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양해 바랍니다 - 채식주의자(한강, 2007) [도서/문학]

『작별하지 않는다(한강, 2021)』로 돌아온 그녀의 전언 『채식주의자(한강, 2007)』
글 입력 2021.11.2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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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운 동기는 강력하다.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작인 『채식주의자(한강, 2007)』를 추천한다는 친구의 말을 넘겨들은 지 수년이 지났다. 동 작가의 최신작 『작별하지 않는다(한강, 2021)』를 읽을 독자들에게 나름 연계적인 탐독을 권하는 명분 한 숟가락을 얹기로 하자 자연스레 책장이 넘겨졌다. 선혈과 욕정의 장면들은 필자로 하여금 자기 검열을 하게 했고 예술과 도덕의 관계성에 입장을 유보하던 과거의 필자는 짐짓 그의 추천사를 담아 두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은 또 다른 비유라는 것을. 한강 작가는 설득과 투쟁 사이를 오가는 개인의 신념을 극단적 상황에 배치했다.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는 주관적 감상 뒤에 누구라도 겪을 만한 숱한 선택의 기로가 놓여 있다. 소통은 상식과 이해의 산물이라는 것을 일깨우듯이 말이다. 오늘도 나와 다른 상대와 충돌한 자신을 발견했다면 성공적이었던 대담을 떠올려보자. 그 기준이 타인과 다르더라도 말이다.

 

 

[꾸미기][크기변환]채식주의자, 창비.jpg

 

 

 

채식주의자의 채식주의자: 동어반복의 소통


 

해당 작품이 연작소설인 만큼 도서명과 동명인 단편은 맥락의 중추를 맡았다. 영혜의 ‘채식주의자’ 선언을 통해 등장인물 간 내외적 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처음으로 그녀의 행동을 맞닥뜨린 남편의 시선에서 가족의 만류에 반하는 그녀의 저항이 전개된다. 끝내 자신을 향해 칼을 들은 그녀는 피 칠갑을 한 채 병원으로 이송됨으로써 일단락된다. 이어지는 단편들은 영혜의 입원 이후 이야기로 ‘몽고반점’에서는 그녀의 형부가 ‘나무 불꽃’에서는 그녀의 언니가 중심인물이 되어 영혜와의 관계를 그린다.

   

 

말문이 막혔다. 요즘 채식 열풍이 분다는 것쯤은 나도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알고 있었다. 건강하게 오래 살 생각으로, 알레르기니 아토피니 하는 체질을 바꾸려고, 혹은 환경을 보호하려고 사람들은 채식주의자가 된다. 물론, 절에 들어간 스님들이야 살생을 않겠다는 대의가 있겠지만, 사춘기소녀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인가. 살을 빼겠다는 것도 아니고, 병을 고치려는 것도 아니고, 무슨 귀신에 씐 것도 아니고, 악몽 한번 꾸고는 식습관을 바꾸다니. 남편의 만류 따위는 고려조차 하지 않는 저 고집스러움이라니.


- 『채식주의자』, 창비, 2007, 21면

 
 

서로 관망만 했을 뿐이었다. 표지와 평가에 사로잡혀 갈피를 잡지 못한 그때의 필자처럼 말이다. 가족들은 영혜 앞에서 같이 산 역사를 운운했고 건강을 우려했고 계속 그럴 거냐며 나무랐다. 함께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함께할 공산이 큰 미래가 점철된 말들은 꽤 설득력 있었다.

 

그러나 논점을 이탈한 근거는 상처가 된다. 영혜와 가족 모두 대화의 진전이 불가하다고 느꼈을 당시 채식주의는 마찰의 허울이었음을 알고 있었을까. 그녀가 친절한 설명으로 의견을 피력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도 자신을 형용할 수 없는 순간에 봉착한다.

 

 

 

채식주의자의 몽고반점: 이식된 상식


 

잣대에 따라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이 문제가 되기도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다. 시들어가는 분재에 바닷물을 붓는다면 죽으라는 소리다. 그렇다고 증류수를 공급해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영혜의 형부는 증류수의 마음으로 바닷물의 결과를 낳았다.

