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리를 잃고 싶은 아이, "나는 보리" [영화]

영화 <나는보리>(2018)
글 입력 2021.09.16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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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소통의 시작이 된다. 하지만 누군가는 입모양과 손동작으로 말소리를 그리며 대화한다. 바닷가에 사는 11살 소녀 ‘보리’네 가족이 그렇다. 부모님과 두 살 어린 남동생 ‘정우’는 농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가족의 일상은 늘 고요하지만 화목하다. 어부로 일하는 다정한 아빠와 살가운 엄마, 축구를 잘하는 막내와 철든 큰딸 보리. 그러나 보리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다. 가족 중 자신만이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2018년에 제작되어 작년 5월에 개봉한 <나는보리>는 특별한 소원을 가진 소녀 보리의 이야기를 담은 독립영화이다. 김진유 감독이 연출했으며 김아송(보리 역), 이린하(정우 역), 허지나(엄마 역), 곽진석(아빠 역)이 출연했다. 농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 김진유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보리가 겪는 고충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강릉 주문진의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배경 삼아 자연스럽고도 생생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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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집에 전화하거나 터미널에서 차표를 끊고, 택시에서 길을 설명하는 일은 모두 어린 보리의 몫이다. 할아버지 댁에 가면 통역을 도맡아야 하고, 축제에서 길을 잃어도 목소리 높여 엄마, 아빠를 부를 수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서러운 것은 가족들이 보리를 빼고 즐겁게 수다를 떨 때다. 수어에 완전히 능숙하지 않은 보리와 달리 부모님과 정우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대화한다. 그래서 보리는 학교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사찰에서 아침마다 기도한다.
 
“소리를 잃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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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보리는 바닷물에 뛰어들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해 버린다. 하지만 들은 걸 못 들은 척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옷가게에서는 엄마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친구들은 멋대로 청소 구역을 정한다.
 
게다가 축구 대회를 앞둔 정우의 인공와우 수술도 막아야 한다. 의사 선생님이 수술 후에는 운동을 피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병원에 동행했던 고모가 이 사실을 가족에게 전하지 않은 탓이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보리가 동생의 수술을 말리기 위해서는 소리가 안 들린다는 것이 거짓말임을 밝혀야 한다. 보리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영화는 해안가를 걷는 보리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다른 앵글에서 촬영한 듯한 영상이다. 새파란 하늘을 등진 보리는 ‘나자르본주’를 손에 쥐고 바라본다. 나자르본주는 세상의 시기와 질투를 막아준다는 터키 부적으로, 보리가 영화 초반부 축제 부스에서 터키 상인과 흥정해가며 산 물건이다.
 
하지만 보리는 이것을 바닷물에 던져버린다. 끼룩대는 갈매기 소리를 뒤로하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화면이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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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전반에 걸쳐 ‘바닷물’이라는 소재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바다는 보리가 가족들의 일상에 공감하게 된 계기이자 수단이었고, 어릴 적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아빠가 낚시를 친구 삼았던 공간이었으며, 엄마에게 한눈에 반했던 장소였다.
 
이렇듯 바닷물은 인물들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때마다 그들과 함께한다. 그렇기에 보리가 청력을 잃고 싶다는 소원을 빌며 샀던 부적을 물속에 던져버리는 장면은 영화의 오프닝과 연결되어 보리의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것만 같다.

*
 
<나는보리>를 장애를 다룬 영화로만 여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언택트 시대를 맞이하면서 가장 자주 마주하는 사람들은 가족이다. 때때로 우리는 지나치게 가까워서, 너무나도 친밀해서 쉽게 다투어 버리곤 한다. 영화의 주인공 보리처럼, 서로의 상황에 공감하고 각자의 자세를 이해해 보는 것은 장애와 비장애를 불문하고 이 세상의 모든 가족들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일 것이다.
 
배우들의 꾸밈없는 연기도 이 영화의 백미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 보리의 엄마와 아빠를 맡아 연기한 배우 허지나와 곽진석은 실제로 부부 사이라고 한다. 보리네 가족이 키우는 강아지 역시 이들의 실제 반려견이다. 그만큼 장면 하나하나가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이와 더불어 아름다운 영상미, 특유의 정적인 분위기가 영화의 매력도를 끌어올린다.
 
영화에는 한글자막이 포함되어 더 넓은 범주의 관람객들에게도 열려 있다. 농인 여성과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사랑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김진유 감독의 차기작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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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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