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낭독회에서 만난 시집, 詩集 [도서/문학]

언어는 사라지고 이미지만 남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쉼
글 입력 2021.12.03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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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는 언어를 궁지로 몰아

쥐구멍에 빠뜨리는 일이다

언어 없이 사유할 수 있을까

시는 이미지로 사유하는 것

이때 언어는 덫에 걸리고

불구가 된 채

사라지지 않고 부스러기가 되어

그 물질성으로 이미지의 디테일을 구성한다

이미지에 불이 켜지면

언어는 그 그림자의 암흑 속으로 사라진다

사라져 없어지지는 않고, 빛을 빨아들인

검은 반죽으로 잠재한다

 

― 채호기, 『줄무늬 비닐 커튼』, 민음사(2021), 「우뚝한 돌 그리고 구멍」에서

 

 

몇 주 전에 친구를 따라 낭독회에 다녀왔다. 가상실재서점이라 소개되어있는 'moi(모이)'는 온라인 서점이지만 가끔 오프라인에서 팝업 형식으로 서점 겸 도서관이 열린다. 또, 매달 초에 10권 정도의 다양한 책들이 정성 가득 담긴 큐레이션 노트와 함께 소개된다.


공간에 들어섰을 때, 사서님과 책을 낭독해주신 큐레이터님이 맞아주셨다. 세련되고 상쾌한 공기가 풍기면서도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진중함이 살짝은 묵직하게 내려앉은 곳이었다. 날 데려간 친구는 그들의 오랜 팬이었고, 난 낭독회 자체도 'moi'도 처음이었다.


큐레이터님은 낭독회에 대한 간단한 설명 뒤에 시집 두 권을 낭독하셨다. 송승언 시인의 「사랑과 교육」과 김언 시인의 「백지에게」.

 

솔직히 시의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난다. 누군가 책을 목소리 내어 읽어준 경험 자체가, 아니, 글을 읽어준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라 더 그랬다. 입으로 나오는 글자들은 지워지고 이내 이미지가 되어 머릿속에 생겨났다 없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황홀했던 감정만 기억난다. 흩어질 것만 같은 글자들이 뭉쳐 '시'가 되는 게 새삼스레 좋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수많은 꿈 중 시인이 있었다. 어떤 것들을 꿰뚫어 보고는 적은 수의 글자만으로도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그 능력을 나도 갖고 싶었다. 언어를 살짝 비틀어 보는 그 시선도 함께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는 도저히 뭉쳐지지 않을 것 같은 글자들을 한 데 묶어놓은 글 같다.


낭독회에서 시를 들은 탓이었는지, 'moi'가 큐레이션 했던 많은 책 중 시집을 골라왔다. 왼편에는 시가 일본어로 쓰여있고, 오른편에는 한국어로 번역되어있는 시집 『처음 가는 마을』이었다.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가 쓴 시들을 옮긴이 정수윤이 엄선하여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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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평소 정보글을 많이 읽는다. 그러나 정보글은 하나하나 머릿속에 저장하면서 읽게 되어 글을 읽으면서 영혼이 쉴 수 없다. 시는 까만 활자를 읽으면서도 영상을 쳐다보듯 뇌를 멈추게 되는 때가 온다. 그땐 영혼이 비로소 쉬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 가는 마을』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텍스트 속에서 쉬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단순하고도 솔직하게 쓰인 말들이 툭툭 던져져 있는 듯한 시집이다. 시가 그의 고통을 담고 있을지라도 결국은 따듯한 파동으로 와닿는다. 아마 순수하고 다정한 문체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이 시집 속의 시를 소개하기 전에 이바라기 노리코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하자면, 그녀가 19살일 때 일본은 패전했다. 이바라기 노리코라는 이름을 알린 대표작 중 하나인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30대에 '내가 가장 예뻤'던 20대를 바라보며 쓴 시이다. 이 시에서 그는 참혹했던 전쟁의 상처를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머리는 텅비고

나의 마음은 꽉 막혀

손발만이 짙은 갈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멍청한 짓이 또 있을까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마구 걸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선 재즈가 흘러나왔다

금연 약속을 어겼을 때처럼 비틀거리며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탐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몹시도 불행한 사람

