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력해서 아름다운 '시' [도서/문학]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거야
글 입력 2021.10.07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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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삶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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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머리가 희끗하신 중년 선생님들은 꼭 매번 똑같은 영화를 틀어주시곤 했다. <죽은 시인의 사회>. “오, 캡틴, 마이 캡틴”이라는 명대사가 빛나는 그 영화 말이다. 마치 중년의 선생님이라면 한번쯤은 거쳐 가야 하는 관문인 것 마냥, 학기말 시험이 끝난 뒤 불 꺼진 교실에는 개근하듯 이 영화가 상영됐다. 생각해보면 단 한 번도 집중해서 본 적이 없었으면서 교실 안에서 교실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본다는 지루함에 나도 모르는 새에 이 영화를 보여주는 선생님들은 죄다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편견을 갖게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 건 언제 짝이었는지도 모를 한 짝꿍 때문이었다. 음질이 남다른 좋은 이어폰을 쓰고 서정적인 브리티쉬 락 앨범을 늘 전곡으로 이어듣던 그 애는 늘 악기를 짊어지고 다녔으며 <죽은 시인의 사회>를 책으로 읽고 있었는데, “오 캡틴, 마이 캡틴.” 하며 우수에 찬 눈동자로 연기하는 모습이 우스워서 어쩐지 그 책이 읽고 싶어졌다. 단지 그 벅찬 모습 때문에 그것이 인생의 장엄한 비밀이라도 담고 있는 위대한 서적처럼 보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다.

 

각 잡고 본 영화는 당시 나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했다.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은 중요하지만, 자신의 신념의 독특함을 믿으라는 것을 알려줬고, 바보 같은 일일지언정 다른 각도에서 보는 것을 시도해보라고 말했다. “Carpe Diem, even if it kills me.” 현재를 즐기라는 뻔한 말은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 라는 말로 새삼 낭만적이게도 다가왔으며, ‘예술가’라는 단어와 ‘자유로운 사색가’라는 단어는 치환 가능하다는 것도 깨닫게 해주었다. 무엇보다도 삶의 끝까지 함께 하고 싶은 한 줄을 내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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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거야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읽고 또 읽어서, 지금으로서는 간명하기 그지없는 하나의 명제로 느껴지지만 이 문장을 만나기 전에는 애호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고민이 잦았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대부분 효용이 없는 것이었다. 현실 대응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해답은 물론이고 결론조차 내어놓지 못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시’였다.


 

우리들은 금세 붉어지는 눈을 

그것도 두 개나 가지고 있다니

그럼에도 볼 수 없는 것들도 있다니


사실은 내가 쓰려고 쓰는 것이 시이기보다는

쓸 수 없어서 시일 때가 있다


이병률, 내가 쓴 것

 


시는 기의를 오롯이 담아내지 못한다. "쓰려고 쓰는 것이 아닌" 벅차오르는 감동을 그대로 담아낼 수 없어 "쓸 수 없어서"  겨우 겨우 언어의 테두리만을 더듬어 활자화시킨 것이 시인 것이다. 그러나 시는 의미의 직전까지 가까이 다가가는 힘이 있다. 명징하게 그것이 무엇인지는 짚어내지 못하지만, 그 의미의 옷자락까지는 잡아챈다. 시의 행간에 가만히 머물고 있노라면 유연하고도 강한 본질에 가까운 무언가가 주변을 서성이는 나를 깊숙이 찌르고, 자못 나는 정확한 인식으로부터 크게 위로받은 사람이 된다.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필사를 하는 습관이 생긴 것은 그 어디 즈음이었다.


 

“가로등 없는 골목길을 오리를 십리, 이십 리로 늘여 걸으면서 그는 나직하고도 그윽하게 정지용, 한하운의 시를 암송하곤 했다. 그 남자는 그밖에도 많은 시인들의 시를 외우고 있었다. (중략) 우리에게 시가 사치라면 우리가 누린 물질의 사치는 시가 아니었을까. 그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한 것은 내핍도 원한도 아니고 사치였다. 시였다.


박완서, 그 남자네 집

 

 

전쟁의 궁핍함을 견디던 시절, 누군가는 그 시기를 시를 외는 사치스러움으로 버텼다. 삶의 목적을 손에 쥐고 있어야지만 견뎌지는 삶도 있는 것이다. 시는 마음의 사치를 허용하는 것이며, 무용한 것이다. 그렇기에 아름답다. 아마 시가 쓸모가 있었다면 다른 것으로 변화하고 발전했지, 지금까지 이 아름다움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베어 내어…’ 과거 황진이의 시조나 조선시대 선비들이 읊던 시들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것을 보면, 변함없는 것들에서만 느껴지는 아득한 기쁨과 슬픔이 있다. 그것들은 시를 더 귀하고 아름답게 만든다.