 

미디어 아티스트인 그는 그녀의 몽고반점에 추동되었고 그녀는 자신의 몸에 그의 손길로 형상화되는 꽃에 잠식되었다. 몸을 섞을 필요는 없지 않았는가. 필자에겐 그들의 교감이 거북했다. 피를 나눈 사람들이 아니었음에도 사회가 통용하는 상식 밖의 결합이라도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그는 오랫동안 해답을 찾아왔다. 어떻게 이 이미지로부터 달아날 수 있을 것인가를. 그러나 이것이 아니면 안되었다. 이것만큼 강렬하고 매혹적인 어떤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아니라면 어떤 작업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전시와 영화, 공연 따위가 시시하게 느껴졌다. 오로지 이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 『채식주의자』, 창비, 2007, 74-75면

 

 

상식은 전이된다. 영혜는 가족에게 안겨준 충격만큼의 터전을 갖게 되었다. 영혜가 숨을 쉬는 만큼 가족의 생명력은 저물어갔다. 그녀의 행보가 성공적인 혁명으로 보였을까. 그가 억누르고 있던 집념을 풀어헤쳤을 때 영혜의 것도 반란으로 격하되었다.

 

상식은 저마다 판이해서 우리는 상대의 진의를 때로 오해한다. 그의 언행이 변명으로 들릴지라도 실상은 아닐 수 있다. 일견 타인과의 일상을 지탱하는 건 도덕이 아니라 힘일 것이다. 각자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의 갈등인 것이다. 그러나 승자와 패자 모두 대가를 치른다는 점은 서로 묶인 상태에서 상식을 내재화해야 하는 이유다.

 

 

 

채식주의자의 나무 불꽃: 타오르는 이해의 초상


 

가장 고요해야 할 사람이 결국 피를 본다. 영혜의 언니는 남편과 결별하고 동생 영혜와 자신의 자녀를 돌본다. 애증의 현실은 꿈으로의 도피를 허락하지 않는다. 악몽을 피해 현실에 맞선 영혜가 이기적일 정도로 그녀의 언니는 초연해지려 극기한다.

 

이해는 상대를 전제로 하기에 잔인하다. 개인의 자의가 관철되기 위해 타인은 희생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영혜의 언니는 정리되지 않은 일련의 시간을 감내하기로 했고 혹자는 그녀를 보며 아량도 선택이라고 건조한 답변을 내놓을지 모른다. 그녀는 자신을 연소시킨 것이다. 나무가 되고자 한 동생을 위해. 남은 혈육을 위해.

   

 

그녀는 곁에 선 영혜의 옆얼굴을 보지 않았다. 아직 잎을 다 떨구지 않은 낙엽송들 위로 부서지는 청명한 초겨울 햇살만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위로하듯 평온하고 낮은 목소리로 영혜는 그녀를 불렀다.

언니.

영혜의 낡은 검은 스웨터에서 희미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영혜는 한번 더 언니, 하고 속삭였다.

언니, ……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 『채식주의자』, 창비, 2007, 175면

 

 

결핍이 없다면 이해도 부재한다. 나와 상대가 같지 않기에 이해에 있어 수고로움이 수반되는 것이다. 내가 상대의 것을, 상대는 나의 것을 다 갖추고 있노라면 구태여 노력하지 않아도 서로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혜 언니의 삶은 매우 안정적이었기에 변수에 쉬이 적응하지 못했다. 근면 성실하게 생계를 꾸리고 살림을 하고 남편과 아이 그리고 친정 가족까지 품는 그녀가 바람직한 사회인, 아내, 엄마 그리고 식구의 표본인 만큼 낯선 난제에서 허우적대는 초상으로 거듭났다. 고의는 아니었으나 많은 양해가 필요했던 세월은 아마도 자신의 결핍을 돌아보지 못한 그녀를 벌한 것일지도 모른다.

 
*


사람은 떠나거나 발악하거나 견딜 수 있다. 소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떠나버린 영혜의 남편, 소통하지 못해 발악한 영혜와 영혜 언니의 남편, 소통을 견뎌 온 영혜 언니는 평범한 가족이었다. 상식의 차이가 이해를 동반하면서부터 소통의 물꼬가 트인다. 완벽히 등가의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고 한쪽이 더 유리한 편향성의 결과로 소통이 종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소통의 내막은 사실로 남아 굴레를 만든다.

 

사람은 탄생하고 이내 죽는다. 식물에 대한 지향성으로 고뇌했을 영혜는 죽음을 불사하고 정신적 존립을 원했고 가족들은 하루가 달리 피폐해져 가는 영혜를 시각적으로 인식하며 마냥 두고 볼 수 없었을 게다. 별일이었지만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중대사 속에 아이는 존재했다. 영혜 언니와 그녀의 남편 소생인 지우가 이를 어떻게 이해할지 미지수이지만. 헛헛함으로 치부하기엔 큰 사랑의 결실이 탄생했고 그는 자신을 둘러싼 뿌리와 소통해야 하는 순간을 직면해야 할 것이다.

 

 

 

윤하정.jpg

 

 

[윤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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