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다림'에 대한 고찰 [사람]

글 입력 2021.09.13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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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10시가 되어 자율학습이 끝나면 돌려받은 휴대폰부터 키곤 했다. 친구들과 함께 하교하는 것도 좋아했지만, 나는 휴대폰을 받으면 아빠가 보낸 문자나 부재중 전화가 있는지를 가장 먼저 확인했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아빠의 문자는 언제고 받을 때마다 참 좋았다.


깜깜한 주차장 한 귀퉁이에 차를 세워두고 지켜보고 계시다가, 나를 발견하면 창문을 스르륵 내려 나의 이름을 불러주시던 아빠의 목소리와 표정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당신의 퇴근길이 늦어지거나, 퇴근 후 휴식시간이 줄어듦에도 불구하고 피곤하거나 귀찮은 내색 없이, 아빠가 내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 어린 날의 내가 그리 귀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덥석덥석 받기만 했던 사랑이다.


본가를 떠나 멀리 있는 대학에 입학한 뒤, 내 힘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웠던 일들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잘 몰랐던 나는 무작정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그마저도 털어놓고, 털어버리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그저 훌쩍거리며 울거나, 침묵하는 게 다였던 꽤나 불친절하고 일방적인 전화들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흐르던 정적을 기다려준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은 무슨 일이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고, 기억이 나는 일들도 웃으며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그들의 헛기침이나, 마우스를 딸칵 거리던 소리, 책장을 넘기던 소리로 그 시간을 견뎠다. 누군가 나와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내게 큰 안도감을 주었다. 그런 자신들의 사소한 상냥함이 여러 번이나 날 지켜주었단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약속 장소에서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려 본 기억이 있다. 그 시절의 우리는 보고 싶다는 마음을 어렴풋이 공유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기 위해서 먼 곳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내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그와 만나기로 했던 서울역에 그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로부터 기차에서 내렸다는 전화가 걸려온 이윽고, 그는 식당가인 2층을 올려다보고, 나는 플랫폼과 연결된 1층을 내려다보며 서로를 찾기 시작했다. 물밀듯 들어오고 나가던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와 눈이 딱 마주쳤을 때, 우리는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를 기억한다. 모르는 이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냈다는 안도감, 그리움의 해소, 그런 것들이 섞인 미소가 참 예뻤다.


1층을 벗어나, 비교적 한적한 2층의 식당가 벤치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구경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를 보면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들뜨다가도, 가벼운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들뜨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분명 나에게서는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상기된 얼굴과 표정, 몸짓이 드러났을 것이다. 그를 보자마자,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역시나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 사라져 버렸고,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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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나는 많은 기다림 들을 만났다. 너무 오래 누군가를 기다리게 했으며, 누군가를 기다리다 지쳐 떠난 적도 있다.

 

기다리지 말라고 한 사람을 기다려 본 적도 있으며, 기다리겠다고 자신 있게 선전포고를 해놓고서 떠나버린 적도 있다. 장면들은 다양하다. 접힌 자국 없이 매끄러운 반면 어떤 페이지는 눈물 자국들이 선명하다. 망설임으로 엉킨 흔적들이 가득한 반면, 어떤 기다림은 스스로를 설득할 필요 없이 너무나 당연했다.

 

이때까지 만난 ‘기다림’들은 모두 나의 양분으로 남아 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무척 설렜다. 때때로 긴장을 했고 초조하고 불안했다. 짜릿함을 느꼈으며, 충만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어쨌든, 그 일련의 기다림 들은 나와 함께였다. 앞으로의 여정을 미리 볼 수 없지만, 내가 앞으로도 누군가를 기다릴 것이며, 누군가를 기다리게 할 것이라는 것은 확실히 안다. 그리고 나는 그 ‘기다림’의 과정들을 반복하며 더욱 더 의미있는 무언가를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런 기다림 들은 어김없이 더 큰 양분이 되어 내게로 돌아와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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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더 오래 걸리더라도 돌아가는 길이 의미 있을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사랑을, 용기를, 건강한 마음을 읽는다. 그들이 참으로 현명하고, 사려 깊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진심을 담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아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오늘도 다짐한다.

 

 

[이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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