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마, 이 영화를 네게 바친다 (2) [영화]

영화 <사마에게>와 발터 벤야민의 미학 이론, 두 번째 이야기
글 입력 2021.10.1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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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드의 카메라
민주적 대중이 될 수 있는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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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에게>에서 주목해 볼 만한 것은 와드가 내내 들고 있는 카메라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무엇이든 카메라를 들어 기록하는 것이 익숙한 시대다. 벤야민이 말한 것과 같이 기술이 주어진 것 이상으로 자연스러워진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무궁무진하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어떤 역할을 할까. 이때의 카메라는 와드와 와드를 포함한 알레포의 사람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생생히 기록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술이다. 카메라가 있기 때문에 와드는 개인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삶의 단면들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된다. 기술 복제 시대의 도래에 따라서 민주적으로 정치를 예술화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게 된 예는 와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에서 와드가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촬영 장치를 들고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와드는 이 전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이것을 촬영해 사마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알리는 일이란 사실을 인지하고 있고 그에 대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다.

바로 눈앞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비상 사태에 직면해 사마가 어디 있는지 찾으러 다니는 동안에도 와드는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 와드의 이러한 행동으로부터 그가 카메라를 통해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것에 얼마나 큰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예술 작품은 사회적 구성물
정돈되지 않은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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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에게>에서 주로 등장하는 장면은 카메라 화면이 갑자기 꺼진다든가 화면이 심하게 흔들린다든가 하는 것이다. 화면은 미장셴을 고려하며 관람객에게 아름다운 장면을 선사하지 않으며, 오히려 끊기고 흔들려 울렁거리는 느낌을 유발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병원으로 몰려들고, 폭탄들이 떨어지고, 피는 차마 가셔지지도 못해 여기저기 늘러 붙어 있으며 어떤 날은 핏물이 쏟아지는 것과 같은 장면들이 포착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돈되지 않은 장면은 또 다시 벤야민의 주장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뛰어난 기교를 부릴 줄 아는, 뛰어난 결과물을 내놓을 줄 아는 예술가만이 ‘진정한 예술’을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해 보았을 때, 벤야민은 결코 그렇지 않으며, 예술 작품은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언급했다.

<사마에게>에서 등장하는 장면을 ‘예술은 천재적 재능의 산물’이라는 견해를 바탕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 예술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처럼 벤야민의 주장에 따르면 <사마에게>야말로 예술이 될 수 있다. 이 영화는 와드의 천재적 능력에 따라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역사의 단면을 보여 주는 그런 영화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아우라를 지니고 있는 예술 작품의 경우는 경외심에 휩싸이게 만들며, 그에 빠져들어 현실에 대한 비판 능력을 흐리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사마에게>는 확실히 아우라가 걷어진 후의 예술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와드가 담은 허망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 보며 전쟁이 낳는 결과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고, 현실을 잊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인식하며 주체적으로 예술을 평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카메라라는 기술을 활용하여 <사마에게>를 만든 와드 그리고 그것을 향유하는 관람객이 모두 예술 앞에 민주적, 주체적이게 된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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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사마에게>는 거부하고 싶은 영화가 될 수도 있다. 사마는 전쟁터에서 매일매일 터지는 폭탄 소리에 이제 더는 울지도 않고, 오히려 아빠인 함자는 이를 ‘놀이’ 삼아 폭탄이 터질 때마다 웃으며 사마가 무섭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쓴다. 또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함께 뛰놀던 동생이 방심한 사이에 무자비한 공격으로 인해 죽어 버렸을 때, 형이 그것을 목격하고 곧장 병원으로 달려 갔을 때의 표정이 생생히 담기기도 한다.

이곳에서 죽음은 허망하고 갑작스럽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일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장면이 잡힐 때마다 화면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 보인다. 뿐만 아니라 쏟아지는 피 그리고 시체들을 가감 없이 보여 주고 있어 실제로 작품을 끝까지 보는 것이 힘들었다는 관람평이 있기도 했다.

벤야민은 작품에 완전히 몰입되는 것을 경계했고 차라리 보는 이로 하여금 산만하다는 인상을 줘야 한다고 말했는데, 영화 <사마에게>는 여러모로 보는 이로 하여금 작품에 몰입되기보다는 심란하고 산만한 기분을 느끼며 더욱 촉을 곤두세워 작품을 보게끔 한다.
 
 
 

이 전장의 아이들은 죄가 없다


 

<사마에게>는 관람객들을 위로하는 안락한 영화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충격과 비판 의식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그런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는 아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아이들이 숨통이 거의 끊긴 자신의 혈육을 데려오는 장면에서 알레포의 의사는  '이 전장의 아이들은 죄가 없다.'라는 말을 한다.


이는 폭격으로 인한 굉음의 사이사이에 살아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정부는 잊고 있으며, 이 전장의 아이들은 단지 이 도시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위험에 놓여야만 하는 현실에 있음을 말하기도 한다. 와드가 담아낸 이러한 현실적인 말들은 관람자들로 하여금 더 비판적으로 영화를, 상황을 보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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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아주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와드는 비상 사태뿐 아니라,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 보려고 하는 즐거운 일상도 와드는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자주 웃으려 하고 불안 속에서도 서로를 안아 주려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땅에서도 살아 숨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대조적으로 보여지는 장면들은 전장에서도 언제든 행복할 수 있으며, 전장은 언제든 이 행복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목숨이 저물고 또 다시 뜨는 이 전장에서 와드와 함자가 왜 사마를 낳았는지, 왜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는지. 와드는 사마에게 일상을 통해 잘 보여 주고, 들려 주고 있다.
 
 
 

영화 <사마에게>와 벤야민의 미학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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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대중들을 무지한 집단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맑시스트였던 그는 기술 복제의 시대가 막 꽃피우던 시기에 대중들을 주체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개인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중들을 향한 이러한 기대와 믿음은 비판받는 견해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영화가 정치 선동의 선두에 서서 대중들을 혼란에 빠지도록 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오늘날에는 특히 대중 매체가 개개인의 선택과 가치관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벤야민의 미학과 <사마에게>와 같은 영화는 더 중요하다. 대중 매체의 영향 하에 있다는 것이 대중이 완벽히 이 매체에 잠식당해 버렸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와드가 맞딱뜨린 현실에서 주체적으로 이를 기록하고 정치를 예술화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 그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와드의 기록은 벤야민의 대중에 대한 신뢰의 대답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벤야민은 ‘예술의 유토피아’를 실현할 것을 꿈꾸었다. 그가 대중들에게 걸었던 기대와 기대에 부응하는 주체적인 대중들의 대답은 끊이지 않았고, 어쩌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지 모른다. 와드가 어지러운 화면 속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전쟁과 폭력, 탄생과 죽음, 위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처럼 말이다.
 
 
[박이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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