나는 몹시도 모자란 사람

나는 무척이나 쓸쓸하였다

 

그래서 다짐했다 되도록 오래오래 살자고

나이 들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 루오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중에서 

 

 

시집을 쭉 읽어나가다 보면 한국을 향한 애정이 어린 마음이 느껴진다. 시인 윤동주에 대한 존경을 담은 시나, 일본의 만행을 비판하는 시, 한국인을 담은 시를 많이 볼 수 있다.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이바라기 노리코는 한국의 예술에 대한 애정이 매우 컸다. 40대에 남편과 사별한 뒤에는 한국어를 배웠고, 한국의 시인들을 알게 되었다. 한국의 현대시들을 직접 고르고 번역하여 책을 내기도 했다.

 

그중 시인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윤동주와 그의 시에 첫눈에 반했다는 그녀는 그의 시를 번역하여 일본의 교과서에 싣는 것에 힘썼고, 그 결과 윤동주의 시가 일본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그리 노래하며

당당히 한글로 시를 썼던

당신의 젊음이 눈부시게 밝고도 쓰라립니다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달빛처럼 맑은 몇 편의 시를

서툰 발음으로 읽어보지만

당신은 조금도 웃지 않으시네요

 

― 「이웃나라 언어의 숲」 중에서

 

 

전쟁의 참혹함과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 통치를 시언어로 고발하며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시들 사이사이엔 소소하고 포근한 시들이 자리하고 있다. 일상과 사람을 바라보며, 소녀 같은 감수성으로 모든 것을 보듬었던 시에는 그의 향이 가득 담겨있다. 그중 가장 오래도록 머무르게 했던 시 「답」을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는 이제껏

언제가 제일 행복했어?

 

열네 살의 어느 날

나는 문득 물었다

할머니가 참말로 쓸쓸해 보이던 날

 

지나온 세월을 이리저리 더듬으며

천천히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

할머니는 의외로 단번에 대답하셨다

"아이들을 화로에 둘러앉혀놓고

떡을 구워줬을 때"

 

눈보라치는 저녁

눈의 마녀가 나타날 것 같던 밤

어스름한 램프 밑에 대여섯 명

화로 앞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 우리 엄마도 있었으리라

 

아주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처럼

너무도 구체적이고

빠른 대답에 놀랐다

그날 이후 오십 년

사람들은 모두

감쪽같이 사라지고

 

내 맘속에서만

때때로 종알대는

소박한 단란

꿈같은 대보름 축제

 

그 시절 할머니 나이를 훌쩍 넘긴

지금에서야 절절히 음미한다

그 말 한마디 안에 담겨 있던

구운 떡처럼 은근하게 짭조름한 맛을

 

― 「답」

 

 

*

 

얼마 전 내 글을 읽은 어떤 이가 글을 보니까 네가 정확하게 보인다고 말해서 부끄러웠던 적이 있다. 기분 좋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벌거벗은 부끄러움이었다. 시를 읽어보면 이를 쓴 시인이 부끄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보인다.


글쓰기 과정은 고통을 수반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끝에는 정신이 맑아지는 통쾌함이 있다. 시를 읽으면 그 과정이 선명히 느껴져서인지 글자에 담긴 고통보다는 먹먹하고 맑은 상쾌함이 남는다.


앞에서 소개하지 못했던 「나무는 여행을 좋아해」라는 시에서 그 마지막 연이 마치 시를 쓰는 시인처럼 느껴졌다. "나무기둥에 손을 대면/ 가슴이 아플 만큼 느껴진다/ 나무가 얼마나 여행을 좋아하는지/ 방랑을 향한 동경/ 표백을 향한 마음에/ 얼마나 몸을 비틀고 있는지가".

 

모든 게 빠르게 흘러가고 모든 게 쉴 틈 없이 쏟아질 때, 행과 행 사이에서, 연과 연 사이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어 시집에게, 낭독회에게, 그 곳에 데려가 준 친구에게 고마웠다. '시'라고 말하면 달궈진 마음에서 나오는 숨이 잇새로 살짝 나온다. 시를 읽고 나면 왠지 이 달궈진 숨들이 모여 세상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진다. 다음에는 어떤 시집을 사볼까 설레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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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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