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마, 이 영화를 네게 바친다 (1) [영화]

영화 <사마에게>와 발터 벤야민의 미학 이론
글 입력 2021.10.10 12:2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영화 <사마에게>는 2020년 1월 국내 개봉작이다. 저화질에 정신없이 흔들리는 예고편으로 첫인상이 남았던 이 영화는 나의 궁금증을 유발했고,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도 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었던 감독 와드의 모습과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카메라를 든 자에게는 어떤 힘이 주어지는지, 목숨이 저물고 다시 뜨는 장소에서의 기록은 어떤 관객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주는지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떠올랐던 것은 독일 철학자이자 평론가였던 발터 벤야민의 미학 이론이었다. 이번 글과 다음 글에서는 영화 <사마에게>를 발터 벤야민의 미학 이론에 기반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스크린샷 2021-10-01 오전 12.35.08.jpg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발터 벤야민(1892-1940)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독일 출생의 발터 벤야민은 1892년 태어나 1940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이라는 논문을 펴내면서 수공적 복제의 시대가 저물고 기술적 복제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여기서 ‘기술적 복제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은 사진, 영화 매체가 상당한 주목을 받으면서 기술적으로 예술을 복제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시대를 의미한다. 이 시대에는 새롭게 사진, 영화 매체가 각광받게 되면서 이 새로운 기술을 바라보는 시선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첫 번째로는 사진과 영화가 기존의 예술 형태를 파괴 혹은 위협하면서 시민들의 눈과 귀를 가려 버릴 것이라는 의견이었고, 두 번째로는 기술 복제 시대의 도래가 시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어 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벤야민은 카메라와 같은 기계를 통해 새로운 기술들을 익히게 될 대중들에게 기대를 거는 입장을 취한, 후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아우라의 소멸


 

700.jpg

 

 

벤야민에게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우상화할 때 ‘아우라가 느껴진다’는 말을 하곤 한다. 어떤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를 두고 ‘아우라’라고 말하는가 하면 저명한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그 순간을 두고 ‘영접’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작품 앞에 경외심을 느끼는 것이다.


이때 벤야민은 예술을 상대로 우상화하면서 이 예술의 지위를 격상시킬 수 있었던 이유를 ‘유일무이하다는 특성’에서 찾아내었다. 사진 촬영도 할 수 없는 시대, 즉 기술 복제가 불가능한 시대에 있어서는 이 작품을 감상하는 순간만이 유일무이한 순간이기 때문에 예술의 지위는 격상된다.


지금에 와서 우리는 예술 작품을 촬영하기도, 직접 가서 보지 않아도 인터넷 검색만으로 더 좋은 화질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기도 한 환경을 누리고 있다. 구글링을 통해 선명한 화질의 이미지들을 보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순간은 일시적이지도, 순간적이지도 않으며 몇 번이고 작품을 볼 수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벤야민은 반복 불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단 한 번밖에는 향유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갖는 구예술은 시민들로 하여금 예술 앞에 경건한 자세를 지니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이때의 예술은 제의적인 힘을 갖는 것에 가까운데, 그는 ‘아우라’를 가진 이 예술은 비판해야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유태인이었고, 유태인 박해를 경험해 실제로 독일으로부터 미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했던 인물이다. 파시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벤야민은 파시스트들이 어떤 방식으로 정치를 예술화 했는지를 직접 목격했다. 파시스트들은 작품을 감상하는 순간만은 유일무이하다는 특성을 이용했다. 시민들이 예술 앞에 제의적인 자세를 갖는다는 것은 그 예술 작품을 ‘감히’ 비판하지 않게 되고 이때 아우라를 가진 예술 작품은 정치적 메시지를 선전하기에 적절한 상태가 된다.


벤야민은 이 파시즘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신격화된 예술이 갖는 힘을 와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의 도래에 따라 ‘예술의 민주화’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전보다 예술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져 대중들이 예술 앞에 주체적이게 되면, 구예술에 대한 아우라라는 것이 소멸하게 될 것이고, 민주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예술 그 자체를 정치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마에게, (2020)




 

 

자유를 꿈꿨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나의 도시 알레포. 사마, 이 곳에서 네가 첫 울음을 터뜨렸단다. 이런 세상에 눈 뜨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엄마는 카메라를 놓을 수 없었어.

 

사마, 왜 엄마와 아빠가 여기 남았는지, 우리가 뭘 위해 싸웠는지, 이제 그 이야기를 들려주려 해.

 

사마, 이 영화를 네게 바친다.

 

 

기술 복제 시대가 도래해 벤야민이 예술에 있어 아우라의 소멸을 기대하게 된 것과 영화 <사마에게>는 어떤 연관성을 지닐까.

 

감독과 촬영 감독을 겸하고 있는 와드는 이 도시에서 내내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와드는 전쟁 상황 속에서 촬영을 하고, 그의 남편인 함자는 유일하게 남은 자신의 병원을 지키며 크게 다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료한다.

 

사마는 와드와 함자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와드는 알레포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왜 엄마와 아빠가 여기 남았는지, 우리가 뭘 위해 싸웠는지’를 사마에게 보여 주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고 말한다. 그 의도로 인해 영화는 사마로부터 시작되고 사마에게 전달되며 끝이 난다.


벤야민과 감독 와드가 처해 있었던 상황의 공통 분모는 지배 세력에 의한 폭력과 억압이 있었다는 점이다. 벤야민은 유태인으로서 박해받았던 경험을, 와드는 내전으로 인해 억압받고 죽임당하는 사람들을 목격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경험을 갖고 있다. 이때 벤야민은 기술의 도입으로 신격화된 예술이 소멸될 것을 기대한 인물이라면 와드는 벤야민이 대중들에게 기대했던 바를 실현하고 있는 감독이라는 데서 둘은 연관성을 갖는다.

 

 

- 2부에서 이어집니다.

 

 

[박이빈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