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갈증 - 연극 '슈미'

글 입력 2021.11.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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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쓰는 것이 이 연극을 위한 알맞은 찬미가 될까.` 리뷰에 앞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것이다. 그만큼으로 본 극에 충분히 매료되었다. 시놉시스가 채 담아내지 못한 것들을 일일이 풀어내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더 많은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게끔 반쯤 가리어내는 것이 좋을까? 아직 서두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슈미 포스터.jpg

 

 

연극 `슈미`, 슈미라는 중심인물을 기점으로 하여 형성되는 여러 인물의 관계망 속에서 인간의 은밀한 욕망과 그 모순을 세련되게 펼쳐내고 있다. `일반적`이지 않은… 혹은 각자 숨기고 싶고 또 숨기어 마땅한 욕망이 슈미의 곁에서 하나둘 풀려나고 관객들은 서서히 이 은밀한 광기 속으로 잡아당기어진다. 불길한 호기심 속으로….

 

`일반적`이라는 말처럼 식상한 표현이 더 있겠냐마는, 여러분 스스로 객석을 찾아 이 은밀한 욕망의 나신을 정면으로 마주하시면, 곧 `이곳`과 저기 무대 사이의 날카로운 거리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곤 `일반`의 의미에 대해 상기하게 될 것이다. 내재된 사회화 규율을 건드리는, 이 발칙한 씬 앞에서.

 

벌써 극은 하나의 주제 의식, 내지는 그 의의를 드러낸다. 이런 류의 연극이 으레 그러하듯, 극의 의의 중 하나는 상식과 관습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상기시키는 것. 극은 당연하지 않은 장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미 당연시된 의식들을 전면으로 소환한다. 무대라는 제3의 세계 위에 마련된 룰과 객석 모두가 이미 공유하고 있는 룰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체험하고, 무대에 대한 비판, 나아가서는 비판하는 자신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연극이 가지는 `약속된 일탈의 힘`이다. 무대 위에서는 어떠한 비상식이 등장하건 간에 다정하고 호기심 많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어둔 채로 그 위의 기행을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 `일상의 균열`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비상식적인 무대의 면모를 상식의 관점으로 비판하다가는, 비판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마주하게 된다. 이것이 극의 의의이고, 내가 가끔 연극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슈미.jpg

슈미

 

 

인물들의 뒤틀린 욕망은 슈미라는 촉매를 통하여 슈미에게로 풀리어난다. 주인공 슈미는 그만큼의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다. 그녀의 이 비범한 카리스마는 결코 충분히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아직 관객으로서의 내가 가지는 경험의 폭이 좁기 때문일까? 그렇다기에는 그녀의 사고방식에 상당 부분 불문율이 결여되어 있고, 기저 동기로서의 욕망이 모호해 충분한 설득력이 있는 가설을 그려내기 어렵다.

 

그럼에도 슈미의 카리스마는 제3의 벽 너머 여러분이 계신 객석에까지 닿고, 여러분은 슈미의 카리스마를 모호한 중에나마 긍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본 극을 이끌어나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전제이다. 슈미의 카리스마가 충분히 납득되지 않고서는 본 극의 진행이 최소한의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슈미 曰  "스스로 빛나는 나의 아름다움을 사랑해."

 

 

그녀의 행동들에서 일관적으로 엿보이는 욕망이란 이렇듯 이해되기 어려운 성질을 띤다. 그녀가 말하는 `스스로 빛나는 나의 아름다움`에 대한 해석을 그려 나가는 것, 이것이 본 극을 바라보는 주된 관점이 될 것이다. 극은 이러한 은유들을 우아하게 풀어내고, 아주 성공적으로 가려내고 있다. 은연중 이해될 것 같으면서도 완벽히 이해되지 않는 것, 은유를 해체하여 낱낱이 해부해 보이지 않고 베일에 가려둔 채 실루엣만을 선보이는 것. 여기서 미학적 즐거움이 발생한다.

 

**

 

다섯 인물의 욕망은 각자가 상정한 `아름다움`을 가리킨다. 슈미의 아름다움과 경만의 아름다움, 애경의 그것과 유완, 도규가 꿈꾸는 아름다움은 각 다르고, 이 욕망이 발현되고 얽히며 생성되는 상호작용 속에서 결함과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경만은 사랑의 아름다움을, 애경은 구원의 아름다움을, 유완은 이상 개념 理想 槪念인 완전한 정신적 자유라는 아름다움을, 도규는 지배자의 아름다움을 흠모한다.

 

슈미는 `홀로 완전한 인간`이 지닐 아름다움을 흠모하나, 스스로 그런 이가 되고자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아무런 행동 의지가 보이지 않고 그저 찬미 받는 존재로서, 또한 지시하는 존재로서 남아있고자 한다. 기꺼이 오만하고도 찬미 받는 자인 그녀는 타인을 조종하여 `완전한 인간`의 아름다움을 목도하고자 한다. 이 모순이 그녀와 주변 인물들을 광기로 몰고 간다.

