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윤희가 오타루에서 찾은 것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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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의 숙명
편지를 쓰는 사람은 일정량의 그리움을 가진다. 지금 당장 사랑하는 사람의 귓속에 전하지 못하는 말을 편지에 담는다. 오랜 그리움을 가진 사람이 여기 있다. 쥰은 윤희의 꿈을 꿀 때마다 편지를 쓴다. 끝내 쥰이 부치지 못한 편지는 쥰의 고모 마사코가 우체통에 넣음으로써, 이제 쥰의 그리움은 그녀 자신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편지가 그리움을 품은 숙명을 지닌 이유는 과연 이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다. 쥰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윤희에게.’
<윤희에게>는 퀴어 영화다. 20년 전 학창 시절 그들은 연인 사이였다. 쥰은 윤희와의 이별 이후 일본인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가게 되고, 일본 오타루에서 고모 손에 자랐다. 당시 윤희는 부모님께 쥰에 대한 마음을 알리지만, 그로 인해 부모님 손에 이끌려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렇게 그녀는 친오빠의 소개로 남성과 결혼을 하고 슬하에 자녀 한 명을 둔 채로 이혼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그들의 삶에는 서로가 없었다고 말하기 어려우므로, 쥰과 윤희 사이에 발생한 물리적 거리는 동성연애의 어떤 어려움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쥰의 편지를 먼저 발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윤희의 딸 새봄이다. 편지를 읽은 새봄은 삼촌과 아빠를 각각 찾아가 윤희에 대해 묻는다. - 삼촌(“엄마 얘기 좀 해주세요.”) 아빠 인호(“엄마랑 왜 헤어졌어?”)
기어이 윤희에게도 당신 자신이 누군지 묻는 질문을 하게 된다.(“엄마 뭐 때문에 살아?”) 일종의 초대장을 먼저 열어본 새봄은 수신인 윤희에게 은근하게 말한다. “우리 해외여행 갈까? 눈 많이 오는 데로.”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인 윤희에게 새무룩해진 새봄은 편지를 다시 우편함에 넣어두고 윤희는 쥰의 편지를 읽게 된다. 이제 여기 그리움으로 응답하는 사람이 있다. 못다 한 말이 있는 사람은 편지 말미에 여백을 남긴다. 윤희의 편지는 이렇게 끝맺는다.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그리움은 만남을 부를 수 있나
오랜 시간 그들은 서로의 꿈을 꿨다. 편지를 매개로 쥰의 부름이 도착했고 윤희 또한 그리움으로 응답한다. 그렇다면 오랜 그리움은 서로를 부를 수 있는 걸까? 그리운 마음만으로 모든 만남이 성사된다면 어떤 이의 가슴에도 슬픔과 설움은 없을 것이다.
쥰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한-아버지의 돌연한 죽음 때문에 윤희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쥰의 편지를 받자마자 답장을 쓴 윤희는 어떤가. 윤희가 처한 현실은 너무나도 현실이어서 답장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쥰의 말처럼,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윤희는 과연 그랬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쥰의 부름보다 윤희의 응답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공장의 식당조리사로 일하는 윤희는 편지를 읽은 다음날 출근 차량에 올라타지 않는다. 윤희는 어딘가에 서있고 열차 경고음이 크게 울린다. 이 날카로운 경고음은 말 그대로 윤희에게 ‘경고음’이다. 열차는 매섭게 그녀 앞을 지나가고 윤희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손쓸 수 없이 무언가 불타는 광경을 바라보는 사람은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머지않아 그녀는 공장 영양사에게 못 쓴 휴가를 달라고 부탁하는데, 돌아올 때까지 못 기다려준다는 답변을 들은 윤희는 답한다. “그래. 기다리지 마.” 영양사에게 뱉은 이 말은 윤희의 어떤 현실을 향한 선언이기도 하다.
