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현수막으로 조형하는 사랑과 평화 [미술/전시]

《정재철 : 사랑과 평화》전
글 입력 2021.09.01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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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는 터줏대감처럼 우뚝 서있는 붉은 벽돌의 미술관이 있다. 그러니 그곳에 촌스러운 현수막이 걸린 것은 꽤 눈에 띄는 일이었다. 단정하게 쌓인 벽돌을 노란 형광빛으로 덮은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웠다. 노랗고 빨갛고 까만. 키치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취향은 아니었다. 멈췄던 발을 다시 옮기려는데 전시 제목이 보였다.


'사랑과 평화.'


현수막이 감싸기엔 참 거대한 이야기 같았다. 한 팔로 지구를 껴안을 수 있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그제야 현수막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미술관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그것이 차양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파트 분양권, 국제결혼 따위의 단어가 어지럽게 섞여 있어 그래 봤자 현수막으로 보였지만 조금 궁금해졌다. 온기 없는 퍽퍽한 단어를 덮어쓴 저 현수막이, 어떻게 사랑과 평화를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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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 미술관에서 2021년 7월 1일부터 8월 29일까지 진행되었던 

《정재철 : 사랑과 평화》전은 정재철 작가의 작고 1주기 전으로,

'실크로드 프로젝트'(2004-2011)와 '블루오션 프로젝트'(2013-2020)가 소개되었다.

 

 

정재철 작가는 원래 나무로 조각을 하던 사람이었다. 서울대 조소과를 나와, 1988년에 중앙미술대전 조각 대상을 받으며 착실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누구나 부러워할 조각가로 주목받던 그는 2000년대에 들어서며 갑자기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해외에서 공부하며 무언가를 느꼈는지, 당시 사회 분위기의 영향이었을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재료를 다듬어 형상을 만들어내던 조각가가 길을 걷는 여행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단순히 여행을 하고 길을 떠나는 것에 있지 않다. 순례길을 걷는 수행자처럼 묵묵히 길을 걷는 것은 예술가의 몫이었지만 예술을 실천하는 것은 그가 만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작가가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진행한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버려진 폐현수막을 나눠주어 사람들이 어떻게 이용하는지 추적하는 작업이었다. 쓸모를 다 한 것을 다듬어 아름답게 만드는 조각가의 삶과 비슷했으나, 이번에는 사람들이 다듬어 가는 것을 관찰하는 입장에 섰다는 점이 달랐다.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동서를 잇는 교역로였던 실크로드를 따라 총 3회차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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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실크로드 프로젝트', 2004-2005, 1시간 53분 3초 / (오) '뉴 실크로드 프로젝트', 2008, 49분 31초

 

 

1차 - (인도, 네팔, 파키스탄, 중국) 각국 언어로 쓰인 안내문과 함께 현수막을 전달하고 재방문해 사용방법을 확인했다. 안내문에는 이 천이 광고용 현수막으로 쓰였던 것이며, 어떤 용도로 사용해도 좋은데 3개월 후에 돌아와 용도를 다시 확인하겠다는 말이 쓰여있다.


2차 - (파키스탄, 이란, 터키) 바자르(Bazaar)라는 시장을 컨셉으로 1차를 보완하여 다시 진행하였다. 현지인들과 햇빛 가리개를 만들어 그늘을 조성하기도 했다.


3차 - (터키,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헝가리,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을 컨셉으로 유럽의 유명한 광장에서 햇빛 가리개를 만들고 설치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현수막이 뭐라고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은데 전시장에 남은 그날의 기록을 마주하면 어딘가 울컥하게 되는 면이 있었다. 쓰레기에 불과할 수 있는 폐현수막이 자연스럽게 이국의 풍경에 녹아있는 것이 이상한 기분을 들게 했다.


작가는 모든 과정을 집요하리만치 꼼꼼히 기록했다. 국경을 넘고 길을 걸으며 만났던 사람들과의 이야기, 그가 배포한 폐현수막이 마을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 느꼈던 감정과 다음 회차에 대한 계획이 카메라와 종이에 빼곡하다. 전시가 그 기록을 존중하며 같이 읽어내도록 구성되어 있어서 좋았다. 예술가로서의 행적과 함께 그의 기록에서 정재철이라는 사람의 시간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크로드 프로젝트 기간 동안 작성한 작가노트)

 

'식사 후 불이 나갔다. 촛불을 켜고 모기향도 프론트에서 가져와 켰다. 매캐한 냄새에 눈이 맵다. 화장실에서는 한 방울씩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밖에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간간히 들리는 별이 뜬 밤이다.' 


'포도(11g) 1.5 / 저녁 5.5 / 물 1.5 / 호텔 45유로'


'7月 11日 (月) 비. 오전까지 아직 여권을 확보치 못함'


'임페리얼 게스트하우스 / 자이 프라단 → 이직 / 딘다(청소아줌마) → 이직 / 그 외 만날 수 없음'


'도착하자마자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첫 집이 보였다. 길가에서 볼 수 있는 대문 가리개로 쓰고 내부에도 두 군데 더 커튼으로 쓰고 있었다. 여러 집에서 반복적으로 보이는 베개 커버가 인상적이다. 테두리에 장식까지 곁들였다. (...) 전달 때보다 오히려 우호적이었다.'


'일부 미 사용자는 문맹으로서 처음부터 내용을 완전히 파악치 못하고 받는데 치중했음이 분명함.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 점(보완)'


'나눠 줄 때의 혼란 혼잡은 없었고 모두들 반갑게 맞아주었다. 쓰지 않은 사람들도 대체로 써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현수막이 막 쓰기 아까워서 잘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쓰기 위해서였다. (...) 질척거리는 길을 따라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나와 샤시네 집에 다시 갔으나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샤시 삼촌이 다른 종교인에게 테러를 당해 돌아가셔서 가게가 비었노라고 했다.' 


