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다시 읽고 있습니다 ① [도서/문학]

좀머 씨 이야기를 다시 읽다
글 입력 2021.10.2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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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가게 되었다. 짐을 정리하다보니 먼지 쌓인 책이 산더미다. 어릴 적 읽었던 한국사와 세계사, 위인전부터 세계문학 전집, 학교 필독서, 취향에 맞게 조금씩 사 모은 책들이다.


책을 정말 많이 읽던 시절이 있었다. 책을 정말 좋아했고, 매일 같이 책을 읽었다. 책을 고르는 나만의 법칙이 있었고, 재밌게 읽은 책들을 열을 올리며 추천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책을 과제처럼 읽게 되었다.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읽어봐야겠다는 의무감에 읽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필독서 독후감이 줄어든 후에도 그랬다. 떠오르는 문제작, 신예 여성작가, 올해의 젊은 작가를 찾아 읽었다. 분명 의미 있고 좋은 책들인데 전과는 마음가짐이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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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냥 손에 잡히는 책을 읽었고, 취향이랄 것도 없이 제목만 보고 책을 골라 읽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러다보니 내가 읽은 세계문학의 대부분이 중학생 때 읽은 책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라기도 했다. 대학 과제를 하며 이런 책을 어릴 때 읽었나 싶어 놀랐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 읽은 책들은 막연히 감상만이 기억난다. 스탕달의 ‘흑과 백’을 읽으며 ‘이 남자 쓰레기네’하며 열을 올렸고,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으며 한참 우울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을 거야!’ 다짐하기도 했던 것 같다. 쌓인 먼지들을 털어내며 새삼 내가 요새 책에 소홀했단 생각이 들었다. 쉬는 때엔 휴대폰이나 붙들고 있으면서 시간이 없어 책을 못 읽는단 핑계를 댔다.


그래서 당시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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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집어든 책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다. 남아있는 기억은 ‘쉴 새 없이 걷는 좀머 씨를 관찰하는 이야기’ 정도다. 대충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제대로 기억은 안 났다.


오랜만에 카페에서 책을 폈다. 장 자끄 상뻬의 삽화가 군데군데 삽입되어있어 그림책처럼 쉬이 읽을 수 있었다.

 

 


제 1장. 좀머 씨가 걷는 이유



책을 읽으며 엉터리 같던 기억이 영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에 웃음이 조금 나왔다. 좀머 씨는 정말 쉴 새 없이 걷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우박이 내리는 날에도 하루 종일 마을 곳곳을 걸었다. 아무도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그가 걷는 이유도 알지 못했으나 사람들은 그가 ‘밀폐 공포증 환자라 그렇다.’, ‘몸의 경련을 감추려고 걷는다.’ 등의 추측을 내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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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소년은 그가 밀폐 공포증 환자라 그렇다는 엄마의 말을 듣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밤새 머릿속을 복잡한 단어들이 떠다니는 머리를 헤집었다.


 

나는 좀머 아저씨가 아무 병에도 걸리지 않았고,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강요도 받지 않고 있으며, 단지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내가 나무를 기어오를 때 즐거움을 느끼듯이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모두 자기 자신의 만족과 쾌락을 위해 좀머 아저씨는 밖에서 걸어 다니는 것뿐이고, 거기에 다른 설명은 필요치 않은 것 같았다.

 

 

소년은 좀머 씨가 걷는 것이 그저 그가 그러고 싶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반면 마을 사람들은 좀머 씨의 행동에 갖은 원인을 가져다 붙이며 그를 이해하는 체했다. 병을 앓고 있어서, 강박 때문에, 이상행동을 감추기 위해. 이해를 위해 가져다 붙인 이유들은 어느새 기정사실이 되어 떠돌았다.


우리는 늘 타인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쓴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을 사람들처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대입하는 것? 좀머 씨는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이해를 받아야했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의 이해가 꼭 필요한 걸까? 어린 소년의 시각에서 좀머 씨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공방을 바라보며 책을 읽어 나갔다.

 

 


제 2장. 각자의 고충



중학교 때 쯤 읽었던 이 책은 메모 하나 없이 깨끗했는데, 딱 한 문장만이 밑줄 그어져 있었다.


 

그런 것들보다는 이 세상 전체가 불공정하고 포악스럽고 비열한 덩어리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분노에 찬 자각 때문이었다.