삶을 유지시키는 것과 삶의 목적 중 시는 명백한 후자이며, 미와 낭만, 사랑과 비슷한 의미의 관념에 속한다. 삶을 지속하는 것에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이것들이 없다면 우린 아마 빛바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노오란 은행잎이 바람결에 밀려와 손바닥에 다소곳이 앉아도 감탄하지 않는 삶, 커다란 스크린 앞에서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지 않는 삶, 낭만 가득한 미래를 다채롭게 그려보지 못하고 눈앞의 성과만을 바라보느라 아등바등한 삶을 살게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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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문학의 매체이기 이전에 삶과 더 깊숙이 맞닿아 있다. 언어를 다루는 것은 삶을 사는 방식과 뗄 수 없는 것이기에, 시가 잊히거나 언어들이 거칠어진다면 삶도 은연중에 그 영향을 그대로 받는다고 한다. 나는 시가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집이 계속해서 유통되어 무해하고 투명한 시선들이 계속해서 오고갔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또 한 번 쉬운 다짐을 한다. 재미없고 진부하다는 비난을 받더라도 아이들에게 꼭 <죽은 시인의 사회>를 추천하는 희끗희끗한 머리칼의 중년의 어른이 되겠다고 말이다.

 

 


텅 빈 페이지의 가능성



미국 뉴저지 패터슨시에 살고 있는 버스 운전기사 패터슨의 일주일을 담은 영화, <패터슨>에서는 월요일부터 그 다음주 월요일 아침까지 주인공의 일상을 덤덤하게 보여준다. 그는 운전석에서 운전을 하며 승객들의 일상 이야기들을 묵묵히 듣고 그만의 운율을 찾으며, 종종 자신의 비밀노트에 시를 적는다. 패터슨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을 가장 동경하는 시인으로 삼으며 그 시인처럼 시를 쓰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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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패터슨은 일상에서 글감을 찾아내어 계속해서 시를 쓰지만 거창하게 자신을 시인 혹은 예술가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자신을 '버스 운전사'라고 소개하며, 자신의 비밀 노트는 남에게 보여주지 않고 혼자 간직할 뿐이다. 왜인지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가 동경하는 시인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와 자신을 동등하다고 여길 수는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글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기 어려운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공감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그에 대해 시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시인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처럼 쓸 수 없다 해서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 않았고, 매일같이 일상에서 글감을 찾아내는 나름의 치열함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어떤 것이든 읽고 쓰는 행위는 세상을 더욱 다채롭고 풍성하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 되는 것이었다. 그가 계속해서 내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어서 함께 '쓰는 사람'이 되자고.

 

패터슨은 강요하지 않는다. 특별할 것 없는 반복되는 일상을 관찰하고, 새로움을 포착해내며 기록하고, 그런 면에서 얼마든지 당신들도 시인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질 뿐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최근에 읽은 박연준 시인의 산문집을 떠올렸다.


 

혼자 무언가 끼적이는 일. 속으로 두런두런 혼잣말하는 일. 

익숙하던 것에서 낯선 모습을 발견하는 일. 

뻔하게 말고,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일. 

슬프다고 하지 않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하고 말하는 일. 

힘들다고 하지 않고 "이번 삶은 천국 가는 길 겪는 긴 멀미인가요"하고 말하는 일. 

등을 둥글게 말고 상체를 숙여, 무언가를 품는 일. 

품은 채로 쓰는 일. 

쓰는 사람에게만 귀한 일. 

다른 사람이 보면 "뭐야, 이게?"하고, 무심하게 지나쳐버리는 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쓸모가 발견되지 않는 일. 

우산을 쓰고도 하염없이 젖는 일. 

마음이 밖을 향해 나설 때, 어제가 매듭처럼 따라와 묶이는 일.

 

당신이 이런 적이 있다면, 혹은 이런 상태를 눈치챈다면 당신은 이미 시를 쓰고 있는 거예요. 시는 당신 옆과 뒤,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박연준,  쓰는 기분

 


박연준 시인은 말한다. 아이들은 시인으로 태어났다고. 다만 자신이 시인이었다는 기억을 잊은 사람과 잊지 않은 채 어른이 되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에는 항상 망설임이 없었지만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시인은 그냥 애초에 '시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나와는 완벽하게 거리가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시의 세계도 한몫했다. 쉽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소설은 항상 써보고 싶은 것이었으나, 같은 글인데도 시는 이상하게 그 진입장벽이 훨씬 높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 글을 접하고 처음으로 좋아하는 시인이 진행하는 현대시 강좌를 하나 신청했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혈투를 벌이는 가운데 둘 다 데려가 보기로 마음먹은 첫 번째 시도였다. 사실 신청하고 나서 취소해야 하나 망설이기도 했다.


고민하던 와중에 감사하게도 Project 당신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 의도치 않게 대답을 하면서 시가 다수 등장하게 되었고, 인터뷰어님께서 물어보셨다. "시를 좋아하시나봐요!"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서서히 깨닫고 있긴 했지만 나도 당황스러울 정도의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고 스스로 무언가 경계를 넘은 순간이었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무엇이 좋다고 확실하게 대답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니, 옳은 선택을 했던 것이라고 믿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영화의 후반부에 반려견 마빈은 패터슨의 습작 노트를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그때 한 일본인 관광객이 위로하듯 건넨 말이 인상적으로 남았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이 말에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다시 삶의 구석구석을 시로 빈틈없이 메운다.


내가 일기가 아닌 읽히는 글을 쓰고자 애쓰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시는 아직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고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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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페이지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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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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