떠났다. 직장을 그만두고 오래 사귀던 연인과 친구들을 뒤로하고 떠났다. 여행길은 아주 험난했다. 토마스가 온갖 벼룩과 이에 시달리면서 불편한 잠자리에서 온몸을 구기고 잠을 청하듯이 나 또한 세계 여러 나라를 가난한 여행자가 되어 돌아다녔다. 내가 왜 편안한 집을 내버려 두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 라는 현타를 매일 얻어맞으면서 다녔다. 값싼 호스텔에서 가난한 여행자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지내야 하는 6인실 방에서 불편한 잠을 자면서 말이다.

 

그 당시의 나는 매 순간 불안과 초조함, 공허함에 시달리면서 지냈다. 왜 인간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수년간 머리 한편에 커다랗게 차지한 상태로 무작정 계속 돌아다녔다.


 

P127~128. 인간은 고난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눈을 뜨게 해줄까? 고난의 결과로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될까? 율리시스 신부의 경우를 보면, 아주 오랫동안 이런 질문들의 답은 ‘아니다’ 였던 것 같다. 그는 노예들의 고통에 귀멀고 입이 닫힌 듯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고통받지만 그건 나도 마찬 가지이다. 그러니 그게 뭐 어떤가?
 

 

끝없는 무거운 발걸음과 기나긴 여행 끝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많은 곳을 돌아다녀도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고, 행복은 어딘가를 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 이후로는 물리적인 이동을 의미하는 여행을 끝마쳤다. 더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찾아 이동하는 것이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고된 여행길에서 만난 여러 국가의 다양한 친구들은 각자 저마다의 사정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프랑스와 호주에서 머물렀을 당시 함께 지내었던 친구들은 복지 국가인 북유럽에서 교수, 의사, 과학자, 언론인, 모델 등으로 활동하는 소위 사회적인 성공을 거둔 이들이었다. 하지만 저마다의 개인적인 이유로, 넓게 보면 엇비슷한 이유로 고통받고 괴로워하고 종종 죽음을 떠올렸다. 그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행복을 공부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세상 어디에서나 갖가지 결핍, 외로움, 공허함은 존재하며 그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고통 값으로 느껴졌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더 이상 물리적인 여행을 통해서 삶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리라는 희망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건 마치 마지막 장에서 토마스가 울부짖는 마음과 비슷했던 것 같다.


 

P158. 토마스는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속이 지긋지긋하게 메스꺼워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영혼이 고통스럽고 기계를 운전하는 데 진절머리 나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그의 시련이 절반만 끝나서다. 이제 리스본까지 그 먼길을 운전해야 할 테니까.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씻지 않고 면도를 하지 않아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직장을 잃어서다. 이제 무슨 일을 할까? 어떻게 먹고사나?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이제 발견한 게 달갑지 않은 십자고상을 발견해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이유는. 이유는. 우리는 멋대로인 동물이다. 그게 우리이고, 우리는 우리일뿐 더 나은 무엇이 아니다.

 


인간은 처절한 고통을 겪고 나면 저마다의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하는 여정을 걷게 된다. 하지만 그건 어떤 장소에 도착함으로써 혹은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획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예수를 실컷 비웃고 조롱하였지만 끝나지 않은 토마스의 슬픔처럼 나 또한 여행을 끝냈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슬픔에 잠식되곤 한다.


마지막 장에서 ‘아버지 당신이 필요합니다.’라며 절규하는 토마스의 모습을 보면서 그토록 신을 비웃고 더 나아가 당신은 십자가에 매달린 원숭이일 뿐이라고 조롱했지만, 결국 절박하게 무너지는 순간에 다시금 신을 찾고 의존하는 모습이 애처롭고 안쓰러웠다. 동시에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아프지만 토마스에게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그건 신의 존재 여부와는 별개로, 어딘가에 의존하고 구원자를 바라는 토마스의 나약한 의존성을 단숨에 무너뜨리고 그가 인생의 주도권을 되찾고 스스로 자립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나도, 토마스도 더 이상 구원자를 바라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감당하고 책임지며 한층 더 성숙한 어른이 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다.

