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친절한 미술사로의 초대 - 벌거벗은 미술관

글 입력 2021.09.0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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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미술사'. 한 음절 차이에 불과한데 체감하는 거리는 너무나 먼 단어들이다. 입 안에 멤도는 '미술'이라는 말에는 제법 낭만이 있는데, '미술사'는 당장이라도 교양 서적을 펼쳐야만 할 것 같은 기분. 미술을 전공하고 미술사와 친하게 지내보려 애쓰는 내게도 긴 세대에 걸친 학문의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이란 부담이 크기 마련이다. 〈벌거벗은 미술관〉은 미술사의 큰 흐름을 따라 작품을 소개하되, 미술을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친절하고 실용적인 설명으로 안내한다.

 

 

…자칫하면 피상적으로 흐를 수 있지만, 최대한 현실에 근거한 실천적인 자세로 문제를 풀어보려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미술이 신비주의의 베일에 가려져 고상한 취미나 교양으로 포장되는 현실을 넘어서 영욕의 인류사를 담은 생생한 실체라는 인식에 다가가기 위해 크고 묵직한 질문을 던져볼 필요를 느꼈습니다.

 

- 프롤로그 "나도 아르카디아에 있다" 中 인용

 


미술관에서 도슨트를 따라 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아주 재미있는 한 학기 분량의 미술교양 대학수업을 듣는 기분이었다. 도슨트의 설명은 전시에 소개된 작가와 작품을 더 원활히 이해하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으나, 이 책은 역사와 역사를 작품으로 연결하고 매개하는 것을 통해 총체적인 미술사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고 할 수 있겠다. 명명해보자면 '친절한 미술사로의 초대'쯤일까. 으레 '초대'가 들어간 수업은 수강하는 것이 아니라는 설이 전해지는데, 마치 생생한 현장 강의를 듣는듯한 이 책을 따라가다보면 꽤나 즐거운 초대였다는 확신이 들 것이다.

 
 
 
고전은 없다 - 변화하는 이상미

 

 

혹시 고전미술을 오래되거나 우리와 관계없는 낯선 예술이라고만 생각하셨나요?

 

고전미술을 중심으로 짜인 교육과정은 20세기 초까지 서양미술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한국의 근대 미술교육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수많은 예비 작가들이 고전미술의 석고상 그리는 법을 암기하듯 훈련했고, 이 때문에 고전미술은 지난 20세기 내내 우리의 미감을 좌우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도 그 영향이 사라졌다고 말하기 어렵고요. (중략) 고전이 규범으로 자리잡게 된 과정을 추적하다 보면 '고전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한발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겁니다.

 

- 본문 '미술 입시의 석고 데생' 中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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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입시미술학원을 풍자한 관객참여프로젝트 `천하제일 뎃생대회`.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이상미를 강조했던 그리스·로마 시대의 작품 중, 원본이 그대로 보존된 작품은 많지 않다. 저자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고전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의 실체는 생각보다 모호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리스와 로마, 유럽을 중심으로 쌓여왔던 고전미술과 이상미에 대한 열광은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이 영향은 한국의 입시 미술 제도를 만들었고, '이상적인 조형미'의 기준이 되었다.

 

실제 오감 중 가장 빠르고 예민한 것은 후각이라고 하던데, 우리는 시각을 통한 지각의 속도가 가장 빠르다고 체감하는 듯 하다. 미와 추에 대한 판단을 하고, 즉각적인 첫 인상을 그 순간 판단하니 말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시대, 나이, 문화에 따라 달라지지만 이를 표준화, 수치화, 계량화하려는 시도는 현대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본문처럼 시대에 따라 사회 통념이 이상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신화가 남아있다.

 

쿠로스와 코레, 밀로의 비너스, 파르테논 신전, 라오콘 군상, 올림픽… 다양한 사례를 들어 시대가 찬미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소개하지만, 이 챕터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미'의 기준이란 유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사회가 수용하고 합의하는 아름다움이란 불변의 것이 아니며, 이전 시대 사조의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현 시대의 독자적인 가치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끝 맺는 저자의 말은 긴 시대의 이상미, 그리고 현대 사회에 즐비한 탐미를 대하는 성숙한 자세를 제시한다.