 

 

유완.jpg

유완

 

 

여러 욕망 중 핵심 제재는 슈미와 유완의 그것이다. 유완이 꿈꾸는 완전한 정신적 자유와 슈미가 꿈꾸는 홀로 완전한 인간 개념에는 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진리`에 대한 고찰과 닮았다. 그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과 집착은 결국 좌절 속에서 뒤틀리고, 모순을 낳는다.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자율적 결정에는 배면의 욕구가 존재하는즉슨 욕망에 추동되는 불완전한 것이라면, 완전한 채로 종결될 수 있으며 원초적 본능을 완벽히 배신하는 것으로서의 결정, 그 어떤 욕구에도 기인하지 않은 철저한 이성적 명령으로서의 선택인 자살이야말로 모든 욕구로부터 초월하는 자주 自主이자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게끔 하는 선택, 곧 인간의 최고 자유라는 이 뒤틀린 개념은 진리에 대한 집착에서 파생되는 모순이다. 논리적 완벽을 추구하다가 보면 실패에 봉착하거나, 모순으로 도피하게끔 되어 있다.

 

결국 아름다움에 대한 각자의 집착, 갈증은 모두를 파멸시켰다. 경만은 가질 수 없는 사랑인 슈미를 집착함으로써, 애경은 타인에게서 얻은 구원의 허상을 집착함으로써, 유완은 완전한 정신적 자유라는 불가능을 집착함으로써 서서히 파멸해갔고, 도규는 지배와 피지배의 욕망을 탐닉하며 기꺼이 추악한 자가 되었다. 이 갈증에 디오니소스적 광기, 술 취한 신의 축복은 파멸을 재촉하는 방아쇠가 되어준 것이다.

 

모두의 마음속에 욕망과 집착, 그리고 좌절과 파멸의 불길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할 때쯤 파티는 열린다. 디오니소스적 광기, 술 취한 신의 축복인 방종과 무질서 속에서 본격적으로 그들은 길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술은 최소한의 이성적 규제와 망설임을 풀어헤쳐 버리는 것으로, 부정적 이미지인 혼돈에 더불어 긍정적 이미지인 자유를 상기시킨다.

 

물론 최소한의 규제와 책임이 제거된 자유는 방종으로 불리는 것이 보통이나, `지금` 고통스러운 자에게는 이 모든 굴레로부터 잠시 벗어나게 만드는 디오니소스의 방종이 곧 아름다움으로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일이기도 한 것, 욕망이 일으키는 갈증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혓바닥 위에 닿은 달콤한 축복이었을 것이다. 애경과 유완이 두 손으로 직조해가던 구원은 하룻밤의 광기 아래 부서졌다. 갈증과 포도주, 이것은 동서고금의 유구한 클리셰인만큼 우리 모두의 일이기도 한 것.

 

결국 유완과 슈미는 모두 죽음을 맞았다. 슈미가 허황한 혓바닥을 놀리며 찬미하던 아름다움이란, 그녀의 최후에 걸맞은 이름이었을까. 그녀는 세상만사에 지루함을 느끼는 스스로를 두고, 이미 죽은 자이자 스스로만을 사랑하는, 스스로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는 자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생계를 위한 그 무엇도 짓지 않고, 신봉자들의 제물을 받아먹고 사는 그녀는 왕이었을까, 아니면 기생하는 자였을까.

 

그녀의 권태로운 행복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다른 이의 기꺼운 헌신에 기반하였음을, 그녀는 의식지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름다운 자신에게 원래부터 주어지던 것. 그녀에게는 공기 같은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녀가 맞은 결말은 그녀의 권태와 나태, 그리고 정신적 허영이 이끈 트랩이지 결코 아름다움으로 불리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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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새들의 무덤`으로 처음 알게 된 극단 <즉각반응>의 배우들을 다시 만나니 참 반갑다. 더하여 다루기 어려운 주제 의식과 은유를 세련되게 표현해낸 배우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극은 언제나 극장을 나서는 길 위의 우리에게 짙은 질문을 안긴다. 쌉싸름한 뒷맛, 이 약간의 갈증을 안고 극장을 나서면, 그러나 이 고뇌가 그리 오래지는 못하더라. 결국 무대와 객석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오면, 여기 일상의 문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요, 여기서는 일상의 법칙이 다시 제 기능을 찾기 때문이겠다. 부재중 전화 8통을 응대하느라 극이 던진 질문과 사유는 삽시간 흩어졌다.

 

그래도 연극이 던진 질문은 일상 속, 내 의식 배면에서 한동안은 자리하고 있을 테다. 그래서 쓴다. 나의 찾는 아름다움은 무엇이었고, 그것은 어떠한 갈증 속에서 한 방울의 디오니소스를 꿈꾸고 있었을까. 사실 내가 또한 `스스로 빛나는 나의 아름다움`, `홀로 완벽한 인간`을 꿈꾸는 자로서, 길을 잘못 접어들어 있지는 않았을까. 그러한 전처로 주인공들의 집착과 광기를 이해하는 오늘 밤, 슈미의 공허를 괜스레 내게 투영해보며 집으로 미끄러져 돌아왔다.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은 강 위로 흘려보내야만 했던 것일까 하는 쓸쓸한 질문을 쥐고 마지못한 두 손, 이것도 전부 집착일 것이다. 그리곤 아름다움이 피워올리는 갈증을 굽어보고서, 이내 디오니소스가 멀리서 나를 찾아오고 있을 것이다.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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