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움과 채움, 순환으로 말하는 영원함 [미술/전시]

불과 종이의 매개자, 김민정
글 입력 2021.09.05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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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파괴하는 성질을 가진다. 불의 등장으로 인간의 삶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것은 분명하지만, 조금이라도 잘못 다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불이 지나간 자리는 폐허가 되고 생명이 사라지며 재만 남는다.

 

반면 종이는 연약하다. 쉽게 구겨지고 작은 힘으로도 찢어진다. 그래서 그 형태를 온전히 오랫동안 유지하기 어렵다. 특히나 종이는 불에 취약해서 불길이 조금이라도 닿는 순간 금세 타버린다.

 

이렇게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불과 종이를 재료로 삼은 작가가 있다. 김민정 작가는 종이, 그 중에서도 한지를 불로 태워 작업하는 동양화 기반의 현대미술 작가다. 그의 작품 속에서 종이 위의 그을음은 먹선이 되고, 콜라주 된 한지는 그림의 배경이 아니라 재료로서 기능한다.

 

 

 

모든 작업의 시작, 한지



김민정 작가가 한지를 재료로 선택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인쇄소를 운영하신 덕에 어릴 때부터 종이와 친숙했기 때문이다. 인쇄소에는 잘려진 종이가 가득했고 작가는 그 종이들로 카드 같은 것으로 만들면서 가지고 놀았다. 작가의 미술적 재능을 알아본 그의 어머니는 수채화, 서예 수업을 보내기도 했다. 그가 대학에 진학하고 동양화를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작가라면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가장 손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을 재료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는 그것이 한지였다. 둘둘 말아 어디든 가지고 다닐 수 있고 작가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재료. 한지라는 재료에서 그의 모든 작업이 시작됐다.

 

미국보다는 유럽을, 특히 르네상스 시기를 좋아했던 작가는 한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국립미술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막상 학교에 도착하니 사진과 영상, 퍼포먼스가 주류를 이뤘다. 서예와 수채화를 줄곧 해왔던 작가는 소외감을 느꼈고 점점 자신감도 잃었다. 잠시 방황했지만 ‘더 자유로워지라’는 교수님의 말을 듣고 점차 추상 회화에 눈을 떴다. 그렇게 동양의 붓과 화선지, 서양의 추상적 관점을 결합해 지금의 스타일을 만들 수 있었다.


 

"오히려 한국에서 멀리 떠나간 그곳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해온 것을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한지와 먹, 붓이 새롭게 보였다"

 

– 김민정

[중앙일보] 한지 태우며 나를 잊었다, 겹겹이 쌓인 시간이 작품이 되었다

 

 

 

불과 종이, 그 둘의 매개자



한지는 작가에게 너무도 익숙한 재료였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그래서 동시에 지루함도 따라왔다. 기존의 방법과는 다르게 선을 그릴 수는 없을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불이었다.

  

 

“제가 제 능력을 사용한다면 분명 한계에 부딪힐 거예요. 그렇지만 자신을 잃게 된다면 정신성이나 영감과 같은 제 자신보다 거대한 어떤 것에 가까워지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저는 ‘매개자’가 되어 그 무언가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죠.”

 

– 김민정

GALLERYHYUNDAI, Talks - Minjung Kim 김민정 × Hans Ulrich Obrist

 

 

작가는 한지를 자르고 그 가장자리를 향불로 태운다. 불이 지나간 자리엔 그을음이 남는다. 이것은 그 자체로 선이 된다. 먹이 아닌 불이 만들어 낸 선. 무형의 ‘불’과 유형의 ‘종이’는 작가라는 ‘매개자’에 의해 선으로 탄생한다. 작가는 그것을 거대한 힘을 빌려 만든 선이라 말한다.

 

불은 종이를 단숨에 태워버리기에, 작가는 종이의 가장자리를 태울 때 숨을 멈춘다. 고른 호흡과 똑같은 힘을 주고 작업을 반복한다. 그렇게 집중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을 잃는다. 대신 그 자리에는 초자연적인 힘이 대신한다. 자기 자신 이상의 거대한 어떤 것의 힘을 빌려 완성하는 그의 작품은 비워져야만 채울 수 있다는 불교 이론에 기반한다.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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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eno di Vuoto >, 2020,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145 x 200 cm, ©GALLERYHYUNDAI

 

 

이것은 < Pieno di Vuoto >라는 작품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이 작품은 동그란 색지를 겹쳐서 화면 위에 마치 꽃이 피어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색지 가운데에 구멍을 내 도넛처럼 만든 뒤 그것을 겹겹이 쌓은 것이다. 빈 공간을 또 다른 종이가 채우고 또 채운다. 비움의 채움이다. 이런 모순적인 개념의 양립은 오래 전부터 서예와 불교 이론을 배워온 그의 작품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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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 Couple >, 2019,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40 x 40 cm, ©GALLERYHYUNDAI

(오) < Couple >, 2019,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40 x 40 cm, ©GALLERYHYUNDAI

 

 

작가는 어느 날 작업을 위해 종이를 동그랗게 자르던 중 버려진 종이 조각에 눈길이 갔다. 같은 종이에서 나왔는데 어떤 것은 작품이 되고 어떤 것은 버려져야만 하는가 되묻던 그는 새로운 시리즈를 만들었다.