 

'미란 인간의 감정에 광범위하게 관계하기 때문에 이를 단지 몇몇 개념이나 조건으로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미에 관해서 열린 생각을 존중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미술도 열린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문명의 표정 - 시대의 초상



 

'왜 이렇게 미술은 심각할까? 미술에서 웃음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미술과 웃음에 어떤 함수관계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저는 미술과 웃음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면서 이와 관련된 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분야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가 별로 진행된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략) 이러한 이유로 저는 웃음과 미술의 관계를 좀더 깊숙이 바라봐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미술에 드러난 웃는 얼굴들을 고대부터 현대까지 시대적으로 모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연구를 진행하다보니 웃는 얼굴뿐만 아니라 당시에 폭넓게 통용되던 표정까지도 검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미술 속 웃는 얼굴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 인류의 문화와 역사적 단계를 대표하는 표정은 무엇일까?'하는 질문까지 던지게 되었던 겁니다.

 

- 본문 '미술은 웃지 않는다?' 中 인용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파트이다. '수많은 초상화 속 인물들은 어째서 웃지 않을까?'의 묘한 엄숙함에 대한 명쾌한 반전을 준다. 저자는 앵거스 트럼블이 2004년에 출간한 『미소에 대한 짧은 역사』에 근거해 웃음과 미술의 상관관계는 치의학 분야에서 답을 찾을 수 있으며, 치열에 대한 자신감이 없던 과거 사람들이 웃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을 답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치아가 건강한 사람이 그것을 두드러지게 뽐내는 작품 또한 드물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저자는 이 질문을 따라가다보면 곧 문화와 역사. 문명의 표정을 알 수 있다는 새로운 제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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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ampin Rider, BC 6세기 중반, 머리 높이 29cm,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아르카익 스마일(archaic smile)은 기원전 그리스 조각에 특징적으로 등장한 표정이다. 남성상인 쿠로스, 여성상인 코레에도 공통적으로 등장하며 다양한 조각상에 유사한 얼굴로 미소를 띄고 있는 표정이 반복되는 것이다. 입가의 미소는 조각에 생동감을 더하는, 즉 '생명'의 신성함을 더하는 방식이었다. 저자는 독일 철학자 헤드위그 케너의 말을 인용해 아르카익 스마일을 '불가사의한 삶의 힘을 가장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보았다.

 

시대가 추구하는 미적 가치 기준의 변화는 표정에도 반영이 된다. 초상 제작이 엄격히 통제되던 시기도 있었고, 무표정을 강조할 때도 있었으나, 극도로 감정표현이 격앙된 표정을 양식으로 삼던 시기도 있었다. 감정과 표정에 대한 연구는 결국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희노애락의 양상이자, 동시에 인간 신체인 얼굴로 이루어지는 표현 양식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 파트를 읽으며 나는 현재 작업하고 있는 초상 작업들이 떠올랐다. 사람의 표정을 통해 감정을 보여준다는 것은 단순히 순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삶이 겉으로 드러난 얼굴을 통한다는 점에서 파고들어 살펴볼 수록 흥미롭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 문명의 표정이 보다 따뜻했으면 하는 바람'이 내게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미래에서 지금 동시대의 미술을 되돌아 볼 때, 지금 현대의 표정은 어떤 얼굴일까.

 

 


반전의 박물관 - 역사의 보물창고



 

말하자면 현대의 박물관은 연구를 위한 공간이자 대중에게 교육과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한 열린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략) 이번 장에서 제가 다루려는 이야기는 고상한 지식의 성채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편안한 휴식의 공간처럼 보이기도 하는 박물관이 걸어온 의외의 뜨거운 역사입니다. 혁명의 불길과 고전이라는 상상의 기준을 쟁취하려는 욕망 속에서 변신과 반전을 거듭해온 박물관의 역사를 살피고 나면 더는 박물관이라는 공간이 평화롭고 안온한 휴식 공간으로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 본문 '박물관의 역사는 뜨겁다' 中 인용

 


박물관(museum)의 어원인 무제이온(museion)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동명의 팀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어 각별한 애착이 있는 명칭이다. Museion은 '뮤즈들의 전당'이라는 의미로 음악과 철학,과학 등 다양한 학문의 신인 뮤즈의 전당이라는 것이다. 박물관에는 이처럼 미술관과는 또 다른 역사적 집념과 학술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열의로 가득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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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안토니오 마티니 「1787년 루브르에서 열린 살롱전」, 1787년

 

 

박물관은 시대가 보존하고 전시하길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대변한다. '형식은 인간성을 따른다'는 저자의 선언처럼, 변모하는 박물관은 전시된 유물과 작품들을 통해 또 다른 인간들에게 영향을 남긴다.

