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뻗어가는 작품, 닿아주는 관객

글 입력 2021.10.3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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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내내 움츠렸던 몸을 펴긴 아직 이르지만, 올가을엔 나름 다양한 문화를 즐겼다. TV로만 봐왔던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를 콘서트에 가서 실제로 들을 수 있었고, 기다렸던 영화가 개봉하여 벌써 두 번이나 관람했다.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하는 드라마를 보며 감동했고 좋아하는 작가의 새로운 소설집을 구입하여 막 읽기 시작했다. 아직은 마스크를 낀 채 박수 소리로만 응원해야 하고 영화관에서는 팝콘도 먹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끝끝내 찾아온 선물들로 아쉽지 않게 마음의 살을 찌운 계절이었다.

 

이렇듯 나는 하루에도 수많은 창작물을 즐기고 향유하는 ‘관객’이 된다. 관객의 사전적 의미는 ‘운동 경기나 공연, 영화를 보거나 듣는 사람(두산백과 「관객」)’으로, 영화와 TV 등을 수동적으로 감상하는 감상자와 달리 능동적으로 무대와 교류하는 사람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문화·예술 장르가 오랜 역사에 걸쳐 감상자 또한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둘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해 보인다. 무대의 형태가 어떠하든 관객과 감상자는 존재하며 무대와 교류한다. 공연장에도, 미술관에도, 영화관에도, 거실에도, 출근길 지하철에도 무대가 있고 관객이 있다. 문화니, 예술이니 하는 거창해 보이는 것에 우리는 사실 관객으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누구든 SNS에 리뷰 한 줄만 남겨도 ‘평’이 되는 시대다. 관객이 문화·예술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가 이를 데 없이 거대해지고 있는 지금, 창작물이나 예술가에 못지않게 관객에 관한 논의 역시 중요해졌음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좋은 관객이란 무엇일까? 문화의 융성에 영향을 미치고 기여하는 관객이 좋은 관객일까? 무대와 교류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감상만 하는 사람은 관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까? 관객의 자격은 어떠한 것으로 판별되고 규정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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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우면서도 어려운 질문이다. 어떤 것의 좋은 예시를 찾을 때 반사적으로 대조하게 되는 나쁜 예시가 관객에 관해서는 잘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즉 ‘나쁜 관객’이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래서, 관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창작물 및 예술가의 좋은 예시를 먼저 생각해 본다. 창작자와 관객은 고립될 수 없으며 문화·예술이 향유되는 장 안에서 필연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교류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쉴 새 없이 대립하고 상충하지만 분리할 수 없고 가끔은 서로가 되기도 하는 둘의 밀접한 관계로 미루어보았을 때, 좋은 창작자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이 좋은 관객을 유추하는 데 결정적인 실마리가 되리라 생각한다.

 

좋은 창작물이란 관객에게 명확하게 닿는 작품이며, 그런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창작자가 좋은 창작자라는 생각은 문화·예술을 마주하고 풀어쓰는 매 과정에서 내리는 결론이다. 공감을 이끌어내든 반동을 일으키든 관객에게 일종의 파동을 전달하는 창작물을 통해 관객은 비로소 작품을 경험하고, 삶의 일부를 움직인다. 이에 덧붙여,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여 관객의 경험을 확장하고 관객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창작물 또한 좋은 창작물이다. 창작자가 예상한 범주보다 작품의 영향이 널리 퍼져나갈 때 창작자와 관객은 예술의 힘을 느끼고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인다. 창작자였을 때나 관객이었을 때나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나 작품이 전하는 울림이 나의 삶에도 문을 두드리고 있음을 느낄 때 있었다.

 

요컨대, 관객을 기준으로 예술의 좋고 나쁨을 구분한다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아닌 관객의 경험 그 자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단한 변화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관객과 마주한 순간만 잠시 반짝이고 이후 영영 잊히더라도 관객의 삶 일부와 분명히 함께했다면 충분한 가치를 발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좋은 관객이란 작품에 기꺼이 함께하는, 즉 ‘닿아주는’ 관객이다. 무대에 손을 직접 내밀지 않아도 무대와 손잡을 수 있음을 인식하고, 가만히 앉아 감상만 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무대의 엄연한 구성 요소인 관객으로서의 역할을 자긍하는 관객, 즉 예술의 힘을 아는 관객이 좋은 창작물에 상응하는 좋은 관객이라고 생각한다.

