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차 한 잔 할래요?

고작 차 한 잔이지만 그걸로도 충분할만큼 무탈하게, 소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오늘이길 바란다.
글 입력 2021.10.3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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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차 한 잔이 일상을 밝혀주고, 따듯한 차 한 잔이 마음을 달래줄 수 있길.

 

고작 차 한 잔이지만 그걸로도 충분할만큼 무탈하게, 소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오늘이길 바란다.

 

  

요즘 내 취미는 차를 마시는 것이다. 바쁜 하루 일상을 보내고 돌아와 시원하게 또는 따듯하게 마시는 차 한 잔은 그 날의 나를 가볍게 달래준다. 지금 내 방에는 꽤 여러 종류의 차가 있다. 선물받은 TWG의 얼그레이나 오설록의 세작같이 꽤 비싼 종류의 차도 있고, 어릴때부터 먹던 둥굴레차, 녹차, 우엉차, 국화차도 있다.


그 중에서 내가 요즘 가장 즐겨 마시는 종류는 TWININGS의 얼그레이와 레이디그레이다.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무난하게 보장된 브랜드라서 가장 손이 간다. 그 중에서도 레이디그레이는 홍차에 오렌지껍질, 레몬껍질, 감귤향을 입힌 차인데, 기분좋은 향긋함과 상큼한 때문에 차에 관심도 없고 잘 모르는 나와 내 친구들도 항상 맛있게 먹는다. (당연히 광고는 아니다.)

 

이른 아침 일어나 여유롭게 드립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잘 구워진 토스트에 크림치즈와 잼을 발라서, 포근한 이불에 안긴채로 창문으로 들어오는 쌀쌀해진 바람을 느끼며 깨어나는 아침을 좋아한다. 하지만 아침은 언제나 피곤하고 주말이 아니면 이런 일상을 상상하기 어렵다. 전날 밤 미리 내려서 냉장고에 넣어둔 더치커피나 밀크티를 한 병 가져가 팀원들과 나눠먹는게 아침의 최선이라는 것을 일주일 만에 깨달았다.


커피를 좋아하지만 저녁때 커피를 마시기에는 카페인이 부담스럽다. 그래서 밤에는 원두를 갈아 찬물과 함께 더치커피메이커에 넣어 커피를 만드는 기분만 느끼고 자연스레 차를 선택하게 된다. 아침을 깨워주는 건 커피지만, 밤을 달래주는 건 차 한 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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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랑 커피는 마시는 시간만큼 내리는 시간도 즐겁다. 집 밖에서는 보통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원하는 일, 친구를 위한 배려, 세상의 다양한 기준에 맞춰 눈치를 보고 살게 된다. 하지만 방에 돌아와 조명을 켜놓고 차나 커피를 내리는 순간만큼은 나를 조금 더 아껴주는 기분이 든다.


차를 마시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몇 달 전에 이유없이 기분이 자꾸 쳐지는 날들이 있었는데, 친구가 그럴 때 먹으라고 오설록 티세트를 선물해줬다. 가격이 꽤 비싸서 내 돈 주고 사먹어본 적 없던 차였는데, 서랍 한 구석에 쌓아두고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물 대신 한 잔씩 먹으니 기분이 정말 나아졌다. 물론 그 차에는 선물해줬던 친구의 마음도 담겨있어서 그랬겠지만, 그날부터 차를 마시는 일이 즐겁다는 걸 알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취향대로 꾸밀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생겼고, 자연스레 방 한 켠에는 미니 홈카페가 생겨버렸다! 여유로운 아침에 내릴 수 있는 드립커피와 언제든 커피하는 기분을 느낄수도 있고 미리 만들어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더치커피 메이커가 있다. 그 옆에는 원두와 미니 저울이 있고, 예쁜 유리컵도 몇 개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언제든 내 맘을 달래줄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차들이 줄을 지어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다즐링 한 잔을 내리고 있다.


차에는 종류도 많고 그만큼 특색도 다양하다. 같은 얼그레이라도 브랜드마다 조합이 달라서 맛도 천차만별이고 차갑게 먹을 때, 따뜻하게 먹을 때, 밀크티로 만들어먹을 때 느낌이 다 다르다. 아직 그런 것들을 미세하게 구분할 정도는 되지 않지만 느낌이 조금 다르다는 걸 아는 걸로 충분하다. 그 날의 기분에 맞는 차를 내 맘대로 고를 수 있는 정도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괜찮으니까.


실제로 나는 내가 마시는 차가 무엇인지 정확히 잘 모른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얼그레이를 한 잔 내렸는데 자꾸 차 위에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설거지를 잘못한 줄 알고 버리고 설거지를 다시 한 후에 차를 우리기를 반복하는데도, 계속 기름이 떠 있어서 무한한 반성을 했다. ‘내가 지금까지 이런걸 먹었다고..?’ 그렇게 설거지를 두 번이나 하고 다른 차를 내려 속상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을 달랬는데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얼그레이에는 베르가못 오일이 들어간다는 것을.


내가 그동안 설거지 잘못한 것을 반성하고 걷어내려고 노력했던 기름은 얼그레이를 만드는데 당연히 들어가는 베르가못 오일이었다. 그래도 이제 친구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컵에 왜 이렇게 기름이 떠 있어...?’ 하고 물어보면 자신있게 대답해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내놓는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것이다. 그냥 맛있게 먹고 즐겁게 즐기면 되는 일이니까!


나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최근에 아이패드에 저장된 파일들을 찾아보다가 내 전공과 무관한 의학 논문 몇 편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당황했었는데 한 번 훑어보자마자 그 정체를 알게 됐다. 나는 어디가 아프거나 병원에서 진단을 받으면 의학논문까지 다운 받아서 걱정하는 성격의 소유자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예민하고 복잡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일도 있었고, 심한 스트레스를 받던 시기에는 가벼운 이명을 달고 살기도 했다. 최근에도 스트레스성 위염과 역류성 식도염으로 처방받은 약을 먹는다.


며칠 전 PRESS 기고 글 제목으로 ‘책 한 권 읽는다고 고민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이라고 썼는데, 오늘도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차 한 잔 마신다고 고민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차를 마시는 시간은 분명 우리에게 좋은 시간이 된다.


그 날의 기분에 따라 나를 위한 차를 고르고, 몰랐던 향과 맛을 느끼고, 주변사람과 나의 취향을 나누다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좋은 책, 좋은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더 좋다. 그럴듯해 보이는 이름 모를 차가 아니어도 좋다. 집에 굴러다니는 둥굴레차, 녹차 티백으로도 훌륭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글을 쓰다보니 어느새 우려놓은 차 한 잔을 다 마셨다. 조금 기다리면 친구들이 방으로 오기로 했는데, 이번에는 어떤 차를 내려볼까? 미리 물을 받아 끓여놓고 오늘의 차를 골라야 해서 글은 이 정도로 마무리해야겠다.

 

시원한 차 한 잔이 일상을 밝혀주고, 따듯한 차 한 잔이 마음을 달래줄 수 있길.

 

고작 차 한 잔이지만 그걸로도 충분할만큼 무탈하게, 소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오늘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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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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