공장을 빠져나와 걷는 윤희의 얼굴은 이내 편안해진다. 여기까지 한 권의 책이라면 독자는 들썩이는 마음으로 다음 페이지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주인공은 떠날 것이라고. 윤희는 새봄과 함께 오타루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다. 누군가의 부름, 그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사람은 떠나올 수 있는 걸까? 이 영화는 한 가지가 더 있다고 말한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바로 ‘용기’다. (윤희는 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딸 새봄은 윤희의 용기를 이끈 일등공신이다. 오타루 여행을 제안한 것과 쥰을 찾아갔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던 그들의 재회를 성공하게 한 인물은 새봄이다. 재회하는 모습을 뒤로하며 달을 올려다보는 새봄의 모습은 마치 임무를 완수한 요정처럼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쥰에게는 고모 마사코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마사코는 윤희의 편지를 몰래 우체통에 넣은 장본인이다. 실제로 쥰과 윤희가 재회를 하기 전 새봄은 마사코를 찾아가는데, 이 장면은 마치 사랑의 큐피트들이 접선하여 도모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편지를 쓰는 몫은 쥰과 윤희였지만 배달해 준(용기를 대신해 준) 역할은 마사코와 새봄인 것이다.
눈은 언제 그치려나
그들이 재회한 겨울의 오타루는 어떤 곳인가. <윤희에게>는 홋카이도라는 공간적 배경이 동일한 영화, 이와의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와 쉽게 언급되고 있지만 ‘러브레터의 유산’이라는 평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러브레터 속 펼쳐지는 ‘아름다운 설경’에 이 영화는 아무래도 관심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퀴어 서사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볼 때,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거나 포기해야 했던 윤희와 쥰이 오랜 세월이 지나 재회하는 곳은 오롯이 서로를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눈에 쌓여 보이지 않는 철길처럼, 겨울의 오타루는 ‘쌓인 눈’의 속성에 기대어 그들이 안전하게 만날 수 있는 장소다. 윤희가 살고 있는 도시와는 이질적인, 새하얀 이곳은 어쩌면 서로의 꿈을 꿔왔던 두 사람이 함께 꾸는 꿈일지도 모른다.
쥰과 윤희는 시계탑 앞에서 마주친다. 그들의 재회 신은 극적일 것 없이 이게 전부다.
“윤희니?”
“…”
어떠한 접촉 없이 그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은 운하를 따라 걷는다. 쥰이 자주 꿨던 꿈처럼 두 사람은 그냥, 함께 있을 뿐이다. 사실상 영화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장면이 격렬하지 않아 아쉽다는 세간의 평에 나는 그러니 아름답지 않느냐고 설득해 보고 싶다.
이 영화가 가지는 태도가 그러한데, 마사코가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눈이 언제 그치려나?” 겨울의 오타루는 눈이 그칠 기미가 안 보인다. 눈은 치워도 치워도 쌓이는데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막막하지만 일종의 주문을 외우면서 눈을 치우는 일뿐이다.
달이 차오르고 눈이 내리고 밤이 찾아오는 일에 우리는 무력하다. 하지만 자조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살아갈 때 가장 기다리던 순간(쥰과 윤희와 재회)에 수다스럽지 않고도 많은 말을 품을 수 있는 것, 뜨겁지 않은 방법으로 가장 뜨거울 수 있다고, 이 영화는 보여준다.
돌아온 사람의 얼굴
쥰과 윤희가 다음을 기약했는지 모른다. 중요한 이야기는 이것이다. 돌아온 윤희는 오빠의 사진관에 찾아가 이력서에 사용할 사진을 찍고 인사를 고한다. 새봄과 함께 새 동네로 이사를 가는 차 안에서 그녀의 얼굴은 옅은 웃음을 띠고 있다.
윤희는 이력서를 품은 채 한식집 문 앞에 서있다. “엄마 그 식당이야? 긴장돼?” 새봄이 묻는다. 윤희는 새봄이가 배울 것이 없을 때까지 배우게 할 작정이라지만, 어쩌면 새봄이가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윤희로 살 줄 알아야 된다고. 이제 윤희는 용기를 내고 있다.
[박수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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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우리들의노래는
- 2021.12.01 12:4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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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좋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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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곰
- 2021.12.02 13: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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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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