 

 


2부


 

병리학자 에우제비우와 그의 아내 마리아의 대화가 인상 깊었다. 특히나 마리아가 복음서와 추리 소설을 비교하여 설명할 때는 기발하고 유쾌한 통찰력에 미소가 나왔다. 마리아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면서 나도 ‘이야기란 무엇일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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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에게 보내는 편지>

 

마리아님, 복음서와 추리 소설의 공통적인 패턴에 대해 들으며 정말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어요. 특히나 ‘이야기’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들으면서 공감하였고, 아 그렇구나! 새롭게 깨닫게 되는 부분도 많았어요. 우리는 둘 다 이야기를 사랑하고, 말이 많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어요. 아마 우리가 만난다면 밤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참 즐거울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야기, 즉 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일까? 왜 예수는 이야기를 통해서 메세지를 전달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선 그에 앞서 저의 미숙하고 어렸던 과거 시절을 먼저 꺼내 봐야 할 것 같아요. 과거는 저는 이야기의 본질을 몰랐어요. 사랑을 잘 몰랐어요. 반대로 자의식은 무척 강했어요. 글을 쓰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목적이 그저 멋지고 똑똑한 사람으로 입증받고 싶은 욕망에 그쳤던 것 같아요. 나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증명하는 것이 서툴지언정 진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착각에 빠져있던 어린아이였어요. 어려운 단어로 가득하여 읽기 어려운, 난해한 글을 쓸수록 똑똑하고 뛰어난 전문가라는 착각 속에서 살았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글을 쓰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것이 아닌 진심 어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란 걸요. 사랑은 마음과 마음의 연결이자, 진심의 연결이라는 것을 서서히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마음이 연결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마음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도 이해할 만큼 쉽고 재미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읽기 어렵고 난해한 글로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동화책처럼 스토리텔링으로 말한다는 것은 자신을 입증하고 싶은 자의식 열망 단계를 넘어서 진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길 바라는 진정성이 담긴 성숙한 사랑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 것이 이야기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 사실을 깨달은 후로는 어려운 지혜와 정수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문장으로 재미있게 전달하는 현자들이 저에게 존경의 대상이자 선망의 롤모델이 되어주었어요.

 

*


또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를 살펴보자면 당신의 또 다른 질문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예수는 왜 비유로 이야기할까요? 그는 이야기 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낼까요? 왜 진실은 허구라는 도구를 쓸까요?’라는 질문에 저는 이런 답변이 떠올랐어요.

 

사람들은 때때로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은 차라리 외면하고 덮어두고 싶어합니다. 낯설고 새로운 진실은 자신이 그간 굳건하게 믿어왔던 오랜 가치관과 신념, 세계관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외면합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알을 깨뜨리는 것을 두려워하지요. 아늑한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머물고 싶어 합니다.

 

익숙하고 잘 아는 것, 편안한 것에 끌리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지요. 그게 아무리 오래되고 낡은 것이라도, 거짓일지라도 자신이 평생 굳건하게 믿고 살아왔던 세계와 관념은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합니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오길 두려워하는 새끼 새처럼, 매트릭스의 진실을 거부하고 잠들어 있는 수많은 이들처럼 말이죠.

 

이렇게 겁이 많고 불안에 떨고 있는 대중에게 어떻게 하면 새로운 진실과 지혜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요?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장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와 닿기 위해서는 이야기로 접근하면 한결 쉽습니다. ‘이건 그저 이야기일 뿐이야, 일종의 픽션이자 허구이야. 겁먹지 말렴, 가상 이야기일 뿐이란다. 그러니까 마음을 열고 흥미로운 스토리를 들어보렴 ‘ 이야기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사람들은 픽션이라는 말을 듣고 편안함을 느낍니다. 허구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지 않고 한결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치 이솝우화와 그리스 신화를 듣듯이 흥미로운 스토리 텔링과 아름다운 비유와 은유를 감상하면서 즐깁니다. 이야기는 이처럼 사람들의 굳건한 방어벽을 녹여내고, 동심으로 돌아가 순수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줍니다.

