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기운,지운] 거짓말/마음/떠남

8장/9장/10장
글 입력 2021.10.0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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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지은의 부모님은 지은이 오래전 자신의 방에 데려온 친구가 남자애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저 지은의 엄마는 평소처럼 딸의 친구를 위한 전기장판과 이불을 미리 준비해두었고, 지은은 매트리스 기운은 전기장판 위에 누워 같이 영화를 봤다. 지은의 부모님은 딸의 방에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남자애가 들어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한 채 이른 아침 출근길에 올랐을 것이다.

 

"난 평생 손자는 못 볼 줄 알았어. 얘는 결혼을 안 한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거든."

지은의 엄마는 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반주를 하며 이 이야길 자주 꺼내곤 하셨다.

"솔직히 나도 결혼을 굳이 해야 한다고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둘이 식도 없이 혼인신고를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괜스레 내가 아쉽더라고. 우리 지은이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한편엔 있었나 봐. 어쨌든 지금처럼 잘 살면 되는 거지. 우리 지운이도 보게 해주고."

 

엄마의 반복되는 레퍼토리가 이어질 때마다 아빠는 옆에서 동의한다는 듯 그들에게 미소를 지어주시곤 했다. 어릴 적 지은이 자신은 결혼을 안 할 거라고 말할 때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아빠는 지은이 기운을 데려왔을 때, 내심 안도했다고 했다. 물론 지운이를 처음 데려온 날 아빠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지은은 보았다. 아빠는 지운이를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기운을 데리고 나가 한참 후에 돌아오셨다. 지은은 그 후 아빠와 기운에게 둘이서 무슨 얘기를 했느냐고 물어봤는데, 둘은 이런 질문을 예상한 듯 언제나 같은 답을 들려주고는 했다. 그 답은 언제나 싱거워서 지은은 더는 묻기를 포기했다.

 

거짓말은 어렸던 시절이 지나가면 그만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어갈수록 거짓말은 늘어만 갔다.

 

지은의 부모님은 지은이 선천적으로 자궁에 문제가 있어 임신이 어렵다고 생각해왔다. 지은이 어렸을 때부터 생리가 불규칙했으니, 그 거짓말은 한 번도 의심받은 적이 없다. 지운이의 존재를 지은의 부모님이 더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지은이 기운과 살면서부터 시작한 오래된 거짓말 덕분이었다. 지은의 부모님은 지은 보다도 어린 지운을 가까이서 살펴준 분들이었다. 낯선 아이의 존재에 허둥지둥하는 지은과 기운의 모습을 보며 걱정섞인 소리를 늘여놓던 것도 지은의 부모님이었다. 평생 지켜오신 그들의 따뜻한 마음은 친모에게 버려진 아이를 가여워하며 그 빈자리를 느끼게 하지 않게 어른들이 만들어야 한다고 지은의 앞에서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어느 날 지은의 이목구비를 닮은 아이가 한 명 더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툭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온 소리를 하고선 지레 놀라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지은은 옅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

 

지은은 기운에게 고백하지 않은 일이 있다.

“기운이랑 잘살고 있니? 별문제는 없고?”

라고, 기운의 어머니는 매번 지은에게 물어보신다. 그럴 때마다 지은은 “어머님, 그럼요. 지운이도 저렇게 잘 크고 있는걸요.”라고 반사적으로 답했는데, 그때 기운의 어머니가 지은 옅은 미소를 지은은 종종 떠올린다. 유치원 연말 연극 무대에 선 자식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래. 잘살고 있음 그걸로 된 거 아니겠니.” 내뱉고는 유유자적 앞서 걸어가셨다. 그 뒤로 지은은 종종 기운의 부모님 앞에선 유독 그에게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걸어갔는데 기운은 이유도 모르고 의아해했다.

 

기운은 아직도 자신이 부모님을 완벽하게 속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은은 기운의 어머니와 대화한 이후로 자신의 부모님 앞에서 더는 거짓말을 꺼내는 대신 말을 줄였다. 당연하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지은의 부모님은 지은이 거짓말을 해야 할 질문을 하신 적이 없다.

