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내가 나에게 하는 연설 [사람]

글 입력 2021.10.22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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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쓴 채로 1년이 지나가버리네.” 하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던 것이 벌써 또 1년이 다 되어간다. 시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고 우리는 판데믹 2년 차가 되어 마스크와 한 몸이 되어있다. 가을밤 공기가 무지하게 좋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창문을 열어두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울적하다. 올해도 이렇게 저렇게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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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12월 즈음, 학교의 글쓰기 수업에서 연설문 쓰기가 과제로 나왔다. 정해진 형식이나 주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연설문을 쓴다는 것 자체만으로 부담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내가 연설을 할 거리가 있나? 연설은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하는 거잖아.’ 하는 생각이 몰려왔다.

 

그러다가 문득, 그럼 나에게 내가 연설하는 건 어때? 하는 생각이 번쩍 난 것이다. 나는 22살의 내가 지난 모든 시간을 지나온 나를 나이만큼 91명 초대해서 연설하는 상황을 설정했다. 95살까지 살겠다는 심보로 말이다. 아! 조용히 앉아있을 수 없을 것 같은 1살부터 4살의 나는 아예 초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쓴 연설문은 술술 써졌다. 제목은 이렇게 정했다. ‘22번으로부터’.

 

연설문은 22번째의 내가 지금껏 살아온 나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앞으로 살아갈 나에게 나를 잘 부탁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22번의 내가 알아낸 삶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말한다. 연설문은 대충 이러하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여러 시간대에 계신 모든 저 자신에게 2020년의 제가 인사를 드리게 되었네요. 저는 22번입니다. 이 자리의 주인공인 과거와 미래의 모든 해에서 먼 길 와주신 100여 명의 모든 분께 감사합니다. 모두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토끼 인형을 안고 중간에 앉아 계신 5번과 맨 앞자리에서 푸근히 웃고 계신 95번까지 모두 환영합니다.

 

(…)

 

제가 물려받은 모든 기억 속에는 중요하진 않지만 급한 일과 급하고 중요한 일들이 우선순위에 있더군요. 하지만 제가 찾아낸 것들은 예상외의 것들이었습니다. 가장 반짝이는 것 모두가 급하진 않지만 중요한 일들이었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주변 사람들 특히 가족에게 표현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사랑을 가득 부어준 후 그 사랑을 주변으로 흘려보내는 것, 몸에 힘을 뺄 줄 아는 것, 정신과 몸을 위한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 마지막으로 현재에 머무를 줄 아는 것. 모두 한 번도 급한 일이라고 판단된 적 없던 것으로 기억되어있더군요. 하지만 깨달은 바에 의하면 이런 것들이 가장 소중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

 

이곳의 날짜는 벌써 12월이 되었고, 제게 머무는 현재는 여러분 모두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빨리 지나갔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각자에게 아주 짧게만 머물 마음 급한 현재를 마음 다해 사랑하십시오. 우린 모두 한배에 타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 모인 과거나 미래의 모든 나와 자신을 비교하여 현재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꾸준히 감사함을 노력하십시오. 또, 물려받은 과거의 모든 추억과 따뜻함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되, 후회만을 키워내어 우리 모두를 끌어내리는 일 또한 하지 마십시오. (…) 감사합니다.

 

 

아직 인생을 덜 살아서, 덜 여물어서 그런지 몰라도 연설문을 쓰면서 조금은 울컥했던 기억이 있다. 작년 한 해는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다 통제되어 안 그래도 안 보이는 미래가 더 뿌옇게 보였던 한 해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최악의 상황에도 깜짝 선물은 있다. 집 밖을 잘 못 나가게 되면서 혼자만의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아졌고, 나는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배운 것들이 저 연설문에 쓰여있다.

 

사람을 아무리 사랑해도 아주 가끔은 진절머리가 나고, 평생을 꿈꿔온 일을 하다가도 가끔 다 때려치고 싶을 때가 온다. 아니면 작년처럼, 지금까지 해오던 삶의 많은 규칙을 뿌리째로 뽑아 다시 세워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작년 한 해 동안 배운 것들을 기억 저편에서 꺼내어 보면 그래도, 인생은 만족할 수 있을 만큼의 선물을 내 앞에 내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11월이 되면 꼼짝없이 연말이다. 이번 해가 좀 익숙해졌다 싶으면 내년이 되는 것 같다. 남은 두 달 동안 단정한 나이테를 한 줄 완성해 내년의 나에게 물려줘야 한다. 이번 연도 끝의 나는 어떤 연설을 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

 

 

[권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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