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금욕의 공간에서 몰아치는 욕망의 파동 - 베네데타

충격적인 수식어로 가득했던 <베네데타>, 그 안엔
글 입력 2021.12.03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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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함 또한 결국은 만들어진 가치다. 다소 반종교적 발언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사실 존재하는 모든 가치가 그렇다.

 

미와 추, 선과 악 등등 구분 지어지는 대부분이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정했기 때문에 구분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만든 가치에서 파생된 감정들은 날 것이다. 신성함을 향한 믿음이 그렇고, 미를 향한 선망이 그러하며, 선 또는 악에 대한 사랑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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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네데타]는 만들어진 가치가 불러온 파동에 매몰된 인간들의 이야기다. 내가 정의하기엔 그렇다.

   

 

'베네데타'는 (중략) 17세기 신비주의 레즈비언 수녀 베네데타의 충격적 실화를 다루며 가장 성스러운 성역의 공간에서 일어난 세기의 성 스캔들을 그린다.

 

 

영화를 보기 전,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간단한 소개 한 문단에 ‘17세기’, ‘레즈비언’, ‘충격적’, ‘실화’, ‘세기의’, ‘성’, ‘스캔들’... 정보 값이 지나치게 높았다.

 

모든 단어가 흥미를 끌면서도 걱정이 됐다. 자극 범벅의 맛을 좋아하진 않았다. 그래서 좌석에 앉아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릴 때도, 영화관 불이 꺼질 때까지 매운 영화를 맛볼 만반의 준비를 하며 소화제라도 사야하나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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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영화가 끝나고서 든 생각은, 썩 자극적이진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청소년 관람불가인 만큼, 잔인하거나 선정적인 장면은 많았다. 그런데도, ‘충격’과 ‘스캔들’로 점철된 자극적인 영화가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불이 서서히 번지듯 그려낸 영화였다.

 

*


[베네데타]는 서사의 품이 꽤 크다. 전반부터 쌓여온 것이 후반에 휘몰아치는 탓에 정신을 못 차렸었다. 한참을 생각하고 생각해도 어느 부분부터 글로 풀어내야 할지 종잡기도 어려웠다. 그러다 깨달은 것은, [베네데타]는 그 무엇도 뚜렷이 얘기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영화의 모든 것이 의뭉스럽다. 시원하게 하나 집어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그 의문들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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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데타는 정말 신의 계시를 받은 존재일까?

 

어릴 때조차 그녀는 도적 떼 앞에서 성모상을 손에 꼭 쥐고 죄를 벌하리라 얘기했고, 성모 마리아에 기도를 올렸다. 그래서인지 그녀에겐 신이 찾아온다. 꿈인지 환시인지 분간할 수 없지만, 예수는 자꾸 베네데타를 찾아와 사랑을 베푼다. 다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베네데타는 살아남는다. 예수의 십자가 성흔마저도, 그의 고통마저도, 심지어는 부활마저도 겪고 행하게 된다.


하지만 믿음직스럽진 않다. 꼭 생명의 위협이 찾아오면 신의 계시가 찾아오고 그 위기를 모면하는 듯싶고, 일부는 환각같기도 하다. 그런데 또 긴가민가해진다. 베네데타가 말하기를, 자신이 있는 한 페샤는 전염병 없이 살 수 있댔고, 이는 실현됐다. 우연일지 그녀가 받은 신의 은총일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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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신과 베네데타 사이에 누군가 끼어든다. 바르톨로메아다. 폭력을 가하는 가족으로부터 도망친 그녀를 베네데타는 어린양 구해주듯 구원한다. 그 후 바르톨로메아는 베네데타에게 집적댄다. 사랑을 표현하려고 하는 듯한데, 그게 성적인 방향으로도 향해진다.


베네데타의 꿈에 나타난 뱀은 검은 머리에 큰 눈동자를 가진 바르톨로메아를 상징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바르톨로메아는 꼭 깨끗한 존재를 더럽히려는 악처럼 인식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베네데타도 결국 바르톨로메아를 사랑하게 되고, 둘은 금욕의 공간에서 욕망을 충실히 실현해낸다. 성모 마리아상도 욕망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둘의 사랑은 진실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후반으로 갈수록 사랑의 확실성 또한 모호해진다. 적어도 바르톨로메아는 베네데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베네데타는 진정하 사랑을 한 건지 혹은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 건지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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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화에서 무엇이 옳은지도 정의 내리기 어렵다. 우선 베네데타와 바르톨로메아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과연 나쁜 것인지는 현재까지도 민감한 문제다. 베네데타가 신의 계시를 입은 것이 맞는지, 혹여 조작한 것이 아닌지도 모호하다. 바르톨로메아를 진정으로 사랑한 건지 알 수 없다. 마을에 병과 함께 들어오는 교황의 존재는 철저히 악인지, 혹은 종교의 권위자로만 바라봐야 하는지도 어렵다.

 

이 의뭉스러움은 단 한 가지에서 기인한다. 이는 확언할 수 있다. 바로 인간의 욕망이다.


크리스티나는 어머니의 권력과 일종의 질투심으로 인해, 펠리시타는 딸의 죽음에 대한 슬픔으로 인해, 교황은 믿고자 하는 것이 맞음을 입증하기 위해, 민중은 건강과 삶의 안위를 위해, 바르톨로메아는 사랑을 위해, 베네데타는 권력과 성과 신앙의 욕망을 위해. 각자의 욕망을 철저히 추구하는 인간들이 모여 엉켜 구르고 파국으로 치닫는다.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가 ‘금욕’ 그 자체의 공간이 되어야 할 수녀원을 중심으로 모든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는 부분이다. 금욕은 어떤 욕구를 억누르고 있음을 전제한다. 금욕의 공간을 바꿔 말하면, 억눌린 욕구의 공간인 셈이다.

 

베네데타의 욕망은 바르톨로메아로부터 촉발되었고, 다른 인간들의 욕망은 또 무언가에 의해 밖으로 삐져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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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포스터가 보여서 찍었다. 그 아래 인명구조기구 표지판이 있는 게 웃겨서 찍었다. 성역스러운 공간에서 인간은 욕망에 휩싸여 죽어가는데 그 아랜 인명구조기구가 있다.

 

잡담이 길었다. [베네데타]는 우리에게 어떠한 확신도 주지 않는다. 우린 욕망의 파동을 볼 뿐이다. 폴 버호벤 감독은 화면을 따뜻한 색감으로 담아내면서도 그 안의 날 선 욕구들을 가차 없이 내보인다. 배우들은 [인사이드아웃]의 감정들처럼 맡은 욕망 그 자체가 되어있다. 공존할 수 없는 욕망이 한 프레임에 잡힌 순간 파동은 더 거세진다.

 

흥미롭다. 영화의 감상을 말하자면 그렇다. 그래서 종교와 퀴어란 눈에 띄는 주제에 매몰되어 보지 않았으면 한다. 더 넓게, 인간들의 이야기로 바라보면, 그 안에 들은 모든 군상이 보인다.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 하고 있어 말로 표현하기도 버겁지만, 많은 분이 그 군상을 보고 함께 의뭉스러워졌으면 좋겠다.

 

[베네데타]는 12월 01일에 국내 개봉했다. 썩 어울리는 말은 아니지만, 연말연초 한창 욕망에 그득해졌을 때 이 영화를 함께 즐겨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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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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