 

*

 

집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짓말을 달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항상 부딪혔던 건 거짓말의 경계에 대한 문제였다. 지은은 오랫동안 자신의 가까운 친구들에게조차 자신이 누구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 같다고, 너희가 들려주는 사랑의 굴곡이 자신의 삶에는 없다고 말한 적이 없다, 말할 수 없었다. 지은은 자신에게는 가장 솔직했지만, 타인에게는 거짓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이었다. 거짓말을 도저히 못 하겠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기운과는 다르게.

기운은 자신의 부모님이 자신에게 바랐던 건 남들과 비슷한 경로의 삶이었다는 걸 알았다. 기운 자신이 또래와 달라서 슬퍼할 때 그보다 그의 부모님이 더욱 슬퍼하는 걸 기운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은과 각자의 부모님에게 거짓을 말하는 데 서로 쉽게 합의했다. 하지만 다른 관계에서는 아니었다. 지은은 어디서나 무난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타인에게 굳이 솔직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고, 대충 남들의 장단에 맞춰서 말하며 살았다. 오히려 무식하게 솔직해 놓고 타인의 생각을 신경 쓰는 건 기운이었다.

 

“어쩜 그렇게 대책 없이 솔직할 수 있지?”

“어쩜 그렇게 자기 안에 꼭꼭 숨어있지?”

 

그들은 서로를 비난할 때마다 동시에 자기 자신도 다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저 각자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다른 것뿐이었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은 자신의 곁에는 오로지 자신이 애정하는 사람들만 거의 남는다는 것이다. 지은은 이제야 타인과 자신 사이에 세운 거짓의 벽을 허물고 산다. 일 년에 한 번, 지은은 자신의 부모님이 잠들어있는 나무 앞에서 비로소 기운과 지운이에 대해 조잘조잘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거짓말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그들의 일상을.

날씨가 좋아 바람이 선선한 날에는 왠지 부모님께서도 자신의 거짓말을 이미 오래전에 용서해주었다는 생각이 들고, 어쩌다 비바람 부는 날에는 너무 오랫동안 거짓말을 해온 딸이 미운 걸까, 생각한다.

 

 


 

   

마음

   

 

햇살이 내린 쪽에 맞닿은 얼굴이 따뜻했다.

 

기운이 지은의 LP 플레이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 잤어?”

“응. 나 돌아오니까 너 자고 있더라.”

침을 흘렸나, 쓱 입가를 닦아보는 지은을 보더니, 기운이 웃는다.

“잠도 옮나? 네가 낮잠을 다 자고.”

 

그렇다기엔 지금까지 지은은 기운의 잠을 옮겨와 잔 적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이 집에 오고 나서는 이렇게 한낮에 불쑥 잠이 오기도 했다.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지은을 보고 기운은 다음엔 자신의 집에 놀러 오라며 훌쩍 가방을 싸더니 떠났다.

 

하룻밤만 재워달라더니.

일주일을 있다가 갔다.

집이 조금 싸늘하네, 지은은 보일러의 온도를 조금 높였다.

 

*

 

지은이 사는 집 주변에는 고등학교부터 인연을 이어온 친구들이 산다. 지은과 친구들은 도보 20분 내외의 거리에서 각자의 삶을 즐기다, 심심해지면 불쑥 찾아와 서로가 만든 무언가를 나눠준다. 기운과 여태껏 데면데면한 지은의 친구들은 이제는 기운에게 주라며 선물을 내밀곤 한다. 기운은 그 일주일 동안 자신의 친구들도 부지런히 만나고 다녔다. 가방이 두둑하다 했더니, 친구들이 이것저것 챙겨준 모양이었다.

기운은 지은의 친구들이 각기 다른 방식의 너 같다며 종종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과거의 지은과 어떻게 한순간에 거리가 가까워질 수 있었는지 신기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기운의 입가에 남아있는 미소에 지은은 마주 웃었다.

 

지은의 친구들은 이제야 기운을 꽤 좋아한다. 첫인상이 날라리 같다고 경계하고 지은을 뺏어갔다고 심지어는 어디서 낯선 아이를 데려온 기운을 싫어했던 친구들은 멀리서나마 그들의 삶을 응원하는 조력자가 되어주었고, 지금은 지은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켜주었다.