 

현자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추출한 삶의 정수와 지혜를 허구의 세계 안에서 자유롭게 메시지로 담아냅니다. 사람들은 픽션이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입니다. 어느새 이야기가 널리 퍼지며 반복적으로 대중에게 노출되면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흡수되고 각인되게 됩니다. 그게 바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그들이 각자 자신만의 해석으로 예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쉽고 간단한,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에는 현자들의 진리와 사랑의 메세지가 담겨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이들이 진리와 사랑에 쉽게 닿을 수 있도록 현자들의 마음을 담아낸 것이 이솝우화이자 고전이자 성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님, 당신의 이야기 덕분에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야기의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색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3부



천국은 어린아이의 마음만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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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오랜 잠언이 3부를 관통하는 메세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터는 사랑하는 아내 클래라를 잃었다. 아들 벤은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에 온통 분노에 차 있었다. 손녀 레이철은 사춘기에 접어들어 시크하고 반항적인 태도를 보인다. 피터는 미국 국회 상원의원으로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걸 제외한 삶의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공허하게 흘러간다.

 

피터는 침팬지 보호소에서 처음 본 침팬지 ‘오도’를 보고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낀다. 그는 충동적으로 침팬지 오도를 샀다. 오도와 함께 살기 위하여 그는 미국을 떠나 포르투갈의 높은 산, 부모의 고향이자 그의 핏줄의 뿌리 터전을 찾아서 떠났다. 피터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위치한 낡은 집을 수리하여 오도와 함께 단순한 일상을 보낸다. 그리고 점차 순간이 주는 행복감을 느낀다. 그는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그 행복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핏줄의 터전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도달해서 행복한 것일까? 침팬지 오도를 아끼고 사랑했기에 얻은 행복감일까? 나는 피터가 다시 행복해질 수 있던 이유는 바로 어린아이의 마음을 되찾았기 때문이라 느꼈다. 마침내 피터가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어 천국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침팬지 오도가 영감을 주는 뮤즈이자, 천국으로 안내하는 천사와도 같았다.

 

침팬지 오도는 단순하고 순수하다. 마음이 투명한 상태로 조금의 가식이나 위선도 없다. 오도는 어린아이와 같다. 오도는 사회에서 주입하는 낡은 관념과 수많은 규칙, 규율을 알지 못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느끼지 못한다. 순간에 충실하게 웃고, 울고, 화를 냈다. 늘 주어진 매 순간을 살았다. 피터는 오도와 함께 살며 오도의 단순함과 투명한 순수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피터는 오도를 경이롭게 바라보며 침팬지를 따라 했다.


 

P365. 오도가 죽 끓이기와 같은 간단한 인간의 기술을 터득한 반면, 피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려운 동물의 기술을 익혔다. 그는 시간이라는 경주에서 족쇄를 풀고 시간 자체를 음미하는 법을 배웠다. 피터가 판단할 수 있는 한 오도는 바로 그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마치 흘러가는 강물을 지켜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이따금 오도가 시간을 호흡한다는 생각이 들어,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난 오도 옆에 앉아서 그가 매분, 매시간으로 엮인 담요를 짜는 것을 지켜보지. 시간을 짜고 공간을 조각하는 존재와 함께 있는걸. 내게는 그걸로 충분해.”