 


책 전체에서 중학생인 나의 마음을 울린 문장이 달랑 이건가 싶어 괜히 웃음이 났다. 밑줄 그은 문장은 이웃집 개 때문에 피아노 학원에 늦은 소년이 피아노 선생님에게 모질게 혼나고 쫓겨난 후 세상을 원망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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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자신을 늦게 만든 못된 개와 자전거를 사주지 않은 어머니, 그렇게 하도록 만든 아버지와 형들, 피아노 연주를 어렵게 만든 헤슬러도 원망했고, 누명을 씌우고 자신을 혼낸 피아노 선생님과 자신을 지켜보기만 했을 하느님도 원망했다. 그러곤 마침내 나무 위에 올라가 죽음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이런 세상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토록 비열한 세상에서 노력하며 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나 그런 못된 악에 질식해 버리도록 두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들이나 잘 먹고 잘해 보라지! 나를 포함시키지는 말고 말이다! 나는 앞으로는 결코 그 사람들이랑 같이 어울리지 않으리라!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리라!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겠다! 그것도 지금 당장!



얼마 전 친구가 지나가다 초등학생들이 ‘유치원 때가 좋았다!’며 한숨 쉬는 것을 봤다며 웃었다. 중학생들은 초등학교 때가 좋았다고 하고, 어른들은 학생 때가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다들 각자만 아는 고충이 있기 마련이다. 어른들이 보기에 소년에게 닥친 일은 ‘고작’ 선생님에게 혼난 일이었을지 모르나 소년에게 그 일은 ‘죽음을 결심할 만큼’ 중대한 사건이었다. 중학생이던 나는 그런 그때만의 고충에 공감했던 게 아닐까.


가끔 살다보면 내 불운이 너무 크게 느껴져 상대적으로 남의 것은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어린아이의 것이 그렇다. 어린 아이들이 한숨을 쉬며 푸념하는 것을 듣자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남의 고민이나 어려움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남의 아픔은 그 사람이 되어보기 전까진 모르는 것이기에 함부로 재단하거나 매도해서는 안 된다. 죽음만이 좀머 씨의 괴로움에 찬 발걸음을 멈추게 해주었던 것처럼, 세상에는 나의 가치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으니 말이다.


 

 

제 3장.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이 소설의 핵심 대사다. 우박을 맞으며 걷고 있는 좀머 씨에게 소년의 아버지가 차를 태워주겠다 붙잡으며 ‘그러다가 죽겠어요!’하자 좀머 씨는 전에 없던 분명한 어조로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하고 소리친다. 간청하듯 떨리는 음성과 창백한 얼굴을 따라 흐르는 빗방울. 내가 그런 사람을 마주쳤다면 어떨까. 나는 죽음을 앞둔 사람을 내버려두고 자리를 뜰 수 있을까? 그가 원한다면 그게 맞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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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 지나친 간섭과 참견은 독이 된다. 그런가하면 무관심으로 인한 사회의 삭막함을 문제로 제기하기도 한다.


언젠가 읽고 글을 기고했던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이 떠올랐다. 내버려두라고 외치는 좀머 씨에게서 바깥은 여름 속 부부가 보였다. 어린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부부와 그들에게 쏟아지는 이웃들의 시선을 ‘꽃매’에 비유하며 아파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짐짓 관심을 가지고 애도하는 체 하며 일상으로의 복귀를 종용하고, 그들의 감정을 멋대로 재단하는 말들이 꽃으로 매를 때리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우리는 멀어져 각자의 벽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까? 개인주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같은 사회를 살아가며 어떤 방법으로든 함께 살아가게 된다. 때문에 공생을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좀머 씨 이야기와 바깥은 여름 속 이웃들의 문제는 ‘어긋난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그들을 헤아리려 하기보단 당장 눈에 보이는 이상행동을 비판하고 자신의 논리만을 종용했다. 어긋난 관심은 감정의 교류로 이어지기 보다는 서로를 상처주고 감추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럴 때면 오히려 침묵하는 것이 서로에게 더 도움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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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에서도 좀머 씨는 늘 그랬듯 그저 걸었다. 바뀐 것이 있다면 호수를 향해 걸었다는 것이고, 그는 점점 호수 속으로 빠져들어 사라지고 말았다. 소년은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소년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좀머 씨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모두가 각자의 상식을 기반으로 추측을 내어 놓았다.


 

내가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또 그렇게 철저하게 침묵을 지킬 수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나 죄책감 혹은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무 위에서 들었던 그 신음 소리와 빗속을 걸어갈 때 떨리는 입술과 간청하는 듯하던 아저씨의 말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던 또 다른 기억은 좀머 아저씨가 물 속에 가라앉던 모습이었다.

 


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다. 그렇기에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공생을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이 물에 가라앉던 좀머 씨의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않은 것은 그가 다른 상식을 붙이지 않고도 좀머 씨가 원하는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하지만 좀머 씨의 외침은 조용한 호수 속에 잠겨들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이뤄질 수 있었다.

 

*

 

책을 다시 읽으니 당시에 읽었던 기억들이 떠오름과 동시에 새로운 착안점들이 눈에 들어와 흥미로웠다. 많은 생각들이 들게 하는 독서는 역시 좋다. 앞으로도 틈나는 대로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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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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