'빨래를 짜듯 꾹꾹 누르고 비틀어 내 몸에 물기를 말릴 요량인 날씨 ... 하늘도 주변도 사라지고 흐르는 땀과 내 앞에 선 사람만이 세계의 전부인 양 나는 격리되어 있었다.'

 

 

사진과 영상으로 보이는 현수막 프로젝트는 한순간의 오차 없이 완벽해 보였지만 그 안에 무수히 생략된 이야기가 있었다. 무엇을 만날지 모르는 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며 시행착오도 겪었다. 씁쓸함이 묻어 나오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반가움과 정도 있었다. 달력에 쳐진 빗금마다 긴 길을 걷고 즐기고 버텼을 작가가 떠올랐다.


그쯤 현수막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단지 현수막의 다른 용도를 찾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퍼져 나갈지 모르는 민들레 홀씨처럼 서로의 흔적이 녹아 퍼지는 것. 작가가 길을 떠난 것은 그렇게 섞여 들어감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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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2010, 33분 43초

 

 

3차 프로젝트를 담은 영상에서 누구나 알 법한 외국의 광장이 나온다. 작가는 현수막으로 햇빛 가리개(차양)를 만들어 설치한다. 아름다운 광경에 침입한 생뚱맞음에 몇몇 사람이 들어와 즐거워한다.


전시장에도 햇빛 가리개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 밑에 앉아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커다란 광장을 배경으로 현수막을 입고 사람들 사이를 거니는 작가의 영상이 재생된다. 우스워 보이는데 꿋꿋한 모습에서 결연함마저 비친다. 문득 전시 제목인 '사랑과 평화'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처음에는 왜 하필 현수막인지 의미를 생각했다. 자본주의 아래 태어나 광고가 유효한 시점까지만 의미 있는 물건. 촌스럽고 미적 감각 따윈 없어 도시의 미관을 해치는. 금방 쓰레기로 전락하여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현수막. 자본주의 쓰레기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며 폐해를 비판하고, 전복하려 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닐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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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2010, 7분 18초

 

 

'사랑과 평화'는 3차 프로젝트의 마지막 장소였던 런던의 팔리아먼트 광장에서, 반전 시위 캠프 천막 위에 작가가 적은 문구라고 한다. 사랑과 평화를 되새기며 다시 영상을 본다. 현수막으로 온몸을 감싼 채 사람들 사이를 걷는 작가의 모습은 묵묵하고 외로워 보였다. 광장의 중심에서 사랑과 평화를 외친다고 해도 대수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수막으로 문화가 전이되고 수용되는 것을 살피겠다는 의지도 밋밋하게 들린다. 하지만 작고 조심스럽게 전해지는 목소리가 있다.


폐현수막으로 만든 작은 햇빛 가리개가 더위를 식혀줄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소박할 것이다. 인류의 유산이라는 광장 건축물 앞에 놓인 현수막 햇빛 가리개는 참 보잘것없다. 그가 건넨 현수막으로 사람들이 만들어 낸 물건도 소박했다. 기껏해야 베개, 커튼, 식탁보. 쓰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현수막은 단 한 명에게라도 그늘을 만들어주었으며 단 한 명에게라도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다. 가끔은 그 조그마한 그늘이 필요한 때가 있다. 반전 시위를 한다고 해서 지구 상의 전쟁이 종식되지 않지만 희망을 갖고 더 나갈 수 있는 것처럼. 러브 앤 피스라는 단어가 무기질적으로 세상에 남발되어도 조금의 울림이 남아있는 것처럼. 현수막으로 관계의 길을 걷는다는 작은 예술엔 미약하게 퍼지고 연결되는 온기가 있었다.


작가의 기록이 항상 사람을 담고 있었듯 전시장 곳곳에 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와 만났던 사람들이 전해온 편지들, 사진들. 길을 공유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작가가 걸었던 길을 보여주는 것처럼 전시장 벽면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어지고 이어지는 크고 작은 물결을 보며 생각했다. 한 팔로 지구를 감쌀 수 없지만, 한 팔로 그 옆 사람을 감싸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지구를 감싸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고. 작가가 걸은 길의 끝엔 투박하기만한 재료로 어느새 관계와 사랑이 조형되고 있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비록 거대한 영향력은 미치지 못한대도,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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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프로젝트 기록, 2004

 

 

사랑과 평화라는 단어에 이끌려 전시장을 찾았던 것은 그치지 않는 폭력과 혐오의 사회에 다소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가끔은 이 두 모호한 단어가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 의심스럽지만 온전하지 않은 형태라도 이들에 기댈 수 있길 소망한다. 그런 점에서 정재철 작가의 현수막 그늘은 연약하고 볼썽사납지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연대를 통해 만들어가는 예술이라는 투박함과 작가의 고요함이 아름다웠다.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끝나는 장소 쯤 백종관 작가의 '기적소리가 가깝고 자주 들린다'(2021)가 재생되고 있었다. 정재철 작가가 남긴 글과 영상을 재구성해 만든 것이다. 인상 깊었던 구절이 있었다. 작가의 작업 방식이기도 했으며 나의 감상이기도 한 문장이었다. 그의 길이 남긴 흔적으로 조용히 흐를 수 있어 좋았다.

 

'그 풍경 위로 내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현실감이 없다. 단지 아름답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인 것이다.'

 

 

[최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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