 

< Couple >은 두 개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그랗게 잘린 종이들이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집합되어 있는 작품과 그 나머지 조각들로 만들어진 작품. 이들은 제목 그대로 커플, 한 쌍을 이룬다. 버려진 종이 조각은 원형의 종이 조각과 다시 합쳐졌을 때 전체를 완성하는 배경이 된다. 전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 둘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전혀 다른 것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완벽함. 그의 작품에선 이렇게 양립하는 두 가지 개념의 합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완성됨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이 외에도 작가는 다양한 것에서 영감을 얻는다. 길 위의 모습은 < The Street >로, 색색의 책이 꽂혀있는 책장은 < Story >로, 흐르는 물결은 < The Water >라는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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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ue Mountain >, 2020, Watercolor on mulberry Hanji paper, 81.5 x 143 cm, ©GALLERYHYUNDAI

 


< Mountain >시리즈는 자연에서 영감을 얻었다. 파도를 표현하고자 했지만 감상자들은 산처럼 보인다고 해서 탄생한 작품이다. 먹의 농담이 변화하며 만들어내는 산의 능선, 파도의 물결이었을 흐름을 보자면 물과 나무, 모든 자연은 연결돼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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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meless >, 2020, Ink and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paper, 104 x 73 cm, ©GALLERYHYUNDAI

 


< Timeless >는 바로 < Mountain >시리즈에서 비롯된 것인데, 파도의 소리를 표현하고자 한 작가의 시도가 담겨있다. 종이를 자르고, 가장자리를 고르게 태워 그을음의 선을 만든 뒤 그것을 겹쳐서 배치했다. 그을음은 서로 겹치지 않고 한 방향으로 이어진다. 밀려오는 파동 같기도, 해안, 혹은 바위에 부딪혀 나가는 파도 같기도 하다.

 

바다가 시작되는 그 끝에서 가만히 파도를 바라볼 때면 시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무한히 반복되는 물결의 부딪힘과 밀려나감. 어쩌면 인류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오랜 시간을 그렇게 흘러왔고 밀려나갈 파동을 보고 있자면 끝없는 영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가 파도의 소리를 ‘Timeless’라고 정한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물학적 흐름으로 인한 돌연변이 현상으로 시간을 감지할 뿐이다. 나는 산을 그리고, 자르고, 태워 조수(潮水)를 가두고 붙인다. 산의 흔적은 영겁의 해류의 소리가 된다. 먹의 띠가 만든 수평선은 시간을 초월하게 한다."

 

– 김민정

GALLERYHYUNDAI, 전시서문

 

김민정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감각이 있다. 양 극단의 합일이 만들어내는 완전함, 작업 과정 혹은 작품 그 자체에서 보이는 비움과 채움, 밀려오고 나가는 끝없는 물결이 만들어내는 영원. 한 방향으로 흐르는 대신 끝없이 순환하는 어떤 흐름, 그것의 반복.

 

그런 반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시간이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의 말처럼 시간은 사실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순환하는 흐름에 그저 이름을 붙이고 살아가는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그걸 떠올리면 시간의 힘에 얽매인 유한한 인간에게도 영원은 그리 불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순간, 감각에 집중하는 명상의 시간, 작가처럼 숨을 멈추고 작업에 집중하는 시간.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게 되는 그 순간만큼은 모두 영원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룩셈부르크 현대미술관 관장 엔리코 룽기의 말처럼 김민정 작가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과 만져지지 않는 것들을 형상으로 드러낸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들을 유형의 결과물로 우리에게 선보인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그의 작업. 종이 위에 담긴 그의 세계에는 한계가 없다.

 

 

참고자료

The Artro, 김민정 Minjung Kim, 비움속의 채움 (2018.03.26).

중앙일보, 한지 태우며 나를 잊었다, 겹겹이 쌓인 시간이 작품이 되었다 (2021.03.03).

GALLERYHYUNDAI, Talks - Minjung Kim 김민정 × Hans Ulrich Obrist (2021.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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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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