 


사회로부터 마음이 훼손되지 않은 어린아이는, 침팬지는 ‘Mindfulness’, 깨어있음의 상태가 자연스럽다. 그건 소위 문명인이라고 일컫는 지식인들이 간절히 추구하며 탐구하고, 토론하고, 명상하는 등 온갖 노력을 하면서 도달하고자 하는 Mindfullness 현존의 상태와 비슷하다. 지식인에게는 어려운 깨어있음의 상태가 어린아이와 오도에게는 자연스럽게 가능한 일상 상태이다. 그건 욕심이 없는 순수한 상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피터가 행복해질 수 있던 이유는 어린아이의 마음, 곧 어떠한 욕심 없이 매 순간 현실을 음미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감수성을 점차 되찾았기 때문이라 느꼈다. 피터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되찾으면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티켓을 거머쥐게 되었다.

 

*

 

행복이란 무엇인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찾아 헤매고,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많은 이들을 만났다. 국적, 성별, 인종, 직업, 문화권, 취향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깨닫게 된 것은 이성과 논리로 가득하여 감수성을 잃은 사람일수록 행복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었다. 진심과 사랑을 외면하고 오로지 성공과 야망을 향해서 달려가는 이들일수록 사회적인 성공은 이룰지언정, 그 끝에는 언제나 외로움, 고독함, 공허함, 텅 빈 껍질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복의 비결은 책 속 문구처럼 ‘시간이라는 경주에서 족쇄를 풀고 시간 자체를 음미하는 법’을 체화하는 것이었다.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매 순간에 존재하는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느끼고 감탄하면서 말이다.

 

행복을 향한 여정 중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시간 자체를 음미하면서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현실을 음미하면서 살아갔던 적이 있던가? 묻는다면 초등학교 고학년에 접어든 이후로는 거의 없던 것 같다. 매 순간 불안과 걱정, 고통 속에서 살아갔다. 항상 어떤 목표를 쫓아서 경주마처럼 달려야 했다. 미친 듯이 달려도 뒤에서 쫓아오는 다른 경주마들 때문에 한순간도 편안할 수 없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달리는 사회 경기장 안에서 ‘시간이라는 족쇄를 벗는다는 것’은 나 홀로 경기를 포기하고 패배자가 되길 자청한다는 의미 같았다. 아주 커다란 결심과 각오가 필요했다. 더 이상 시간이라는 족쇄에 얽매이지 않겠다며 자유를 찾아 떠났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대가로 사회의 경기장에서는 실격 처리된 패배자로 낙인찍혀야 했다. 패배자라는 자괴감과 불안감, 초조함, 자기혐오를 내려놓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몇 년에 걸쳐서 시간이라는 족쇄를 서서히 푸는 방법을 실천하다 보니 조금씩 감수성이 풍부해지고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사소한 일상에서 감탄했고, 행복한 순간이 많아졌다. 작은 것 하나도 신기하고 놀라워 보였고, 특히나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풍경은 매 순간 새롭게 다가오며 경탄할 것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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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어린아이, 오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했다. 밤이 되면 옥상에 나가서 연약한 별빛 하나를 바라보며 위안을 느끼고, 달을 바라보면서 우주의 신비와 광활함을 느낀다. 낮이 되면 따스한 태양 빛이 비치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연둣빛 아름다움을 느낀다. 세상 많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시야가 생긴다.


아마 피터도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오도가 매 순간 현실에 충실하며,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도 영향을 받아서 순수함과 감수성이 깨어나고, 마침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를 살게 되어서 행복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어린아이의 순수함보다도 피터가 뒤늦게 찾은 순수함과 행복이 더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건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고 어두운 측면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강인한 용기와 결심이 있기 때문이다.


천국이란 무엇일까? 행복이란 무엇일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천국이란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어내어 자신만의 지혜와 내공이 있으면서 동시에 어린아이의 순수한 감수성을 가진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행복한 마음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우리가 피터와 오도의 손을 함께 잡고 순수를 향해서 한 걸음씩 나아간다면, 언젠가 천국에 닿게 될 것이라 믿는다. 모두의 행복 여정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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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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