 

미술관에 가면 한 작품 앞에서 유독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작품을 응시하는 관객을 더러 볼 수 있다. 마치 세상에 작품과 자신만 남겨진 듯이 멈추어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작품을 감상한다기보다 서로 대화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의 댓글 칸에는 음악에 관한 개인의 경험을 일기처럼 자세히 풀어놓은 댓글이 여럿 달려 있다. 닉네임으로 가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려질 정도로 내밀한 이야기들은 답장처럼 정성스레 건네어져 있다. 이들이 작품과 나누는 대화는 문화의 융성에 크게 기여하지도, 창작을 실질적으로 지원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관객을 향해 작품이 힘차게 뻗은 손을 잡음으로써 작품의 목적지가 되어주었고, 삶의 일부를 내어주었다. 나는 이것이 그 어떤 행위보다도 예술적인 성취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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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쁜 관객도 존재할까? 관객이라는 두 글자의 낱말을 빤히 쳐다보다가, 문득 ‘관객 크리티컬’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줄여서 ‘관크’라고도 불리는 이 신조어는 타인의 관람을 방해하는 행위를 뜻하며, 영화관에서 휴대폰 사용을 한다거나 콘서트 도중에 큰 소리로 잡담을 하는 등의 무례한 행동이 이에 속한다. 이처럼 ‘관크’는 공연이나 영화 등 하나의 작품을 여러 관객이 함께 관람하는 공용의 공간에서 주로 발생하지만 관람이라는 행위의 범주를 넓혀 독서, 시청, 청취 등을 포괄할 때도 충분히 적용 가능하다. 문화·예술의 장에서 다른 관객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관객의 가능성은 그리하여 충분히 ‘타인의 관람을 방해하는 행위’를 촉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관크’라고 부를 수 있을까? 타인의 관람을 방해하는 행위는 무심코 일어난다. 음원 순위로 음악의 가치를 폄하할 때, 자신의 감상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맹신할 때, 불법 다운로드와 표절로 창작 윤리를 무시할 때, 예술의 사회적 영향력에 무감할 때, 예술에 수직적 위계를 도입할 때 작품과 관객 사이의 대화에는 잡음이 생긴다. 뻗은 손을 제대로 잡지 못하게 하는 움직임이 타인의 관람을 방해한다. 이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섣불리 나쁜 관객이라고 규정할 순 없지만, 개개인의 자유로운 감상과 해석을 지향함과 동시에 예술의 수신과 발신을 훼손하는 행위를 지양함은 관객과 창작자 모두가 주지해야 할 최소한의 원칙이다. 넓은 의미의 ‘관크’는 이러한 원칙을 깨뜨림으로써 좋은 관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방해하며, 곧 좋은 창작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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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관람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적극적으로 무대와 관계 맺는 ‘좋은 관객’을 만드는 데엔 관객 개인뿐 아니라 이제는 관객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는 창작자의 노력 역시 중요한 도움이 된다. 멀티플렉스 메가박스는 관객에게 선착순으로 ‘오리지널 티켓’을 제공하고 이를 담을 수 있는 티켓 북을 판매하며 영화관에서 직접 영화를 관람한 경험을 개인이 축적할 수 있게 한다. 이로써 관객은 영화를 일방적으로 관람하는 것을 넘어 영화와 함께 한 경험을 삶의 일부로서 수집하게 된다. 가수 아이유는 리메이크곡 ‘가을 아침’을 권장 시간이 아닌 아침 7시에, 깊은 밤을 배경으로 하는 신곡 ‘strawberry moon’을 자정에 공개하며 높은 음원 순위를 기록하는 데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음악과 어울리는 시간에 첫선을 보였다. 작품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환경에서 노래를 들은 청취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 날의 아침과 밤을 노래와 함께 삶에 선명히 새길 수 있었다. 잡기 좋게 뻗어진 손이 마침내 한 사람의 삶에 닿는 데 성공하는 순간이다.

 

예술은 몰랐던 감각을 일깨워주며 무한한 나를 매순간 발견하게 한다. 삶을 확장하는 것만큼 삶을 보는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지평을 발견하는 것 역시 중요한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시야를 단 하나의 기준으로 한정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예술이 필요하다. 실질적으로 삶을 확장하지는 못하더라도 삶을 널리 볼 수 있도록 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장시간 추위에 노출되어 시린지도 몰랐던 손에 온기를 가져다주는 손이 맞닿아지는 순간이, 빛나고 있는지도 몰랐던 곳이 비춰지는 순간이 필요하다. 예술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우리가 작품에 최선을 다해 닿아야 할 이유이고, 좋은 관객이 되어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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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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