기운의 친구들은 전국 곳곳에 있었다. 지은의 집에 머물다 간 일주일 사이 사귄 친구도 있었다. 얼결에 지은의 집에서 그들은 함께 밥을 먹었다. 아내를 잃고 아이와 단둘이 사는 그가 직접 담았다는 김치가 맛있어서 지은은 머뭇거리다 그에게 레시피를 물었다. 낯을 많이 가린다는 그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의 아이가 옆에서 조잘거렸다. 그런 아이의 뒤통수를 기운이 쓰다듬고 있었다. 기운이 훌쩍 떠난 뒤 그와 아이가 함께 손을 잡고 지은의 집 대문을 두드린 적이 있었다. 부녀는 지은이 기운이 떠났다고 하자 똑같은 표정으로 아쉬워했다. 지은은 아이에게 기운은 저기 남쪽 아주 멀리 산다고, 하지만 자신이 조만간 그곳에 갈 거니까 그에게 꼭 네 얘기를 전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기운은 자신의 일부를 잘 나눠주는 사람이었다. 그의 마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기운의 섬이 있다면 분명 그 섬은 사람들이 복작대며 평화롭게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각자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하나씩 모아서 아름답게 빛나는 섬, 낯선 관광객이 와도 금세 어울려서 놀 수 있는 섬. 반면에 자신의 섬은 어린 왕자가 사는 행성처럼 아주 작은 섬일 것 같았다. 장미 한 송이와 바오밥나무 한 그루면 꽉 차는 섬, 초대받은 손님과 주인만이 온종일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는 섬.

작은 섬의 주인이 큰 섬에 우연히 닿게 된다면, 큰 섬의 주인은 분명 그녀의 손을 이끌고 섬의 이곳저곳과 사람들을 소개해주다가 자기만 아는 섬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줄 것 같았다. 그 풍경을 보고 감명 받은 작은 섬의 주인은 그를 조심스레 자신의 섬에 초대해 둘은 빙글빙글 자리를 바꿔가며 계속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눌 것 같았다.

 

*

 

기운이 떠난 날의 밤, 지은은 안방의 책장에 꽂힌 일기장들을 매만지다 손에 잡히는 일기장을 꺼내 펼친다. 지은은 일기장 속에 자주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기운이 떠나간 지 오래되지 않아서, 기운과 보낸 일주일이 마치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일기장 속 한 문장에 지은은 시선을 두고는 기운에 관한 생각을 오래 했다.

 

우리가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었던 건 어떤 마음의 힘 덕분이었을까.

 

지은은 어린 스무 살 초반에 기운을 만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결국엔 다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지운이와 함께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냈고, 그 세계 안에서 바깥 세계는 대부분 그들에게 쉽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물론 세계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거짓말을 지어내야 했지만. 이제는 그 거짓말이 전혀 필요가 없으므로, 기운이 떠나기 전날 둘은 그들이 처음 같이 살 때처럼 오랜 시간 그들이 좋아하는 술을 잔에 채워주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이야기의 한 장을 매듭지어도 좋을 것 같다고 지은은 기운에게 말했다.

 

 

두 어른의 세계를 지키기에 동참해준, 끝내 그들의 세계에 기꺼이 뛰어든 지운이에게 항상 고마웠다. 물론 그 아이와의 생활이 항상 행복했다고는 거짓말로도 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지운이가 세 개의 마음을 묶는 끈이 되어주었다는 건 암묵적으로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적어도 지은과 기운은 알았다.

 

아직 기운이 남기고 간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떠남

 

   

얇은 책 한 권과 작은 노트와 펜 하나, 지운이가 사준 필름카메라, 친구가 선물한 무화과 잼을 넣고 가방을 싼다. 빛이 가득 들어온다는 거실 바닥에 누워있기를 좋아한다던 기운이 그렇게 자랑하던 집을 드디어 보러 간다. 통영에 맛있는 거 많은데 뭐 먹으러 갈까? 라는 그의 문자에 네가 만든 김치볶음밥 먹고 싶어 라고 보냈다. 마지막으로 기운의 새로운 친구이자 지은의 옆집 친구가 되어준 아이의 아버지가 준 김치, 그를 닮은 아이가 손에 들려준 편지를 챙긴다.

 

   

 

마지막 '에필로그'

 

   

[전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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