 

흥미로웠던 사실은 우리나라에 설립된 박물관과 미술관이 영화관 개수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었다. 나는 과연 그렇게 많은 박물관들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던가? 어린 시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사생대회에 나갔던 적이 있었는데, '각자가 가장 마음에 드는 유물을 그려보기'가 주제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진시관을 둘러본 적은 많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마음에 찬 유물 앞에서 몇 시간동안 내리 그림을 그리는 진풍경은 아직까지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나는 화려함에 이끌려 백제금동대향로를 그렸는데, 시간 내에 모두 그리기엔 대향로의 모양이 무척 복잡해 결국 색도 모양도 엉망진창 상상화처럼 그려버렸었다. 당시 수상했던 사람은 백자 달항아리 한 점을 그렸는데, 구 모양으로 꽉 찬 항아리 하나가 주는 인상이 무척 강했었다. 그 사람이 봤던 박물관의 모습과, 내가 봤던 박물관의 모습이 사뭇 달랐을 거라는 생각. 항아리 하나가 줄 수 있는 감동, 그것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박물관의 역할. 서로 다른 매력의 가치를 후대에 전하는 보존고. 어쩌면 박물관이 우리에게 유의미한 이유는, 역사가 남겨놓은 유물의 멋을 언제나 한결같이 간직해 전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미술과 펜데믹 - 죽음과 춤을 추는 사회



 

과거를 돌이켜 보면 인류는 감염병의 대위기 속에서도 발전의 계기를 만들어왔고, 이 과정에서 미술의 역할이나 읨도 재조정되었습니다. 감염병의 공포와 싸우면서 미술의 시대적 소명도 바뀌었던 겁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본다면 지금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도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미술에 상당한 변화를 불러일으키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 본문 '새 부리 가면의 정체' 中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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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볼게무트 「뉘른베르크 연대기」 중 「죽음의 무도」, 1493년

 


저자는 흑사병이 창궐했던 긴 시대에 걸쳐 사회와 예술이 죽음과 아픔을 감당하던 역사를 소개하며, 이 작품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과 유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며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고통과 공포의 병마와 싸워왔던 예술은 그 모습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초월적인 성화들은 그 모습만으로 시각적 환희가 되었고, 성자들의 모습을 가장 낮은 모습으로 묘사한 작품들은 가난한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저 화려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넘어 삶의 민낯을 마주했고, 사회적 고민들을 녹여냈기 때문에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예술가들에게 있어 고독과 병은 늘 공존하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고질적으로 고민과 번민을 통해 무언가를 창작하는 것이 생활인 사람들에게, 작품을 만들어 세상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펜데믹 시대에 닥쳐 작가로 살아가고자하는 나는 과연 이 시기를 어떻게 견뎌내야하는가, 그리고 어떤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책을 마치는 저자의 마지막 말은 울림이 크다.

 

예술과 역사의 박물관이 우리에게 남긴 것 중에서 가장 큰 유산은, 분명하게 예술이 미완의 지금 우리를 긍정하게 해주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들이 인간의 한계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도전했기 때문에 그 한계가 명확해지면서 인간성을 또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된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실수를 합니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해왔습니다. (중략) 미술을 통해 본 인간은 어떤 모습이냐고 제게 묻는다면 '인간은 늘 방황하지만 그것에 도전해서 변화를 일으키는 자'라고 답할 것입니다. 미술의 역사는 바로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미술의 역사를 명작들로 이어진 위대한 역사라고 알고 있지만, 조금만 냉철하게 살펴보면 미술의 역사는 도리어 실패와 미완성으로 이루어진 고뇌와 좌절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 본문 '고민하고 방황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中 인용

 


[지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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